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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40주년] 문재인 대통령이 부마항쟁을 4대 민주화운동이라 평가한 이유

https://youtu.be/aOdB3lX75sA

10월 16일은 부마항쟁 기념일입니다. 올해 국가기념일로 공식지정됐고 16일 경남대학교에서 첫 정부행사로 기념식이 열립니다. 부마항쟁 40주년을 맞아 민중의소리의 시사/역사 유튜브 채널, ‘곰곰이’에서 부마항쟁의 역사를 다.룬 콘텐츠 ‘부마항쟁의 역사 - 박정희 체제 종말 가져온 부산경남 시민들의 힘’을 제작했습니다. 2편에 걸친 콘텐츠입니다.

지난 편에서 부마항쟁이 일어난 1979년 한국의 사회, 경제, 정치 상황을 살펴봤습니다. (지난편 보기:http://bit.ly/2MP9xZ4)

이번 편에서는 부산대 시위를 시작으로 한 부산지역 항쟁, 경남대 시위를 시작으로 한 마산지역 항쟁의 전개과정과 이 항쟁 이후 10.26사건 전후의 상황, 그리고 부마항쟁의 역사적 의미와 진상규명,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을 살펴보겠습니다.

#부산항쟁

1979년 전반기 대학가는 매우 조용했습니다. 경찰이 학내에 너무 많았습니다. 학교의 넓은 광장이나 도서관 앞 같은 곳은 경찰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시위를 하려고 ‘학우여러분’이라고 소리치자마자 사복경찰에게 연행되는 시절이었습니다.

부산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즈음 경남지역 대학들은 ‘유신대학’이라는 조롱을 듣고 있었고 학생들은 자괴감과 분노를 함께 지니고 있었습니다.

1979년 10월 15일 부산대에 두 종류의 유인물이 뿌려집니다. 공과대학 이진걸 학생이 뿌린 ‘민주선언문’과 법정대학 신재식 학생이 뿌린 ‘민주투쟁선언문’입니다. 유신독재정권에 투쟁하자고 호소하는 두 종류의 유인물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있었습니다.

“10시에 도서관 앞으로 모이자”

오전 10시 도서관 앞, 학생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위가 무산됩니다. 그런데 이 시위 무산 소식은 삽시간에 학내에 퍼집니다.

경제학과 정광민 학생이 시위를 주동하겠다고 친구들에게 선언합니다. 그리고 민주화운동을 준비하던 학회, 동아리, 언더써클 등의 조직 멤버들이 그날 밤 급하게 서로 연락을 주고받습니다.

정광민ⓒ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10월 16일 오전 10시, 정광민 학생은 강의실로 들어가 이렇게 외칩니다.

“유신독재정권에 맞서 우리 모두 피흘려 투쟁하자”

학생 40여명이 함께 교실 밖으로 나섭니다. 강의실 밖에는 100여명의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은 독재타도를 외치며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도서관 앞에는 200여명의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학내 시위가 시작된 겁니다. 학생들은 이내 1천여명으로 불어납니다.

항쟁에 나선 부산대ⓒ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유신철폐’를 외치며 운동장을 돈 학생들은 시내 진출을 시도합니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학교 안으로 진압해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운동장 주위에 있던 학생들이 합류하고 도서관 앞에 다시 2천여명의 학생들이 모입니다. 운동장으로 나선 학생들의 숫자는 5천명으로 늘어납니다.

항쟁에 나선 부산대ⓒ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학생들은 담장을 무너뜨리고 시내로 나갑니다. 학생들은 시내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부산대의 시위소식이 알려지자 동아대 학생들도 합류했습니다.

학생들이 시내로 나오자 경찰의 진압도 본격화 됐습니다. 최루탄이 터지고 경찰은 학생들을 연행하고 구타했습니다. 시민들은 학생들에게 박수를 치고 먹을 것을 나눠줬고 도망치는 학생들을 숨겨줬습니다. 경찰에게는 야유를 보냈습니다.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 당시 시민·학생 시위대 행렬ⓒ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퇴근시간이 넘어서자 시위대열에 시민들이 합류했습니다. 저녁 7시를 넘어설 즈음 부영극장 앞 시위대열은 수 만명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시위는 대학생의 시위가 아니라 부산시에 살고 있는 모든 계층이 함께하는 시민항쟁이 됩니다.

