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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의 새문화 출처: 증산도와가을개벽

미국 ‘제2 퍼거슨 사태’ 오나…이번엔 흑인 목졸라 숨지게 한 경관 불기소

 

한겨레 2014.12.04

 

 

미국 뉴욕시 스태튼아일랜드 대배심이 3일 비무장 흑인 남성 에릭 가너를 ‘목조르기’로 숨지게 한 백인 경찰관을 기소하지 않기로 한 뒤, 결정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뉴욕 거리 한복판에 드러누워 시위를 벌이고 있다. 뉴욕/EPA 연합뉴스

 

불법 담배상 의심받자 체포 거부

백인경찰이 목졸라 제압한 뒤 숨져

검시관 “흉부압박·엎어진 자세 사인”

 

뉴욕대배심, 행인 촬영 영상 봤지만

고의성 없었단 경찰 주장 믿은듯

분노한 시민들 도심서 항의 시위

“숨을 쉴 수가 없다!(I Can’t Breathe)”

“숨을 쉴 수가 없다!(I Can’t Breathe)”

 

미국 뉴욕시 스태튼아일랜드 대배심이 3일 비무장 흑인 남성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그를 ‘목조르기’로 숨지게 한 백인 경찰을 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미국이 다시 들끓고 있다. 지난달 24일 미주리주 퍼거슨에서 비무장 흑인 청년을 쏴 죽인 백인 경찰관을 불기소 결정한 데 이어, 9일 만에 또 백인 경찰이 불기소 처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배심의 결정이 알려진 뒤 거리에 나선 뉴욕 시민들은 숨진 흑인 남성이 남긴 마지막 말을 따라 “숨을 쉴 수가 없다”고 외치면서 항의시위를 했다. 민권단체들은 오는 13일 워싱턴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기로 했다.

 

지난 7월17일 에릭 가너(43)는 경찰관들한테서 거리에서 불법으로 담배를 팔고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가너는 동행을 요구하는 경찰관들을 향해 “난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팔지 않았다”며 “(범죄자 취급을 받는) 이런 상황이 지겹다”고 말했다. 가너는 350파운드(159㎏)의 거구여서 경찰관들보다 확연히 컸지만, 항의하는 모습이 위협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경찰이 체포를 시도하자 가너는 “내 몸에 손대지 말라”며 뿌리쳤고, 곧이어 사복을 입은 경찰관 대니얼 판탈레오(29)가 뒤쪽에서 달려들어 가너의 목을 조른 뒤 한쪽 팔을 꺾고 그를 쓰러뜨렸다. 옆에 있던 경찰관 셋이 합세해 바닥에 엎어진 가너의 머리와 몸, 팔을 눌렀다. 가너는 판탈레오가 목을 감싼 순간부터 고통을 호소했다. 길바닥에 엎어져 의식을 잃을 때까지 “숨을 쉴 수가 없다”고 10여차례 반복해 말했다. 경찰은 쓰러진 가너를 툭툭 쳐보고는 반응이 없자, 심폐소생술을 했다. 가너는 몇분 뒤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깨어나지 못했다. 이런 장면들은 행인들이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은 동영상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뉴욕시 검시관은 “경찰의 신체적 제지 당시 흉부 압박과 엎어진 자세”가 가너의 사망 원인이라고 밝혔다. 경찰이 가너의 목과 흉부에 가한 압력으로 그가 숨졌다는 것이다. 검시관은 가너가 천식환자였다는 점과 고혈압, 심장질환도 영향을 미친 요소로 꼽았다.

 

지난 9월 대니얼 도너번 리치먼드카운티 검사가 소집한 스태튼아일랜드 대배심(23명)은 행인들이 찍은 3개의 동영상을 검토했다. 도너번 검사는 대배심이 2개월에 걸쳐 “목격자 22명을 상대로 38번의 증인신문을 진행하고 현장과 병원의 치료 기록 등을 살폈다”고 밝혔다.

 

대배심이 판탈레오 경관을 기소하지 않기로 한 이유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뉴욕 타임스>는 지난달 21일 판탈레오의 주장이 대배심의 결정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판탈레오의 변호사는 “판탈레오가 경찰 학교에서 배운대로 행동했고, 가너를 해칠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되는대로 빨리 가너의 몸 위에서 내려오려 했다고 증언했다”고 말했다. 판탈레오는 가너가 고통을 호소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숨을 쉴 수 있다는 증거라고 봤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동영상 속에서 판탈레오는 가너가 제압당해 움질일 수 없는 상황이 된 뒤에도 몸 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목조르기’는 20여년 전 미국 경찰 행동규범에서 금지됐다.

 

대배심의 불기소 결정 뒤 가너의 어머니는 “대체 그들은 어떤 동영상을 본 것이냐”고 한탄했다. 그는 “이렇게 우리를 배신하는 데 어떻게 사법체계를 신뢰하란 말이냐”고 덧붙였다. 유족은 분노를 표출하면서도 시민들에게 평화적 시위를 주문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누구든 법 아래에서 공평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면 문제”라며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 게 내 임무”라고 말했다. 에릭 홀더 법무장관은 가너의 죽음에 대해 “비극”이라며 “연방정부 차원에서 독립적이고 철저하고도 공정한 수사를 신속하게 벌이겠다”고 밝혔다.

 

이번 결정에 분노한 시민들은 타임스스퀘어 등 뉴욕 도심을 누비며 “숨을 쉴 수 없다”고 외치면서 대배심의 결정을 납득할 수 없다고 항의했다. 한 남성은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동영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길 수 없다”고 했다. 수백명으로 시작된 이날 시위는 수천여명의 인파로 불어났지만 퍼거슨 사태 때와는 달리 평화롭게 진행됐다. 흑인 인권운동가 알 샤프턴 목사는 오는 13일 워싱턴에서 백인 경관에 의해 숨진 가너와 퍼거슨의 마이클 브라운, 클리브랜드의 타미르 라이스의 죽음에 항의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겠다고 예고했다.

 

김지은 기자 mirae@hani.co.kr

[낙태죄 논란]기독·천주교 "유아살해"..불교계 "현실도 감안"

김지은 입력 2017.12.02 

 

기독교 "수정 순간부터 생명 시작, 이를 파괴하는 살인행위'"

천주교 "태아는 母와 독립된 개별 인격…낙태는 유아 살해"

불교계는 아직 공식 입장 안 내…다른 주요 교계와 온도 차

"기본적으로 반대하나 다수 임신중절하는 현실 감안해야"

 

【서울=뉴시스】김지은 채윤태 기자 = 낙태죄 폐지 국민청원에 청와대가 실태조사를 통해 논의를 진행시키겠다고 답변한 가운데 각 종교계는 폐지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기독교와 천주교는 공식 입장 등을 통해 생명권 침해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강력하게 표명했다. 다만 불교 측은 기본적으로 반대한다면서도 현실적인 부분도 검토해야 한다는 모습을 보여 주요 교계 내에서도 온도 차가 나타나고 있다.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의는 입장문에서 "인간생명이라는 가치를 능가할 만한 더 중요한 가치가 아닌 한 수정 순간부터 시작되는 모든 인간 생명을 파괴하는 행동은 살인행위라는 점을 재차 천명한다"고 밝혔다.

 

이어 "그나마 형법상으로 남아 있는 초기 인간생명 보호 조항인 낙태죄 조항까지 폐기해 버린다면 초기의 미약한 아기의 생명은 한국에 있는 어떤 법률로도 보호받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라며 "'원치 않는 출산이 출산 당사자와 태어나는 아이 그리고 국가 모두에게 비극적인 일'이라는 생각은 매우 주관적이며 극히 위험한 반생명적 발상"이라고 주장했다.

 

 

또 "원치 않는 출산으로 태어난 아이들도 다른 정상적인 아이들과 다름없이 자라날 수 있게 하고 또한 미혼모들도 다른 기혼여성들과 다름없이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사회적, 제도적인 환경을 마련하기 위하여 힘써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천주교는 국내 3대 종교계 가운데 가장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번 주일미사부터 전국 성당에서 서명운동을 시작할 계획이다.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는 전국 교구장 주교에게 '낙태죄 폐지 반대 100만인 서명 운동 협조 요청' 공문을 보내 “12월 3일 대림 제1주일부터 한국 천주교회 전체 차원에서 서명 운동이 전개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당부했다. 또 낙태죄 위헌 여부 결정의 열쇠를 쥔 헌법재판소에도 반대 의견을 전달할 방침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는 위원장인 이용훈 주교 명의 입장문을 통해 "태아의 생명은 당연히 어머니의 생명과는 독립된 개별 인격이다. 태아도 생명권을 누릴 권리가 있다"라며 "태아를 고의로 낙태하는 것은 살인과도 같은 '유아 살해'이며, '흉악한 죄악'이 아닐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주체는 국가다. 국가가 온 힘을 다해 추구하고 실현시키고자 하는 공동선은 우선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무고하고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하는 약한 생명, 소외된 생명에 대한 관심과 보호 그리고 존중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지적했다.

