최규하(崔圭夏) 전 대통령이 22일 오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 전직 대통령 가운데 최고령이었던 최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6시께 서울 서교동 자택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발견돼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전 7시 37분께 영면했다. 사진은 지난 79년 12월 21일 제1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최규하 대통령. 연합뉴스
신군부와의 ‘악연’ 끝내 가슴 속에 파묻어
22일 서거한 최규하(崔圭夏)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헌정 사상 대통령 직위가 최단명으로 끝난 `비운의 대통령'이었다.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갑작스레 대통령직에 올랐지만 이듬해 5.18 사태로 대변되는 신군부의 집권으로 8개월여 만에 하야, 혼란한 정국 속에서 한국 정치사의 중앙무대 뒤로 쓸쓸하게 퇴장해야 했다.아호가 현석(玄石)인 최 전 대통령은 1919년 7월16일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경성제1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도쿄 고등사범학교 영문과를 마친 뒤 만주국립대동학원을 졸업했다.최 전 대통령은 해방되던 해인 45년 서울대 사범대 교수로 임용됐으나 이듬해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관직생활에 첫 발을 디딘 뒤 51년 농림부 농지관리국장 서리를 거쳐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발탁되면서 전문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최규하(崔圭夏) 전 대통령이 22일 오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 전직 대통령 가운데 최고령이었던 최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6시께 서울 서교동 자택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발견돼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전 7시 37분께 영면했다. 사진은 지난75년 12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최규하 국무총리 서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모습. 연합뉴스
그는 52년 주일대표부 총영사, 59년 주일대표부 공사 및 외무부 차관, 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외교담당고문, 64년 말레이시아 대사를 거쳐 67년 제 14대 외무부 장관(67∼71년)에 기용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71년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에 임명돼 72년 11월과 73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남북조절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평양에 다녀오기도 했다.국제회의 참석만도 67년 22차 유엔총회 수석대표를 비롯, 30여회에 이를 정도로 한국 외교에 큰 족적을 남긴 역대 최고의 외교관 가운데 한명으로 꼽히기도 한다.최 전 대통령은 유신체제의 서슬이 시퍼렇던 75년말 국무총리 서리를 거쳐 이듬해 국무총리로 임명돼 79년까지 4년간 국무총리직을 수행했으며 79년 10.26 사태로 박 전 대통령이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대통령권한대행에 올랐다.곧이어 같은 해 12월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으로 대통령에 피선됐으며 전두환(全斗煥)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 주도한 신군부의 12.12 사태 직후인 같은 달 21일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그는 권한대행 시절인 80년 헌법개정, 81년 상반기 대통령 선거, 81년 6월 정권 이양 등의 정치일정을 제시하고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한 데 이어 취임 직후인 80년 2월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을 비롯, 시국관련자 687명을 사면.복권하는 등 잇따른 전향적 조치를 통해 정치적 안정을 꾀했다.그러나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중심이 돼 5.18 사태가 터지는 등 혼돈의 회오리가 계속되면서 10.26 사태 이후 `서울의 봄'은 오래 가지 못했고 결국 최 전 대통령은 신군부의 위세에 눌려 그해 8월1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특별성명을 발표한 뒤 대통령직을 사임해야 했다.4공화국에서 5공화국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진공상태에서 대통령직에 올랐다 결국 신군부에 떼밀려 대통령으로서의 정상적인 권한과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다 8개월이 채 안되는 대통령직을 마감한 셈이다.