“유신철폐 독재타도” 구호가 부산시내 곳곳에 울려퍼지고 시위는 격렬해집니다.

부산 중구와 서구, 동구 지역의 거의 모든 파출소와 KBS MBC 부산일보 등의 언론사 경남도청을 비롯한 공공기관에 돌이 날아들었습니다. 새벽까지 시위는 계속됐습니다.

다음 날인 10월 17일, 부산대에 휴교령이 떨어집니다. 학생들은 학교 앞에서 모여 시위를 시작합니다. 동아대에서도 오전부터 도서관 앞에서 시위가 시작됩니다. 순식간에 2천여명이 모여듭니다. 학생들은 다시 시내로 진출했습니다. 오후 6시가 되자 시민들이 결합하고 전날과 같은 상황이 벌어집니다.

부마항쟁ⓒ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박정희 정권은 10월 18일 새벽 0시, 부산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합니다. 탱크와 장갑차가 대학과 관공서에 배치됩니다. 부산대와 동아대 운동장에 군인들이 아예 캠프를 치고 상주합니다. 시내에는 군인을 실은 트럭과 장갑차들이 활보하며 시민들을 위협했습니다.

부마항쟁ⓒ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계엄령이 내려진 18일 저녁 8시, 학생 300여명이 시위를 시작합니다. “계엄철폐” “독재타도” 이내 시위대가 2천여명으로 불어납니다.

전날까지 경찰을 상대했던 시위대는 총에 대검을 꽂고 달려드는 군인들을 마주합니다. 군인들은 닥치는대로 총을 휘둘렀고 시민들은 쓰러지고 부상당하고 연행당합니다.

부산은 그렇게 군인들에 의해 짓밟히고 침묵을 강요당합니다.

#마산항쟁

마산에는 3.15의거 기념탑이 있습니다. 3.15의거는 이승만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마산 용마고등학교 학생이었던 김주열 학생이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행방불명된지 27일만에 마산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친 변사체로 발견됩니다. 이 소식이 전국에 알려지며 4.19혁명이 일어납니다. 마산은 4.19혁명의 진원지였던 겁니다.

1979년 9월 경남대에서 조직적인 교내시위가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학내 여러 공개써클, 언더써클, 학회, 동아리 등이 함께 시위를 벌이기로 논의했습니다. 중간고사가 끝나는 10월 22일 시위를 벌이기로 합니다.

그러던 와중 10월 17일, 부산대의 10월 16일 시위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학교는 술렁였습니다. ‘경남대학 학우들에게’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습니다.

항쟁에 나선 경남대ⓒ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10월 18일 오후 2시 학교는 휴교를 결정하고 학생들에게 ‘강의가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방송합니다. 그리고 학내 100여명의 학생들이 모입니다. 사복경찰들도 모여듭니다.

정인권 학생이 갑자기 연설을 합니다.
“자유의 나무는 피를 마시며 성장한다. 했습니다.. 나가 싸웁시다..”

100여명의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시위를 시작합니다.

“유신헌법 철폐하라” 구호를 외치며 교문을 향해 걸어가자 학생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대열은 1천명을 넘어섭니다. 교문 앞에서 돌을 던지며 경찰과 대치했던 학생들은 시내로 진출하기로 합니다. 3.15의거 기념탑에서 모이기로 하고 학생들은 흩어집니다.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 당시 시민·학생 시위대 행렬ⓒ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오후 5시, 3.15의거 기념탑 주변에는 전투경찰이 배치돼 있었고 교통은 이미 통제된 상태였습니다. 학생들은 개의치 않고 시위를 시작합니다. 시내 곳곳을 돌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저녁 6시를 넘어서자 퇴근한 시민들이 합류합니다. ‘경찰이 옥상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소식이 들리자 시위대에서 소리칩니다. “불꺼” “불꺼”

시내의 상점과 사무실, 민가에는 불이 꺼집니다. 시내는 암흑이 됩니다.

시위대는 공화당사로 향합니다. 공화당사로 들어가 서류뭉치와 집기를 들고 나오고 공화당 경상남도지부라고 쓰인 현판을 떼어 불태워 버립니다. 파출소 안에 있던 박정희 사진 액자를 들고 나와 불태웁니다. 시내 곳곳에서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졌습니다.