 

 

【수원=뉴시스】최진석 기자 = 청와대 조국(오른쪽) 민정수석이 29일 오후 경기 수원시 장안구 천주교 수원교구를 찾아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위원장 이용훈 주교를 예방, 환담을 나누고 있다. 조 수석은 낙태죄 폐지 청원에 대한 청와대 입장을 밝히는 과정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는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고 발언, 낙태죄 폐지에 대한 천주교의 입장이 긍정적으로 변화한 것처럼 발표했다가 주교회의의 반발을 샀다. 2017.11.29.  myjs@newsis.com

 

불교계는 상대적으로 신중한 모습이다. 아직 공식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측은 "생명은 그 무엇보다 고귀한 것은 맞지만 이에 대해 종단 전체의 의견이 모아진 것은 없다"고 전했다.

 

대한불교조계종 관계자는 "불교는 기본적으로 낙태에 반대하고 생명 존중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면서 "다만 다수의 임신중절이 이뤄지는 현실을 감안해 임신중절의 한계를 최소화하자는 입장"이라고 전했다.

 

앞서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청원에 대한 청와대 입장을 밝히는 과정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언을 인용하다 천주교 측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천주교 생명윤리위는 지난달 27일 조 수석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언이라며 "우리는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고 인용, 가톨릭교회의 입장 변화를 시사한 데 대해 "한국 천주교회는 이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며 사실을 바로잡아 줄 것을 촉구한다"고 반발한 바 있다.

 

이에 조 수석은 천주교 수원교구를 방문해 이 주교에게 직접 사과하며 갈등을 수습했다.

 

whynot82@newsis.com

chaideseul@newsis.com

이·팔 분쟁의 뿌리는 역설투성이다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 선언 이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대립하고 있다. 기독교권의 박해를 받았던 유대인들이 함께 지내왔던 아랍과 이상하게 엮여 원수가 된 드문 사례다.

 

시사인 2018년 10월 24일 수요일 제579호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세계의 화약고라 불리는 중동을 대표하는 갈등은 무엇일까? 대부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이하 이·팔 분쟁)을 떠올릴 것이다. 1948년 5월 이스라엘의 건국 선언 이래 70년간 이·팔 분쟁은 국제정치의 핵심 주제였다.

 

이·팔 분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일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질서 재편 과정에 이스라엘 건국이 맞물리면서 문제가 불거진 것처럼 보인다. 좀 더 길게 잡으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분할해 재편한 유럽 열강의 개입을 기원으로 볼 수도 있다. 실제로는 더 오랜 역사가 뒤에 있다. 바로 유럽-지중해권에 널리 퍼져 있었던 반(反)유대주의, 그리고 이로 인해 촉발된 시온주의(Zionism)이다.

 

유대인들의 역사관은 독특하다. 자신들은 결코 멸절되지 않는다는 역사 인식이다. 고대 근동의 수많은 제국들이 명멸을 거듭할 때, 유대 민족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사라지지 않는 대신, 유일신 야훼의 뜻에 어긋날 때는 형벌을 받아 약속의 땅을 떠나야 했다고 믿었다. 이른바 ‘디아스포라’, 이산(離散)의 시기다. 흩어지되 소멸되지 않고 신이 부과한 형극의 기간이 지나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다는 회복론도 함께 믿는다. ‘알리야(aliyah)’, 귀환의 시기다.

 

 

 

5월4일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시위를 벌이자 이스라엘 군인들이 최루탄을 쏘고 있다.

 

디아스포라의 원형은 고대 이집트 비돔(Pithom)에서 파라오 통치하에 살아가던 히브리 공동체였다. 이집트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는 모세의 출애굽은 알리야의 원형이다. 유대 민족에게는 특정 공간, 야훼가 준비한 이스라엘 땅에 대한 남다른 애착의 서사가 있다. 약속의 땅, 즉 ‘에레츠 이스라엘(Eretz Ysrail, Land of Israel)’에 대한 갈망이다. 

 

마지막 이산은 로마제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AD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성전은 파괴되고 유대 민족은 흩어졌다. 이후 나름대로 유대 공동체를 유지하긴 했지만 회복과 귀환을 생각하기에는 삶이 바빴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고 물경 2000년 동안 디아스포라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오랜 기간 회당에 모여 ‘토라’를 읽으며 정체성을 유지한 것만으로도 경이롭다. 흩어진 유대인들은 주로 중동부 유럽과 북아프리카 및 아라비아 반도 등에 터를 잡고 살았다.

 

오랜 디아스포라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기독교계 유럽은 언어와 종교가 다른 유대인들을 불편하게 여겼다. 반유대주의의 출현을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4세기경으로 잡는 홀로코스트 역사학자 라울 힐버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힐버그는 정치적 격변기마다 일종의 희생양으로 유대인들이 이용된다고 본다.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을 다룬 3단계는 ‘개종-축출-박멸’이었다. 개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쫓아내고, 계속 걸리적거리면 마녀사냥 등의 방법으로 어떤 형태로든 없앴다는 것이다. 실제로 적지 않은 유대인이 개종하기도 했다. 유럽인의 정서에는 마태복음 27장 25절 이야기가 각인되었는지도 모른다. 예수의 무죄를 이야기하는 로마 총독에게 유대 군중은 이렇게 외친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

 

2017년 11월2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밸푸어 선언 100년을 맞아 영국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아래).

 

상황은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중세 이후 유대 가문들이 부를 축적하고 자본을 독점하면서 세간의 질시가 심해졌다. 봉건 영주와 결탁한 일부 유대 가문은 교회가 금기시하는 다양한 일들을 도맡았다. 특히 고리대금업으로 막대한 이윤을 챙겼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의 수전노 샤일록이 대표하는 유대인 이미지가 유럽 전역에 퍼져 있었다. 정치인들은 유대인에 대한 대중의 혐오를 통치의 도구로 사용했다. 정치적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사례가 빈발했다. 19세기 말부터 반유대 정서는 더욱 넓게 확산되었다. 1881년 제정 러시아 당시 유대인에 대한 약탈과 조직적 학살(포그롬)은 비극의 일단이다. 1894년 프랑스의 한 포병 장교가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과 내통한 간첩으로 몰렸던 드레퓌스 사건은 반향이 컸다.

 

드레퓌스 사건에 위기의식을 느낀 유대인들은 ‘약속의 땅’을 다시 꺼내들었다. 이제 알리야, 즉 귀환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오스트리아 출신 언론인 테오도어 헤르츨은 1896년 저작 <유대 국가>를 통해 나라를 세우자고 제안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대 국가 건설이 필요하다는 시온주의 사상과 목표가 담겼다. 헤르츨은 이듬해 1차 시오니스트 대회를 열었고, 국가 건설이라는 꿈을 현실의 주제로 올렸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디아스포라 내 초정통파 종교인 집단의 다수가 시오니즘에 비판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상식적으로는 예루살렘의 회복을 희구해온 종교인들이 가장 앞장서서 반길 듯한데 실상은 달랐다. 초정통파 랍비들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이 인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믿었다. 형극의 시간을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작위적으로 구원을 앞당기려는 시도를 일탈로 해석한 것이다. 이 시각으로 보면 헤르츨의 시오니즘과 유대 국가 수립 운동은 일종의 거짓 메시아 운동이었고, 자칫 이산의 시기를 더욱 길게 하는 행위일 뿐이었다.

 

결국 시오니즘의 동력은 유대교 정체성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속주의에 입각한 민족주의 또는 국가주의였다. 시오니즘의 초기 주창자들은 유대 정체성의 핵심인 ‘약속의 땅으로의 귀환’ 서사를 도구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종교 외피를 입은 세속주의자들의 기획이었다고나 할까? 시오니스트와 초정통파 종교인들 간의 이러한 인식 차는 오늘날까지 국가로서의 이스라엘 정체성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독일 나치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을 자행했다.