앞서 5월31일 대통령 자문보좌기관이라는 명분 하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가 신설됐으며, 최 전 대통령이 위원장이긴 했지만 신군부의 주도 하에 공직자 숙청, 삼청교육, 언론인 해직, 개헌작업 등 일련의 행정부 통제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때문에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국익 우선의 국가적 견지에서 임기 전에라도 스스로의 판단과 결심으로 합법적 절차에 따라 정부를 승계권자에게 이양하는 것도 확실히 정치발전의 하나라고 생각한다"는 내용의 하야 성명이 신군부의 강압에 의한 것인지 여부를 놓고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실제로 대통령 의전일지 등에 따르면 신군부가 5.17 비상계염령을 전국으로 확대한 이후 같은달 31일까지 최 전 대통령이 공식행사에 참석하거나 각료, 군관계자 또는 민간인을 면담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등 신군부의 그늘에 가린 그의 한계가 자료상으로도 입증된 바 있다.최 전 대통령의 당시 한계에 대해선 90년대 들어 시작된 `12.12 및 5.18 사태'에 대한 검찰 수사 와 이후 재판 과정을 통해서도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당시 검찰 수사 및 공판 기록에 따르면 12.12 사태 당시 최 전 대통령은 전두환 합수부장의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 연행 요청에 대한 사전재가를 거부했으며 5.17 비상계엄 확대 직전 중동순방 중 급히 귀국해 신군부의 비상기구 설치 및 국회해산 요구는 거부한 채 계엄 확대에 대해서만 국무회의 개최를 지시, 재가했다.신군부측이 최 전 대통령의 하야 전에 이미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대통령으로 추대했다는 사실도 드러난 바 있다.또 "80년 3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총리실로 찾아와 `10.26 사태와 관련, 최 대통령도 조사한 사실이 있다'며 자랑스럽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는 신현확(申鉉碻) 당시 총리의 공판 증언도 최 전 대통령의 위치를 가늠케 한다.이처럼 최 전 대통령에게는 신군부의 압력에 못이겨 쫓겨난 `불행한 시대의 대통령'이라는 수사가 따라붙지만 일각에서는 오히려 신군부의 집권을 묵인 내지 방조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제기되는 등 `엇갈린 평가'가 상존했다.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도 99년 회고록에서 최 전 대통령에 대해 "헛된 욕심과 좁은 시야에 갇혀 민주화를 지연시켰다"는 부정적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그러나 정작 최 전 대통령은 `자물통'으로 불릴 정도로 5.17 비상계엄 확대 및 하야 과정 등에 대해 끝까지 침묵을 지킴으로써 진실은 끝끝내 베일속에 가려지게 됐다.
최규하(崔圭夏) 전 대통령이 22일 오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 전직 대통령 가운데 최고령이었던 최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6시께 서울 서교동 자택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발견돼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전 7시 37분께 영면했다. 사진은 최규하 전 대통령이 96년 11월 14일 오전 12.12와 5.18사건 증인심문을 받기위해 서초동 서울지방법원 청사에 도착, 법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최 전 대통령은 법원의 계속되는 증인신청 요구에 불응하다 96년 11월14일 12.12 및 5.18 수사 관련 항소심 11차 결심 공판 때 강제구인 절차에 의해 법정에 서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지만 증인선서 및 증언을 거부, 입을 열지 않았다."전직 대통령이 재임중 행위에 대해 후일 일일이 소명이나 증언을 해야 한다면 국가경영상 문제를 야기할 수 있고, 전례를 만들어 앞으로 배출될 대통령의 직무 수행에 부담을 주는 것은 국익에 손상이 된다"는 증언거부의 변만을 남겼을 따름이다.최 전 대통령은 81년 4월부터 88년까지 국정자문회의 의장으로 활동했으며 91∼93년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의장을 역임했다.70년 일등수교 훈장, 71년 수교훈장 광화대장, 79년 무궁화대훈장, 8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등 국내훈장과 타이정부로부터 받은 백상최고 기사대장 등 10여 종의 외국훈장을 받았다.역대 대통령 서거는 이승만(李承晩) 초대 대통령(1∼3대.65년), 박정희 전 대통령(5∼9대.79년),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4대.90년)에 이어 4번째이다.그는 하와이 망명생활 중 쓸쓸히 생을 마감한 이승만 전 대통령이나 부하의 총탄에 숨을 거둔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달리 천수를 누렸지만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최단명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홀홀히 사라졌다. 격동의 시기, 신군부와의 악연도 무덤 속으로까지 짊어진 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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