파괴된 파출소ⓒ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경찰은 자체 경찰력으로 진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인근 지방 경찰서에 증원 요청을 합니다. 그리고, 창원에 있는 보병부대 병력이 투입됩니다. 새벽까지 시위가 계속됐고 군인과 경찰들은 조를 지어 골목마다 돌아다니며 젊은 청년만 보이면 연행합니다.

부마항쟁ⓒ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19일, 마산에 공수부대가 급파됩니다. 50여대의 트럭과 지프가 마산시내를 활보하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합니다. 마산창원 일대에 야간통행금지가 발표됩니다. 매월 25일 열리던 반상회가 앞당겨 진행됩니다.

하지만, 날이 어두워지자 시민들은 시내 중심가로 모여들었습니다. 상가와 사무실 유흥업소까지 불을 끄고 셔터를 내려버립니다.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시위가 시작됩니다. 시내 곳곳으로 시위가 번져갑니다.

부마항쟁ⓒ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군인까지 투입된 진압작전은 전날과 양상이 달랐습니다. 군인들은 골목골목까지 뒤져 시민들을 무차별로 연행하고 구타합니다.

그리고 10월 20일 마산과 창원 일대에 위수령이 발동됩니다. 시내는 군인들이 장악합니다.

18일부터 19일까지, 그 이후에도 경찰과 군인들은 곤봉과 군홧발, 개머리판으로 시민들을 무차별 폭행했습니다.부상자가 속출했습니다. 그리고, 시민 한 명이 사망합니다.

고 유치준ⓒ기타

정부와 경찰은 당시부터 32년간 진압과정에서 공식적인 사망자는 없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사망자가 있었습니다. 당시 51세였던 마산 시민 유치준씨입니다.

무려 32년만에 마산의 항쟁 과정에서 숨진것으로 확인됐는데요. 당시 기자의 메모에 이렇게 쓰여있었습니다.

경찰의 마산 경남대 소요사건 1차 발생 보고서
변사자 발생, 목림여관 앞 도로변
(새안자동차 영업소 앞)에서
50여세로 보이는 노동자풍에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왼쪽 눈에 멍이 들고 퉁퉁 부은채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있었음
민방위 모자, 얼굴 둥근 편, 키 160cm 가량

하지만 유치준씨의 사망소식은 언론을 통해 전달되지 못했고 경찰은 은폐했습니다. 심지어 경찰은 부검을 하고 가매장까지 해놓고 보름이나 지나고 나서 가족들에게 유씨의 사망소식을 전합니다. 그래 놓고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고인의 신원은 소지품인 도시락 속의 주민등록증으로 알았다.”

이게 말인가요 막걸린가요. 도시락 속에 누가 주민등록증을 넣고 다닙니까

부마항쟁ⓒ기타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부산에서 1,058명이 연행됐고 66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됩니다. 마산에서 505명이 연행됐고 59명이 군사재판에, 125명이 즉결심판에 회부됩니다.

그리고 재판에 회부된 상당수가 고문과 구타를 받으며 수사당합니다.

#박정희 체제를 균열시킨 부마항쟁

1979년 10월 18일 부산에 계엄령이 내려지고 10월 20일 마산에 위수령이 내려지면서 부마항쟁은 종료됩니다.그런데 부마항쟁의 소식은 대학가로 퍼집니다.

부산에서 경남으로 넘어온 시위열기는 대구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경북대와 영남대가 10월 22일과 23일 휴교를 실시합니다. 그러나 계명대에서 학생 2000여명이 유신철폐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입니다.

연세대에는 유인물 3천장이 배포됐고 연세대와 이화여대 학생들이 만나 10월 29일과 30일에 시위를 벌이기로 논의합니다. 이대로 가면, 전국의 대학가로 퍼질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미국CIA 보고서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최근의 정치적 사태 전개와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소요의 결과 남한의 국내 치안 상태는 더욱더 불안정해졌고 단기간에 내부의 치안상태가 실질적으로 개선될 것이라고는 거의 기대할 수 없다.

제26보병사단, 제30보병사단, 그리고 제20보병사단이 수도경비사령부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음.

모든 보병연대는 공포탄을 지급받았고 만약 계엄이 선포될 경우 서울에 진입할 태세를 갖추고 있음.