 

주류 종교인들의 반대에도 시오니스트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헤르츨은 먼저 오스만 제국과 독일에 유대 국가 건설을 타진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협상 상대를 영국으로 바꾸어 영국 식민지 중 몇몇 곳을 후보지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초기에 영국은 사이프러스와 시나이 반도 등을 제안했으나 틀어지고, 이후 우간다 안과 아르헨티나 안도 성사되지 못했다. 결국 1905년 7차 시오니스트 대회는 귀환(알리야) 서사를 완성시킬 곳은 팔레스타인임을 확인하고 이곳에서 건국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1차 대전 시기, 전쟁 비용이 급했던 영국은 유대인의 대자본이 절실했다. 시오니스트들은 이를 건국의 기회로 삼았다. 로드차일드 등 유대인 명망 가문이 대영 외교에 나섰다. 마침내 팔레스타인을 유대인의 고향으로 인정하고 재건을 지원하겠다는 영국의 방침이 발표되었다. 1917년 11월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의 선언이다. 선언 직후 영국은 오스만튀르크 군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유대 국가 건설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긴장했다. 비록 밸푸어 선언에 선주민의 시민권과 종교적 자유가 명시되어 있었지만 영국이 시오니스트 국가를 세워주려 한다는 우려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시온주의 등장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가 태동하게 된다.

 

위임통치를 하던 영국은 골머리를 앓았다. 유대인 이주가 늘어날수록 팔레스타인 측의 불만과 시위는 거세졌다. 두 민족의 공존을 성사시켜보려던 영국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좌고우면하던 영국의 행태는 팔레스타인과 유대 양측을 모두 자극했다. 시위는 격화되고 영국은 속수무책이었다. 2차 대전 이후 1947년 영국은 결국 위임통치 권한을 포기했다. 시오니스트들의 의견이 많이 반영된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할안은 아랍의 반대로 거부되었다. 결국 시오니스트들은 1948년 5월15일 이스라엘 독립을 전격 선포하고 건국의 꿈을 실현했다. 동시에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날은 대대로 살아오던 땅을 이주자들에게 빼앗긴 대재앙의 날(al Nakbah)이 된다.

 

유대인 디아스포라 보호했던 아랍 사회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반유대주의는 원래 기독교계 유럽에서 기승을 부렸다. 반면 아랍 이슬람권에서 반유대주의 정서는 크게 불거지지 않았다. 15세기 기독교 세력은 이베리아 반도를 평정하며 무슬림을 완전히 몰아냈다. 이때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도 함께 축출했다. 쫓겨난 유대인이 주로 흘러들어간 곳이 북아프리카 아랍 사회였다. 이곳에서 아랍인과 유대인은 함께 지내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2차 대전 당시 프랑스 비시 괴뢰정부가 북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을 압박해 유대인 축출을 요구했을 때에도 아랍 사회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보호하고 나섰다. 파시스트들의 유대교 탄압에 함께 저항하면서 희생을 감수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불과 수년 안에 상황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반유대주의를 피해 자유를 찾고자 했던 시온주의자들이 이스라엘을 건국하자 유대인과 아랍인이 원수가 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고토 회복을 주장했지만, 아랍 팔레스타인에게는 이스라엘이 무도한 침략자였다. 유대인의 귀환은 기독교권의 멸시와 박해로 인해 시작된 것인데 정작 갈등은 이슬람권과 빚고 있다.

 

통곡의 벽에 서서 몸을 흔들며 황금의 돔 사원과 알아크사 사원이 있는 성전 산(하람 알샤리프)을 회복시켜달라고 기도하는 유대 종교인들을 보면, 영락없는 유대교와 이슬람의 갈등이다. 그러나 이 갈등 뒤에 있는 더 오랜 분쟁의 씨앗은 바로 천년 넘게 지속된 기독교권의 반유대주의였다. 홀로코스트는 루터의 후예들이 저지른 일이며, 포그롬은 정통을 자처하는 정교의 후예들이 저지른 짓이다. 심지어 밸푸어가 반유대주의자였다는 주장도 있다. 밸푸어 선언 당시 영국 정부의 저의는 유대인 보호가 아니었다는 사료들이 나오고 있다. 옥스퍼드 대학의 아비 슐라임 교수는 밸푸어가 작곡가 바그너의 부인 코지마와 나눈 대화에서 “유대 국가를 빨리 세워줘야 유럽 내 유대인들이 다 한곳으로 모여 골칫거리를 해결할 수 있다”라는 발언을 했다고 주장한다.

 

기원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팔 분쟁은 당사자 간 역사적 구원(舊怨)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기독교권의 멸시와 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찾아온 이들이 그간 큰 어려움 없이 지내왔던 아랍과 이상하게 엮여 원수가 되어버린 드문 사례다. 현재에만 시선을 두면 역사의 궤적을 놓치기 쉽다. 면밀히 과거를 읽어내지 못하면 현 상황에 포박된다. 마치 지금의 갈등관계가 과거로부터 유구한 것이며, 또 미래에도 영원할 것이라고 믿어버리는 오류가 발생한다. 이 오류는 상황을 고착화하고, 결국 어떤 형태로든 평화를 구축할 수 있다고 믿는 의지를 반감시킨다. 이·팔 문제의 또 다른 ‘문제’는 현재 상황이 역사적 맥락과 배경을 압도한다는 데 있다. 어쩌면 꽉 막힌 이·팔 분쟁의 해법은 상상력을 발휘해 역사적 맥락을 재현하고 추적하는 과정에서 선물처럼 주어질지도 모른다. 우리 시대의 이·팔 갈등을 본격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먼 역사적 기원부터 살펴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래는 초(超)국가 기구로 통일”

10년전 미래학자의 예언(3) 제롬 글렌

 
 

[편집자 註]

2007년에 발행된, 세계의 대표적인 미래학자들이 전망한 미래 서적 한 권이 있다. 그들이 예고한 '미래혁명'(신지은 외 4인 지음/ 미래를 준비하는 글들 펴냄, 2007)은 어떠했으며 10년이 지난 지금 어디까지 진행되었을까. 마지막 회로 제롬 글렌 유엔미래포럼 회장의 예측을 따라가 본다.

 

“교육은 게임처럼 진행된다. 일과 레저, 공부의 경계가 점차 사라질 것이다. 가상현실에 접속해 게임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배우고 과학 실험을 한다. 인공지능(AI)은 인간의 주치의이자 비서이자 교사이자 친구가 된다.”

 

미국의 대표적인 미래학자로 꼽히는 제롬 글렌(Jerome C. Glenn) 유엔 미래포럼 회장의 10년 전 예언은 지금 대부분 현실화 되고 있다. 그는 10년 전 지구촌이 하나로 연결되는 ‘인터넷 혁명’ 부터 지금의 ‘인공지능 혁명’까지 정확히 짚어냈다.

 

 

제롬 글렌 유엔미래포럼 회장은 과거 인터넷 혁명을 주장했다. 그는 이제 앞으로의 미래는 가상현실의 세계로 접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 worldff.pofler.com/wff/07_spnotice

 

24시간 인간의 일상을 관리해주는 사이버 나우

 

“인공지능은 계속 우리의 건강상태를 체크해 줄 것이다. 오늘은 혈압이 높으니 아침 운동은 생략하라는 식으로 조언을 해줄 수도 있다. 옷에 더러운 얼룩이 묻으면 세탁을 하라고 권하기도 한다. 집안의 모든 물건들이 서로 통신을 하며 습도와 온도를 적정하게 조절하고 가전 제품 등을  집과 밖에서도 수월하게 제어할 수 있게 된다.”

 

제롬 글랜 회장의 예언은 20년 후를 가르켰다. 하지만 불과 그의 예측은 10년 후 인 지금, 2017년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되고 있다.

 

헬스케어 제품으로 수면상태와 건강상태, 운동 상태를 체크하고 예방할 수 있다. 사물인터넷을 통해 집 안 및 기업의 보안, 습도, 온도 조절 등이 가능해진다. 음악을 선곡해주고 꽃집에서 꽃배달을 시켜주는 인공지능 비서가 이미 등장했다. 단순히 비서 기능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제 인공지능 프로그램은 TV, 세탁기, 노트북, 자동차에 들어가 인간의 편의를 도울 전망이다.