부산에서 이틀째 시위가 진행된 10월 17일은 유신이 선포된 날이었습니다. 청와대에서는 유신선포 7주년 기념만찬이 열립니다.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들은 노래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무부장관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부산 상황을 보고합니다. 밤 10시30분 장관들이 국무회의실로 모입니다.

비상계엄 선포가 제안됩니다. 비상계엄은 장관들의 서명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일부 장관들은 서명을 못하겠다고 버팁니다. 대통령의 의지는 워낙 강경했습니다. 결국 18일 새벽을 기해 부산에 계엄이 선포됩니다.

부마항쟁ⓒ기타

10월 18일 새벽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비행기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가 그날 오후 다시 서울로 와 보고합니다.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이 동석한 자리에서 김재규가 보고합니다.

“제가 내려가기 전까지는 남민전이나 학생이 주축이 된 데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지에서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160명을 연행했는데 16명이 학생이고 나머지는 다 일반 시민입니다.

그리고 데모 양상을 보니까 데모하는 사람들도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 주먹밥을 주고 또 사이다나 콜라를 갖다 주고 경찰에 밀리면 자기 집에 숨겨 주고 하는 것이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들이 완전히 의기투합한 사태입니다.

주로 그 사람들의 구호를 보니까 체제에 대한 반대, 조세에 대한 저항, 정부에 대한 불신 이런 것이 작용해서 경찰서 11개를 불질러 버리고 경찰 차량을 10여 대 파괴하고 불지르고 이런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총살을 하겠느냐.”

김재규 중정부장의 진술에 의하면 차지철은 이렇게 거들었다고 합니다.

“까짓것 학생이건 야당이건 깔아뭉개면 됩니다.”

이미 박정희 대통령의 핵심참모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중요 사건에서 대통령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77년 부가세 도입 당시 반대의견을 내고 있었고, 신민당 전당대회 전 가택연금 중이던 김대중을 하루동안 연금해제를 해주고 신민당 결의대회에 참석할 수 있게 해준데다 김영삼 의원직 제명 때에도 반대의견을 냅니다.

부마항쟁ⓒ기타

부마항쟁에 대한 대응을 논의한 후 김재규는 본격적으로 거사를 준비합니다.

‘대통령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10월 26일,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합니다. 유신체제는 붕괴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부마행쟁은 4.19혁명이후 처음 등장한 대중적 시민항쟁이었습니다. 1970년대 반유신 운동의 귀결점이자
총결산이었습니다. 대학생들의 선도적인 운동이 아니라 도심에서 광범위한 계층의 시민들이 참여한 항쟁이었고 이런 흐름은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항쟁에 영향을 줬으며 결국 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때문에, 부마항쟁은 한국의 4대 민주화운동으로 평가됩니다.

#입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부마항쟁

한국현대사의 결정적 변곡점이었던 부마행쟁은 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까요?

일단 당시 부산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는 아예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부산 상황이 언론에 보도된 시점은
18일 0시 계엄이 선포된 이후입니다.

게다가 20일 마산에 위수령이 선포된 이후 10.26까지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부마항쟁이 제대로 알려지기도 전에 전국은 박정희 대통령 사망 소식으로 뒤덮이고 제주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 계엄령이 확대됩니다.

이런 분위기는 부마항쟁에 대한 언급 자체를 반강제적으로 막아버린 것이죠

이어 1212쿠데타, 서울의 봄, 5.17쿠데타 그리고 5.18광주항쟁이 터집니다. 군인의 총칼에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국민들은 다시 입을 열기 힘든 공포에 질립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기타

부마항쟁은 부산과 경남지역 국민들의 머릿속과 가슴속에 남아있을지언정 감히 입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사건이 됩니다. 이후 오랜시간 동안, 부마항쟁은 부마사건이라 불리며 10.26 전에 있었던 소요사태 정도로 알려집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입을 다 막을 수는 없습니다.

당시 부산과 마산에서 항쟁에 나섰던 사람들은 부마민주항쟁 기념 단체들을 만들었고 1989년 항쟁 10주년을 기념해 자료집을 만듭니다. 부산대와 경남대에서 시위를 준비했던 사람들의 준비 과정, 비록 보도가 되지 않았지만
당시 사건을 취재했던 기자들의 취재 기록이 모아집니다.