 

아마존이 개발한 인공지능 비서 ‘알렉사’가 영역을 확대했다. 지난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 2017)에서 아마존은 레노버, 월풀, LG전자 등 다양한 전자회사와 협업한 알렉사 제품들을 선보였다. ⓒFlickr.com

 

그는 앞으로 10년 뒤 2030년이 되면 인간의 모든 활동은 ’사이버 나우’라는 장치를 통해서 이루어 진다고 전망했다. 그가 말하는 ‘사이버 나우’란 지금의 인터넷과 같이 초연결 된 공간을 이어주는 장치를 의미한다. 물론 이 이름은 나중에 다르게 불려질 수도 있겠다. 접속하는 방법은 지금과 같은 컴퓨터나 모바일 접속이 아니다. 인체 삽입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제롬 글랜 회장은 접속하는 장치를 피부에 이식하거나 안경 혹은 콘텍트렌즈와 같은 형태가 될 것으로 보았다.

 

24시간 연결되는 인터넷 공간이 있고 아침에 눈을 떠 밤에 잠을 잘 때까지 계속 그 안에 있는 인공지능과 접촉하게 된다. 이 가상현실 프로그램은 전 세계 정부와 대학 및 비정부단체, 기업들이 참가하는 ‘초(超)국가 기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제롬 글랜 회장은 ‘사이버 나우’라는 접속 장치가 교육, 문화, 의료, 레저는 물론 정치와 국가라는 개념까지도 변화시킬 것이라고 내다봤다.

 

블랙미러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가상공간에 접속해 있는 상황을 그린 영국드라마 ‘블랙미러’의 에피소드 중 한 장면. 이러한 상상은 미래에 현실이 될 수도 있다. ⓒ www.channel4.com

 

아프리카에서 오세아니아, 유럽 및 아시아, 남미 대륙이 이 프로그램으로 이어진다. 그 어떤 나라에 있던지 동일한 혜택을 받게 된다. 글렌 회장은 지구촌 전체의 부가 향상될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은 원격으로 게임처럼 진행되고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최신 기술을 학생들은 습득하게 된다. 학교는 왕실과 같이 상징적인 존재가 될 가능성도 높다. 그는 미래 교육의 핵심으로 실시간 피드백이 가능한 교육과 각자 학생들에게 맞는 맞춤형 교육을 꼽았다.

 

집단 지성이 미래 경쟁력의 핵심이 될 것

 

글렌 회장은 앞으로 미래가 가장 중요한 변화를 일으키는 요소가 바로 인간들의 ‘집단 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이라고 봤다. 방대한 정보의 바다 속에서 의미있는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한 명의 천재나 하나의 국가가 전부 해결할 수 없다. 결국 인간들의 모여 집단으로 정보를 교환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사회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

 

그에 따르면 지금 볼 수 있는 위키피디아 등의 온라인 백과사전이나 국내 포털에서 제공하는 지식 검색 서비는 ‘집단의 지혜’(Collective Wisdom of Crowds)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위키피디아가 하드웨어라면 그가 말하는 집단지성은 소프트웨어 이다. 글렌 회장은 집단 지성을 얼마나 빨리 이룰 수 있느냐가 미래의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역사학자이자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 교수 또한 제롬 글렌 회장과 같이 인류의 산적한 문제들은 글로벌 유니온에 의지해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과거 제국주의 시대를 벗어나 많은 독립국가들이 생겼으나 지구촌 나라들이 초연결화 되면서 한 나라의 문제가 유기적으로 다른 나라에 영향을 미치고 결국에는 한 국가 혹은 개인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초국가 개념의 ‘유니온’이 각 국가들의 정부를 대신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전세계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제롬 글렌 회장은 최근에도 한국에 방한해 그의 예측을 설파했다. 그는 세계의 기후 변화와 자원의 고갈 문제, 테러 등  각종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싱크탱크인 밀레니엄 프로젝트(Millennium Project)를 이끌며 인류의 도전 과제들을 풀어나가는 데 주력하고 있다.

 

미래학은 미래를 점치는 점술(占術)이 아니다. 10년 전 미래학자들의 주장이 전부 다 맞는 것은 아니다. 물론 앞으로 10년 뒤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닥칠 문제점을 미리 예견하고 이를 대비해야 한다는 점에서 미래학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어 볼 필요가 있다. 미래에 대한 지식을 면밀히 고찰하고 연구하고 공론화하여 한국이 세계 속 미래를 이끌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https://www.sciencetimes.co.kr/?p=160198&cat=30&post_type=news

 

“이젠 물러나시죠” 시진핑 권퇴서(勸退書) 나붙어

 

최창근 객원기자 

 

신동아 2020-02-23 

 

우한의 기침, 習황제 독재에 大균열

●폭로자 리원량의 죽음, 중국 인민 분노 일으켜

●시진핑은 天命 잃었다

●망자 추모가 ******점 된 톈안먼 사태

●시진핑 독재에 대한 누적된 불만 터져 나와

 

 

 

 

2월 10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방역 마스크를 쓴 채 수도 베이징의 한 주민센터를 방문해 주민들로부터 생필품 공급 및 방역 상황 등을 듣고 있다. [신화 뉴시스]

 

“‘그’가 사라졌다. 목소리가 들릴 뿐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일로인 상황에서 행적이 베일에 싸인 중국 지도자를 두고 세계 언론은 이같이 평했다. 그는 “바이러스는 악마다. 우리는 악마를 숨길 수 없다. 중국은 악마와의 싸움에서 이길 자신이 있다”고 목소리만 높였을 뿐 ‘싸움터’인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시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2인자’만 보냈을 뿐이다.

 

그는 자신에게 쏠린 책임을 전가하려고도 했다. 대만 24시간 뉴스채널 TVBS는 중국 소식통을 인용해 그가 왕샤오둥(王曉東) 후베이성 성장, 장차오량(蔣超良) 후베이성 중국공산당 서기, 저우셴왕(周先旺) 우한시장, 마궈창(馬國强) 우한시 중국공산당 서기 등 이른바 ‘후베이 F4’를 문책할 것임을 시사했다.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 행태다.

 

 

중국 네티즌의 비난은 ‘후베이 F4’ 중 저우셴왕 시장에게 쏟아지고 있다. ‘그’는 ‘시(習)황제’로 불리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2인자’는 리커창(李克强) 국무원 총리다.

 

안팎에서 비난 여론이 일자 시진핑은 2월 11일 베이징의 병원을 처음으로 방문해 진료 상황을 점검했으며 코로나19 발원지 우한의 중증환자 전문병원을 화상으로 연결해 의료진을 격려했다.

 

우한발(發) 코로나19가 중국을 넘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이 바이러스는 인체(人體)를 넘어 체제(體制)에도 구멍을 내고 있다. 1월 6일 LA타임스는 “우한 폐렴이 부패하고 비효율적이며 투명성·책임성이 결여된 중국 정치체제의 허점을 여실히 드러냈다”고 보도하면서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진 코로나19로 인해 시진핑이 선호하는 통치술인 통제 수단, 선전, 민족주의도 상처를 입었다”고 지적했다.

 

“시진핑은 신뢰를 상실했다”

 

오빌 쉘 미국 아시아소사이어티 미중관계센터 소장의 평가는 더욱 가혹하다. 쉘 소장은 “시진핑은 천명(天命)을 잃었다. 코로나19가 촉발한 위기는 중국인들에게 수치화할 수 없는 심리적 위기이며, 시진핑은 ‘인민을 보호하는 통치자’로서 신뢰를 상실했다”고 분석했다.

 

시진핑·리커창 등 중국 지도부에 코로나19는 17년 전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2003년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창궐했다. 2002년 11월 16일, 중국 광둥(廣東)성 포산(佛山)시에서 원인 미상의 호흡기 감염 환자가 최초로 보고됐다. 정체불명의 병에 대해 당국은 무관심했다. 정치 일정이 우선이었다.

 

11월 15일 제16차 중국공산당 당대회가 폐막했다. 당대회에서 3세대 지도자 장쩌민(江澤民)·주룽지(朱鎔基)가 퇴진하고 4세대 후진타오(胡錦濤)·원자바오(溫家寶) 체제가 확정됐다. 이듬해 3월 가장 큰 정치 이벤트인 양회(兩會·전국인민대표대회,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개최가 예정돼 있었다. 이 같은 정치 일정 속에서 훗날 ‘사스’라고 일컬어지는 신종 바이러스가 방치됐다.

 

최초 환자 발생 후 두 달여가 지난 2003년 1월 27일 광둥성 위생건강위원회가 첫 보고서를 작성했다. 사스는 그해 2월 광둥성과 인접한 홍콩으로 확산했다. 3월에는 수도 베이징(北京)에 바이러스가 상륙했다. 사스에 대해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하던 중국 위생 당국도 사태를 더는 방관할 수 없었다. 중국은 세계보건기구(WHO)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WHO의 지원을 받으려면 자료를 제출해야 했다. 제한적이나마 실태를 공개했으나 중국인들이 즐겨 쓰는 대사화소소화료(大事化小小事化了·큰일은 작게 작은 일은 없게 하라)’라는 말처럼 축소·은폐가 이뤄졌다. 장쩌민의 주치의 출신 장원캉(張文康) 국무원 위생부장은 “베이징에 12명의 환자가 있을 뿐이며, 상황은 통제가 가능하다”고 호도했다.

 

은폐·기만이 이뤄지는 와중에 내부고발자가 등장했다. 인민해방군 퇴역 군의관 장옌융(蔣彦永)이 “베이징 중국인민해방군총병원(301병원·국군수도통합병원과 비슷하다)을 비롯해 3곳의 병원에만 120명 넘는 사스 환자가 입원해 있다”고 폭로한 것이다. CCTV 등 중국 관영매체는 장옌융의 폭로를 외면했지만 외신은 긴급 뉴스로 보도했다. WHO를 비롯한 국제기구와 세계 각국이 중국에 ‘진실’을 요구했다. 장옌융은 폭로 후 공안 당국에 45일간 구금됐다. 8개월의 가택연금도 이어졌다.

 

17년 전의 악몽

 

2003년 3월 15일, 국가주석에 오른 후진타오는 당면 과제인 사스 해결에 나섰다. 첫 조치는 ‘희생양’ 찾기였다. 사태 책임을 물어 장원캉 국무원 위생부장, 멍쉐눙(孟學農) 베이징시장을 사임케 했다. ‘투명한 정보 공개’도 천명했다. 베이징 시민 340명을 포함해 중국 전역에서 1800명의 감염자가 존재한다고 숫자를 정정해 발표했다.

 

이후 중국 전역에서 대대적인 방역, 감염자 격리·치료 조치가 이어졌다. 사스 관련 정보를 은폐하거나 대응에 소극적인 당(黨)·정(政) 관료들에는 철퇴가 내려졌다. 각급 당·행정단위 책임자 징계·경질·출당 조치가 이어졌다. 사스는 2003년 7월 31일까지 중국에서 감염자 5328명, 사망자 349명, 치사율 6.6%를 기록하고 진정됐다.

 

‘현재진행형’인 코로나19의 발단→전개→전망은 17년 전 사스 사태 때와 놀라울 만큼 닮았다.

 

 

정치 일정 탓 축소·은폐

 

 

2월 7일 마스크를 쓴 홍콩 남성이 이날 세상을 뜬 중국 안과의사 리원량(작은 사진) 씨의 사진 아래 국화를 헌화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해 12월 30일 우한시중심병원 의사로 근무하던 리원량(李文亮)은 사스바이러스에 고(高)양성 반응을 보이는 환자 보고서를 입수했다. 리원량은 우한대 의대 동급생 위챗(모바일 메신저) 그룹에 “우한시 화난(華南)수산물도매시장에서 7건의 사스 확진 환자가 있다”고 올렸다. 보고서와 환자 CT 촬영지도 첨부했다. 그의 글은 실명 공개된 채 인터넷 공간에서 확산했다. 2020년 1월 3일 우한시 공안국은 ‘인터넷에 부정적 발언을 게시했다’는 명목으로 그를 소환했다. 리원량은 반성의 의미를 담은 자술서를 쓰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리원량은 1월 8일 환자 진료 중 코로나19에 감염됐고 격리 치료 중이던 2월 7일 세상을 떠났다.

 

1월 12일 후베이성에서는 성급(省級) 양회(兩會)가 예정돼 있었다. 후베이성 각급 당·행정기관이 지난 1년 성과를 결산하는 정치 행사다. 후베이성 당국으로서는 ‘제2의 사스’로 1년 성과 결산을 망칠 수 없었다. 최대한 은폐하는 동시에 중앙으로의 보고를 늦췄다. 마궈창 후베이성 당위원회 서기는 1월 31일 “조금 일찍 통제 조치를 취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책 중”이라고 밝혔다. 사후약방문, 만시지탄이었다.

 

중국 정부는 1월 23일 오전 10시를 기해 ‘우한 봉쇄령’을 발령했다. 때늦은 조처였다. 우한은 인구 1100만 명의 대도시, 남북으로 징광(京廣·베이징과 광저우) 고속철도, 동서로 후한룽(?漢蓉·상하이와 청두) 고속철도가 교차하는 교통 요지다. 시기적으로는 중화권 최대 명절인 춘절(春節) 연휴를 앞두고 있었다. 전염병이 확산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것이다. 중국 당국의 은폐, 소극적인 대응 속에서 코로나19는 일파만파 확산됐고, 중국 정부는 바이러스에 대한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다.

 

 

“시진핑 폭정하에 정치체제가 붕괴했다”

 

 

2020년 1월 1일 홍콩 시민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홍콩 사태도 시진핑의 지도력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뉴시스]

 

사스 사태 때와 비교하면 중국의 위생·보건 수준은 진일보했다.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전염병 예방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 같은 시스템이 우한에서 작동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중국공산당중앙당교 교지 학습시보(學習時報) 부편집장을 지낸 정치평론가 덩위원(鄧聿文)은 ‘모든 문제를 정치화해 해석하는 범(汎)정치화 문제’를 지적한다. 그는 “중국 당국이 문제를 다룰 때는 반드시 정치적 영향력을 고려하며, 문제 자체에 주안점을 두기보다는 정치적 관점에서 해석한다. 관료들도 자신의 정치적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상부의 허가 없이는 행동하지 않는 관료주의도 문제를 키운다”고 평가했다.

 

이 같은 중국식 거버넌스의 한계 속에서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고 있으며 인민들의 분노도 발화점을 넘으려 한다. 시진핑은 뒤로 숨었다. 시진핑은 춘절 당일인 1월 25일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주재하면서 ‘중앙 코로나19 감염 폐렴대응 업무 영도소조(領導小組·태스크포스팀)’ 소장으로 리커창 총리를 임명했다. 발병지 우한시를 방문한 것도 리커창이었다. 전통적으로 내치(內治), 그중 경제 문제는 총리가 전담해 온 전통을 깨고 최고 경제정책 집행기구인 중앙재경영도소조(中央財經領導小組)의 조장을 맡을 정도로 만기친람(萬機親覽)해 온 시진핑으로서는 예외적인 일이다. ‘책임회피’라는 해석이 붙을 수밖에 없다.

 

빅터 시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는 “시진핑이 코로나19를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면 직접 직책을 맡아 영광을 차지하려 했을 것”이라면서 “정치적으로 위험한 사안이기 때문에 리커창에게 떠넘긴 것”이라고 분석했다.

 

 

지식인들 분노 표출 이어져

 

이런 가운데 시진핑 체제를 향한 중국 지식인들의 분노 표출이 이어지고 있다. 쉬장룬(許章潤) 칭화(清華)대 법대 교수는 ‘분노하는 인민은 더는 두렵지 않다’는 제목의 글에서 “시진핑의 폭정하에 정치체제는 붕괴됐다. 30년 넘는 시간 동안 구축돼 온 관료 통치체제도 난맥에 빠졌다. 코로나19와 관련된 공적 논의 여지는 모두 차단당했다. 사회의 근본 경보 시스템도 함께 무력화됐다”고 주장했다.

 

인권 변호사 쉬즈융(許志永)은 2월 4일 ‘공민자유운동’ 웹사이트에 시진핑 권퇴서(勸退書·퇴진을 권하는 글)를 게시했다. 쉬즈융은 “시진핑 당신이 악인(惡人)은 아니지만 국가지도자가 될 만큼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번에는 물러나시죠”라고 일갈했다.

 

중국 역대 왕조의 멸망 원인은 외적(外敵) 침입, 환관(宦官) 발호와 더불어 농민반란이다. 245명의 천자(天子) 중 명군주로 꼽히는 당 태종(太宗)의 언행을 기록한 ‘정관정요(貞觀政要)’는 “군주는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다”고 했다. 원조 ‘시황제(始皇帝·진시황)’를 파멸로 몬 것도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난이었다.