그 후로 10년이 흘러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이 부마민주항쟁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쓰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해 부마항쟁 특별법 입법청원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특별법이 제정되는데는 다시 10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은 부마민주항쟁 25주년 기념식에 영상메시지를 보내 부마항쟁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인권과 민주주의가 철저히 유린당하던 시절 부산과 마산시민이 일어서 철옹성 같았던 유신독재를 무너뜨렸다. 부산과 마산은 민주주의의 성지”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합니다. 2006년 11월 이 위원회에 부마항쟁 진상규명이 신청됩니다. 2009년 12월 진실화해위원회 진상조사가 시작됩니다.

시위 진압 및 수사 과정에서 불법 구금 및 가혹행위가 있었고, 국가가 피해자를 확인하고 그들의 명예회복과 피해구제를 위한 조처를 하라는 권고가 나옵니다.

본격적인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뤄지려면 특별법이 필요했습니다. 2010년 국회에 특별법이 제출되었지만 통과되지 못합니다. 2013년 5월 국회에서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부마항쟁보상법이 통과됩니다.

2014년 10월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 줄여서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합니다. 하지만 5.16쿠데타 찬양하는 등의 인사들이 위원회에 포함되고 부마항쟁 관련 단체들이 추천한 인사들이 배제되면서 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문재인 의원은 이렇게 비판합니다.

“유신독재를 찬양·지지한 인사들이 부마항쟁 진상규명을 하겠다고 나서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부마민주항쟁과 희생자들에 대한 모욕이다.”

2기 위원회에서도 논란은 계속됐고 진상조사보고서는 아직도 미완의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2018년 11월 3기 위원회가 시작됩니다. 3기 위원회 활동 이후 진상조사 사업은 계속됩니다. 고 유치준씨가 부마민주항쟁 관련 사망자로 처음 공식 인정됩니다.

2018년을 지나면서 경상남도와 부산시 등 지자체 차원의 진상규명과 기념사업이 부쩍 늘어납니다.

25일 부산시청 대회의실에서 열린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 범국민 추진위원회' 출범식 이후 김지수(맨 왼쪽부터) 경남도의회 의장, 김경수 경남도지사, 오거돈 부산시장, 박인영 부산시의회 의장, 김석준 부산교육감 등이 서명운동에 동참하고 있다.ⓒ뉴시스

2018년 부마항쟁 관련단체들과 경상남도, 부산시 등의 지자체들이 힘을 모아 부마항쟁 국가기념일 지정사업을 추진합니다. 부산, 경남, 창원시의회에서 기념일 지정 촉구 결의안이 통과되고 2019년 5월에는 기념일 지정 촉구 국회의원 결의안이 발의됩니다. 60만명의 서명이 모이면서 행정안전부에 기념일이 건의됩니다.

그리고 2019년 9월 24일 부마항쟁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됩니다.

10월 16일 부마항쟁의 중요한 발원지 경남대학교에서 제40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이 처음으로 정부행사로 열립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 자리에 참석합니다.

18일 부산대학교 10.16기념관에서 부마민주항쟁의 국가기념일 지정을 축하하는 부산시, 경남도, 창원시의 공동 환영 행사가 열리고 있다.ⓒ민중의소리 김보성 기자

지자체차원의 사업들도 많습니다.

창원시와 경상남도는 4월에 부마민주항쟁 40주년 기념 찾아가는 음악회, 7월에 부마민주항쟁 40주년 기념 순회 연극 “거룩한 양복”공연, 9월에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 축하식과 시민강좌를 열었습니다.

10월에는 각종행사가 집중됩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민주 대동 큰잔치 “시월의 구름들”, 부마민주항쟁 국제학술대회, 청소년이 만드는 뮤지컬 “빛날 – 내일의 서막” 공연이 열렸고 이후에는 부마민주 대음악제, 부마민주 영화제가 연말까지 이어집니다.

40년이 흘러서야 국가가 인정하고 지자체가 제대로 나서 항쟁을 기념하는 시대가 된 겁니다.

부산 경남 지역의 어른들은 이런 말씀을 한다고 합니다.

“양 산이 뒤집어지모 나라가 같이 뒤비진다 아이가!”
‘양 산’, 부산과 마산을 말하죠

부산과 경남의 시민들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변곡점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숭고한 역사에 존경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