 

코로나19의 위험을 최초로 경고한 의사 리원량의 죽음이 ‘시(習)황제 독재체제’에 대한 누적된 불만에 불을 지폈다. 주목할 대목은 망자(亡者) 추모를 명분으로 권력에 항의한 현대 중국의 전통이다. 1976년 4월 5일 청명절(淸明節)에는 그해 1월 타계한 저우언라이(朱恩來·1898~1976) 총리 추도를 명분으로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모여든 민중이 장칭(江青)·왕훙원(王洪文)·장춘차오(張春橋)·야오원위안(姚文元) 등 문화대혁명 4인방 타도를 외쳤다. 1989년 4월 같은 장소에서 치러진 후야오방(胡耀邦·1915~1989) 중국공산당 총서기 장례식은 톈안먼 사건의 ******점이 됐다. 우한은 청(淸)조를 타도한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의 도화선이 된 우창봉기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친첸훙(秦前紅) 우한대 교수는 “리원량의 죽음 이후 중국인들은 슬픔과 분노라는 동일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 후야오방 전 공산당 총서기가 죽었을 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환기했다.

 

‘시황제’는 2020년 ‘베이징의 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최창근 객원기자 caesare21@hanmail.net

 

[이 기사는 신동아 2020년 3월호에 실렸습니다]

암 투병 중인 이어령 “죽음이 목전에 와도 글 쓰겠다”

 

[아무튼, 주말] 병상 낙서를 詩로… 코로나 이길 특효약… 영정사진을 찍다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입력 2021.01.02 03:00

 

#암 투병 중인 노(老)학자가 마루에 쪼그려 앉아 발톱을 깎다가 눈물 한 방울을 툭, 떨어뜨렸다. 멍들고 이지러져 사라지다시피 한 새끼발톱, 그 가여운 발가락을 보고 있자니 회한이 밀려왔다. “이 무겁고 미련한 몸뚱이를 짊어지고 80년을 달려오느라 니가 얼마나 힘들었느냐. 나는 왜 이제야 너의 존재를 발견한 것이냐.”

 

#햇볕 내리쬐던 가을날, 노인은 집 뜨락에 날아든 참새를 보았다. 어릴 적 동네 개구쟁이들과 쇠꼬챙이로 꿰어 구워 먹던 참새였다. 이 작은 생명을, 한 폭의 ‘날아다니는 수묵화’와도 같은 저 어여쁜 새를 뜨거운 불에 구워 먹었다니···. 종종걸음 치는 새를 눈길로 좇던 노인은 종이에 연필로 참새를 그렸다. 그리고 썼다. ‘시든 잔디밭, 날아든 참새를 보고, 눈물 한방울.’

 

 

 

마지막 수술을 하고 병상에 누웠을 때 이어령은 작은 스케치북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참새 한 마리를 보고, 발톱을 깎다가, 코 푼 휴지를 쓰레기통에 던지다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진 소회를 짧은 글로 적고 간혹 그림도 그렸다. 췌장암 투병 중 올해 미수를 맞은 이어령은 "어떤 고통이 와도 글을 쓰고 싶다. 그 의지가 나를 살게 할 것"이라고 했다. /장련성 기자

 

◇ “죽음이 목전에 와도 글을 쓰겠다”

암 투병 중인 이어령(88) 선생을 만난 건 지난 10월 말이다. 몰라보게 수척해 있었다. 체중이 50㎏대로 내려왔다고 했다.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집필에 몰두해온 그는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최근 분신과 다름없던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의 문을 닫았다.

 

멀리 북한산을 바라보던 선생이 “심심할 때마다 병상에서 끄적였다”는 낙서장을 가져왔다. 시 같고 짧은 산문 같은 글들이 거기 있었다. 일기 쓰듯 매일 낙서를 하다 ‘눈물 한 방울’이라는 다섯 글자를 떠올렸다고 했다. “늙으니 춤을 출 수 있나, 남을 대신해 노동을 할 수 있나. 늙고 병든 내가 오늘 하루를 살아냈기에 할 수 있는 것이, 회한의 눈물 담긴 시(詩) 한 줄뿐이더군요.”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라는 시집을 펴낸 바 있는 이어령이 새해 시제(詩題)로 삼은 ‘눈물 한 방울’은 병상 위에서 사위어가는 한 노인의 푸념, 넋두리가 아니다. ‘디지로그’ ‘생명자본’ 등 혼돈의 시대에 새로운 어젠다를 제시해온 이 석학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온 인류가 절망과 공포에 휩싸여 있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화두가 ‘눈물 한 방울’이라고 했다.

 

“우리는 피 흘린 혁명도 경험해봤고, 땀 흘려 경제도 부흥해봤어요. 딱 하나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눈물, 즉 박애(fraternity)예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는 타인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 인간의 따스한 체온이 담긴 눈물. 인류는 이미 피의 논리, 땀의 논리를 가지고는 생존해갈 수 없는 시대를 맞이했어요. 대한민국만 해도 적폐 청산으로, 전염병으로, 남북 문제로 나라가 엉망이 됐지만 독재를 이기는 건 주먹이 아니라 보자기였듯이 우리에겐 어느 때보다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절실합니다.”

 

 

이어령 선생이 서울 종로구 영인문학관에서 인터뷰하는 모습. 지난해 10월부터 두 달간 선생을 4차례 만나 대화를 나눴다. /장련성 기자

 

프랑스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는 “코로나 팬데믹을 부른 것이 이기적 생존 경제라면 이제 인류는 이타적 생명 경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이어령은 그보다 10년을 앞서 ‘생명이 자본이다’ ‘정보화 다음은 생명화 시대’라고 선언했다.

 

“나는 눈물 없는 자유와 평등이 인류의 문명을 초토화시켰다고 봐요. 우리는 자유를 외치지만 코로나19는 인간이 한낱 짐승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줬지요.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릴 보고 비웃어요. ‘너희들은 짐승이야. 까불지마. 나만도 못해. 난 반생명 반물질인데도 너희들이 나한테 지잖아? 인간의 위대한 문명이 한낱 미물에 의해 티끌처럼 사라지잖아?’ 하고 말이죠.”

 

이어령은 오늘의 재앙을 끝내는 길, 몸과 더불어 영혼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인간만이 흘릴 수 있는 눈물 한 방울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얼마나 눈물을 갈구하는지는 최근의 트로트 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고 했다. “제레미 다이아몬드나 유발 하라리 같은 지식인들이 외치는 백마디 말이 트로트 한 곡이 주는 위로를 당하지 못해요. 무대 위 가수의 노래를 듣고 우는 객석의 청중을 보고 시청자들이 다시 울지요. ‘아직 사람 사는 세상이구나’ ‘막간 세상이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에···. 분노와 증오, 저주의 말이 넘쳐나는 시대, 누군가는 바보 소리를 들을지라도 날카롭게 찔리고 베인 상처를 어루만져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어령의 ‘눈물족자’를 그림으로 그려보겠다고 한 건 화가 김병종(67.서울대 명예교수)이다. 6년 전 ‘생명 그리고 동행’이란 제목의 시화전을 이어령과 함께한 그는 “선생이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기게 될 흔적을 예술로 승화해보고 싶다”고 했다. ‘아무튼, 주말’ 연재를 제안하자 이어령이 빙그레 웃었다. “내일이 없는 사람과 연재를요?” 다만, 죽음이 목전에 오더라도 펜을 놓지 않겠다고 했다. “글을 쓸 수 있다면, 성경의 욥처럼 죽는 날까지 반석 위에 이 고통을 새길 수 있어요. 그 의지가 내겐 혈청제예요.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요.” 세밑이던 29일, 그는 영정사진을 찍었다.

 

◇ 이어령은 누구?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문학평론가이자 언론인으로, 시인이자 문화부 장관으로 종횡무진 활약한 한국 지성의 큰 산맥이다. 스물두 살에 문단 원로들의 권위의식을 질타한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며 등단, 서정주 등 문학계 거물들과 논쟁하며 저항문학을 탄생시킨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 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지성에서 영성으로’ ‘생명이 자본이다’ 등 숱한 명저들을 통해 급변하는 시대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88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굴렁쇠 소년’을 연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트럼프 이후는 '혼돈'.. 한인사회에 보내는 특별 당부

오마이뉴스 2021.01.16

[주장] 미국사회가 회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조지아주를 보라

 

 
▲ '내란선동 혐의'로 트럼프 탄핵소추안 발의한 미 하원 미국 민주당 하원의원들이 11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공식 발의한 가운데 워싱턴DC 연방의회 의사당에 '의회 난입 폭동'으로 순직한 경찰관을 추모하는 조기가 내걸려 있다. 민주당이 이날 발의한 탄핵소추안에는 의회 난입 사태에 따른 트럼프 대통령의 내란선동 혐의가 탄핵 근거로 적시돼 있다.
ⓒ 워싱턴 로이터=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의 탄핵 소추 결의안이 지난 13일(현지시각) 미 하원에서 "내란 선동 혐의"로 민주당 의원 전원 그리고 10명의 공화당 의원들이 가세, 232-197로 통과됐다. 이는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검찰 역할이 부여된 하원이 범죄혐의를 확정한 기소에 해당한다. 최종 탄핵 재판의 결과는 배심원단(Jury) 역할이 주어진 상원 2/3에 달려 있다.

<뉴욕타임즈>는 이번 하원의 탄핵가결을 "가장 초당적 탄핵"이라고 평가했다. 탄핵 투표과정에서 역사상 처음 가장 많은 10명의 반대파가 찬성표를 던진 데 의미를 크게 뒀다. 백악관 인턴 루인스키와 벌인 클린턴 대통령의 애정행각 사건,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 때도, 1960년 엔드루 존슨 대통령 탄핵 때도, 모두 자파 대통령의 문제를 비호했던 정략적 행태와 비교한 것이다. 닉슨 탄핵 때는 비교적 훌륭한 평가를 받았던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이나 조지 W. 부시 대통령조차도 자파 닉슨을 옹호했던 사실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그동안 트럼프 탄핵에 대한 미국의 정치·언론계의 대체적인 여론은 '무리수'라는 것이었다. 정략적 투표가 뻔한 일을 가지고 부작용만 생길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왜 민주당은 이를 밀어붙인 것인가? 최종 목표는 트럼프의 차기 2024대선 출마자격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에 대한 법률적 분석을 내놨다. 이는 1월 20일 이후 상원을 장악한 민주당이 적절한 타임을 이용해 하원의 탄핵결의안을 상원에 내놓게 될 경우를 상정한 것이다. 상원에서 유죄가 확정되면, 이어진 투표로 대통령직 퇴임 이후의 연금 및 기타 다양한 혜택을 비롯한 공직 출마 자격 문제에 대한 투표가 가능하다. 이 경우는 상원 단순 과반만으로도 트럼프의 공직 출마자격을 박탈할 수 있다.

<뉴욕타임즈>는 "이러한 조치는 민주당뿐만 아니라, 대권을 염두에 두고, 트럼프를 당에서 몰아낼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하는 많은 공화당원들에게도 호소력이 있다"면서 특히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미치 맥코널 의원이 이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고 전한다.

<워싱턴포스트>는 또한 남북전쟁 후 제정된 미헌법수정조항14조(3항)을 예로 들어 트럼프의 차기 공직 출마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 조항은 국가에 대한 반란, 폭동에 참여했거나 지지·후원한 자는 차기 공직을 금한다고 돼 있다. 이 조항은 트럼프를 공직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탄핵 결정에 필요한 2/3 다수 의결이 필요 없다고 본다.

지난 선거로 상·하원을 장악하게 된 민주당은 이번 탄핵 발의를 시작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차기 트럼프 대선 출마를 막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트럼프 시대가 끝나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지금부터가 미국 정치의 혼란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알 수 없다. CNN은 국가안보 소식통을 인용 트럼프 지지자들이 이념으로 뭉쳐, 더 큰 무장공격을 벌일 수도 있다는 보도를 내놨다.

현재의 공화당의 모습은 똥 싸고 뭉개는 것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 꼴이다. 워싱턴D.C. 의회 난동사태 이후 대내외적으로 대망신을 산 데 이어, 조금만 잘못하면 트럼프 극렬 지지자들의 무지한 극성 때문에 망가질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공화당의 목숨줄 걸린 두 가지
 
 
  공항에 모인 지지자 향해 주먹 쥐어 보이는 트럼프(할린전 AFP/게티이미지=연합뉴스) 퇴임을 8일 앞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텍사스주 할링전의 밸리 국제공항에 도착해 지지자들을 향해 주먹을 쥐어 보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미국-멕시코 국경에 건설된 장벽 완공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sungok@yna.co.kr(끝)<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연합뉴스
 
여기서 누가 주도권을 잡는가에 따라 공화당 미래가 달렸다. 현재는 좋은 뜻을 가진 전통 보수주의자들이 수세에 몰려 있어 보인다. 하지만 유권자들의 지지 방향에 따라 이들이 재부상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민주사회에서 시장과 정치는 통하는 면이 있다. 시장에서 돈을 갖고 있는 구매자가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민주사회에서도 표를 가진 사람이 표로 원하는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기서 우리는 특히 경제계의 힘을 간과할 수 없다는 걸 또한 알 수 있다. 미국 민주주의가 돈을 지불하고 정치를 구입하는 시스템으로서 그동안 작동해 왔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로 지난주 의회에서 바이든 당선 인준 반대표를 던졌던 의원들에게 정·재계 일부 그룹에서 정치자금을 끊겠다는 선언이 나왔다. 트럼프의 적극적 재정후원자였던 라스베가스 카지노 재벌 셸던 에델슨의 사망 소식에 환호하는 소리도 들렸다. '치사한 정치인들에게는 돈줄을 끊겠다'는 대기업이나 부자들이 앞으로 계속해서 줄줄이 나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게만 되면, 자연스럽게 공화당도 물갈이가 될지 모른다. 물론 정치권 로비가 필요한 그들에게도 한계가 있는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두 번째,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또 하나의 골치거리는 트럼프를 지지하며 선거조작 음모론을 믿는 수많은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들과의 관계다. 공화당 내에는 이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파워 가도를 쌓아온 유명 정치인들이 트럼프 외에도 꽤 있기 때문이다.

< The Power Worshippers(권력숭배자들) >의 저자 캐서린 스투어트(Katherine Stewart)는 최근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글에서 "왜 그렇게 많은 공화당원들이 진실과 민주주의 둘 모두와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칼럼에서 미주리 상원의원 조쉬 하울리(Josh Hawley)를 예로 든다. 워싱턴 의사당 난동사태가 일어나던 날, 광장에서 불끈 쥔 주먹을 공중에 날리며 선동한 하울리의 모습을 상기시키면서 그의 삐뚤어진 정치적 신념을 비판한다. 이 칼럼이 밝힌 하울리의 기독교 근본주의, 성경적 세계관과 정치적 신념은 이렇다.

"모든 세속의 병리 현상을 개선하고 대처하는 것이 오늘의 정치적 도전이며, 하느님의 손길이 닫지 않은 곳이 없는 이 세상을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바꾸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주권, 그리고 그 메세지를 공공 영역으로 가져와서, 모든 나라로부터 복종은 물론, 이 나라의 복종을 추구해야 한다."

필자는 스텐포드대와 예일대 법대 출신이며 대법관 존 로버트 사무소 클럭 이력을 가진 미국 톱엘리트 하울리 같은 사람이 이런 중세시대의 종교이론을 가지고 혹세무민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그는 공화당의 병증의 하나지, 원인이 아니라고 덧붙인다. 하울리나 트럼프 모두 미국의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온 기독교 근본 세력의 산물이라며 "우리가 이런 세력들과 그들이 이끄는 근본적 병리들을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또 다른 새롭고, 더 성공적인 하울리 버전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라고 경고한다.

다행히 공화당 내에는 롬니와 같은 뼈대 있는 고전적 보수 정치인이 아직 건재하고 있다. 바이든의 승리를 인정하면서도 또한 당의 진로도 챙기는 유연한 상원 원내대표 미치 맥코널의 활약도 기대된다. 또한 취임 후 바이든 대통령의 화합의 리더십이 발휘되리라 기대한다.

건전한 전통 보수자들을 살려, 공화당이 재기하도록 지원하는 일 또한 대통령의 임무의 하나라는 걸 그가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40년, 의회에서 잔뼈가 굵은 바이든이야말로 양당정치의 중요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정치인이기도 하다.

 

모두가 인종주의와 싸워야 한다
 
 
  미 의사당 난입한 트럼프 지지자들
ⓒ 연합뉴스/EPA
 
하지만 공화당은 당분간 혼란 속에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트럼프를 출당시키는 데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현재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가 이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공화당이 숨통을 좀 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러면 트럼프의 정계 축출 후 그의 열렬한 신봉자들은 어떻게 될까? 현실적 이해관계 따라 각자 자기 살길들을 찾아 흩어지겠지만, '트럼피즘'의 뿌리는 더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그들은 미국이 백인의 나라이며, 이번 선거에서 백인 다수가 지지한 트럼프가 정통 대통령 당선자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사회의 가장 큰 도전은 트럼프가 떠난 이후에도 인종주의가 여전히 기승을 부릴 것이고,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여전히 있다는 데 있다. 현재 미국이 겪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는 바로 여기 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민주주의 홍역을 앓고 있는 미국 사회가 회생하는 유일한 길은 트럼프의 인종주의를 넘어서는 일이다. 하지만 그 인종주의는 뿌리가 깊다. 백인우월주의자, 인종주의자들의 생각이 바뀌기 전에는 그 해결방법이 요원하다.

하지만 이번 조지아주에서 해결 방법의 하나를 엿볼 수 있었다. 인종주의자들의 눈에는 국민으로 비치지 않았던 흑인들이 단결해 '조지아주 첫 흑인 상원의원 탄생'이라는 역사에 없었던 극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 흑인들도 주권을 가진 국민이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준 사례다. 미국내 소수계 인종 모두가 힘을 합쳐, 이를 더욱 살리고 신장, 강화해간다면 백인우월주의도 변하지 않을까.

물론 미국이 세계화를 리드하고, 또한 늘어나는 이민자들과 함께 점점 다인종사회로 나아가면서, 낙오가 될 수밖에 없었던 많은 백인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을 구제하는 방안도 함께 강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누구나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인종주의와 먼저 싸울 필요가 있다.

특히 재미 한인동포들에게 얘기하고 싶다. 아마도 우리는 일본 다음 가는 '자기민족중심(ethnocentric)'적인 성향을 가진 민족이 아닌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또한 이를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곁가지이지만, 여기서 우리 재미 한인들의 역할 또한 기대해 본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나, 이번 미국 대선과 상원선거 결과를 보라. 조지아에 거주하는 한인 유권자 숫자만큼 민주당이 이겼다. 우리 한인들이 흑인들과의 연대를 통해 정치력을 더욱 키워 나간다면, 비록 우리가 소수민족 중에서도 소수지만 '스윙보터'로서 미국 민주주의를 위해 얼마든지 크게 공헌할 수 있다. 

“탈레반은 변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20년 전과 달라요”

 

여성은 아프간 전쟁 최대 피해자지만 20년 평화의 시기 동안 많이 변해… 많은 여성들 얼굴 드러내고 “행동할 때” 촉구하며 활동 중

 

한겨레21 2021-08-27

 

 

탈레반 군대가 점령한 이후 국경을 넘어 2021년 8월24일 파키스탄에 도착한 아프가니스탄 여성과 아이들 모습. 가운데 여성은 부르카를 쓰고 있다. AFP 연합뉴스

 

“주목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학교의 마지막 날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갈 곳이 없어요. 거긴 학교가 없으니까요. 여러분은 집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희망을 잃지 마세요. 아무리 장벽이 높아도 하늘은 더 높습니다. 언젠가는 세계가 이 사정을 알고 도와줄 거예요. 남이 해주지 않더라도, 여러분은 단결해야 합니다.”

 

2002년 개봉한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의 영화 <칸다하르> 초반의 한 장면이다. 난민으로 살다가 미군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란 국경에서 아프간으로 넘어가는 여학생들은 남자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인형 속에 숨겨진 지뢰를 피하는 훈련을 받는다. 아프간 내전을 피해 캐나다로 떠나 저널리스트로 일하던 주인공 나파스는 조국에 홀로 남아 꿈을 잃고 “개기일식 때 목숨을 버리겠다”는 여동생의 전갈을 받는다. 아프간 남부의 칸다하르로 향하는 여정에서 나파스는 “이곳(아프간) 여성들은 사회의 절반을 차지하면서 이름도 이미지도 없다. 베일에 가려져 있으니까”라고 자신의 녹음기에 기록을 남긴다.

 

아프간 문제는 단순히 부르카의 문제가 아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아프간 여성의 현실은 어떠한가? 왜 여성들은 피란을 가거나 다시 집에 머물러야 하는가? 아프간 여성들에게 하늘만큼 높아 보이는 ‘장벽’은 왜 다시 드리워지고 있는가? 지난 20년간 그들이 기다렸던 ‘세계’는 어디에 있었을까?

 

2001년 9월11일, 미국 뉴욕과 워싱턴에서 최악의 테러가 벌어져 전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9·11 테러를 주도한 오사마 빈라덴이 숨어 있다던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시작한다. 전쟁 소식만큼이나 세계를 놀라게 했던 것은 바로 부르카를 입은 아프간 여성들의 모습이다. 아프간 여성들은 억압받고 고통받는 무슬림 여성의 전형이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정당성이 부여됐다.

 

당시 미국 내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쟁이 있었다. 인류학자 릴라 아부루고드는 “미국의 아프간 침공이 아프간 여성의 해방이나 구조라는 명분을 내세운다”며 비판했다. 아부루고드는 부르카를 입은 무슬림 여성을 대상화하거나 그들의 베일을 벗기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과 연대하고 사안을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9·11 테러, 전쟁,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등장으로 무슬림은 ‘테러리스트’ ‘야만적인’ ‘비문명적인’ 등 다양한 재현과 타자화의 대상이 됐다. 히잡 또는 부르카는 무슬림의 전근대성을 대표하고 여성을 억압하는 상징적 이미지로만 남았다. 히잡에 대한 종교적, 문화적 결에 대한 이해는 사라졌다.

 

아프간 문제는 단순히 부르카의 문제가 아니다. 서구 열강이 일으킨 전쟁과 침략의 역사, 끊임없던 내전 그리고 ‘이슬람’을 내세운 가부장적인 부족주의로 인한 내부 분열 등 아프간의 역사는 늘 혼란 속에 존재했다. 이 소용돌이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아프간의 여성과 아이들이다.

 

부르카를 통해 본 세상, 세상이 보는 부르카 속 사람

 

아프간 여성은 때로 강압에 의해, 때로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부르카를 쓴다. 부르카 안에서 조각으로 나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리 역시 ‘마음의 부르카’를 쓰고 촘촘하고 작은 구멍처럼 파편화된 이미지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지 않는가? 아프간의 여성과 아이들을 억압받고 불쌍한 존재로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히잡을 쓴 무슬림 여성을 불안하고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탈레반의 아프간 복귀 이후, 자비훌라 무자히드 탈레반 대변인은 “샤리아 율법에 따라 우리는 여성에게 일을 허용할 것이다. 여성은 사회의 중요 요소이며, 우리는 그들을 존중한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곳에서 여성은 적극적인 역할을 갖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할지에 대한 법적 해석은 너무나 유동적이라, 샤리아 율법에 따라 아프간 여성의 인권과 미래가 어떻게 변화될지는 알 수 없다. 1979년 이슬람혁명으로 샤리아 율법이 도입된 뒤 40년 넘게 저항하는 이란 여성들의 사례를 보더라도, 아프간 여성들의 미래는 부정적으로 보인다. 탈레반이 오직 ‘신’(알라)의 이름으로 가부장적이고 전근대적인 외침을 주장하며 강제로 여성들에게 부르카를 씌운다면, 그 행위는 진정한 이슬람으로서 의미를 잃게 된다.

 

지난 20년간 아프간 여성들은 꿈을 꿀 수 있었다. 교육받고 직장에서 일하게 됐고, 자신의 시를 짓고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의 지난 20년은, 적어도 여성과 아이에게는 잠시나마 전쟁의 상흔을 조금씩 치유하고 자기 목소리를 드러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대부분 여성 제작진과 진행자로 이뤄진 ‘ZAN TV’(여성 TV)이다. 하지만 “만약 탈레반이 다시 온다면 나는 맞서 싸울 거예요”라고 용감하게 외치던 20살의 젊은 여성 방송인은 지금도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아프간 여성들은 이 두려움의 상황에서도 해시태그로, 영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전한다. “탈레반은 20년 전과 변하지 않았는지 몰라도, 우리는 20년 전의 아프간 여성이 아니에요. 아프간 여성이여!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상황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프간 여성은 집에만 있지 마세요. 지금은 침묵할 때가 아니라 행동할 때입니다. 우리의 목소리를 드높여야 해요.” 트위터에서 ‘아프간 여성’(Afghanistan Women)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영상 속 여성들은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 용감하게 맞서고 있다.

 

그들에게 곁을 내줄 전 지구적 연대의 힘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여성 교육부 장관인 랑기나 하미디, 탈레반의 카불 입성을 떨리는 목소리로 알렸던 영화감독 사라 카리미, 그리고 최연소 여성 시장인 자리파 가파리는 각각 파키스탄, 이란, 인도에서 ‘난민’으로 지내다 고국으로 돌아가 아프간 여성의 인권을 위해 활동한 이들이다. 그들은 지금 다시 ‘난민’이 됐지만 분명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들에게 잠시나마 곁을 내줄 수 있는 전 지구적인 연대의 힘이다.

 

구기연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