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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업] 좌익들이 거짓 음해하는 이승만 한강다리 폭파의 진실 출처: Mule

작성일 2020-09-12 09:14
 
좌익들이 가장 자주 음해선동하는 사례중 하나가 바로 이승만이 국민버리고 도망갔다는 빤스런이 있지요.
 

좌익의 특성중 하나가 본인들이 저지른 짓을 남에게 뒤집어씌우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지워야 할 메신져가 바로 대한민국 건국과 근대사인 이승만, 박정희 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중공이 유별나게 그짓을 잘 해왔지요. 이를테면 자신들이 난징에서 저지른 학살극을 일본에 뒤집어씌우기 등, 반미 프로파간다 선동으로 역사를 왜곡시키던 구 소련도 마찬가지였고요. 거짓왜곡 뒤집어씌우기는 공산주의자들의 특기입니다.

백선엽 장군의 6.25 징비록에 보면 중공군이 참전하기 전 국군 1사단이 평양으로 진격할때 김일성과 북한 수뇌부가 빤쓰런하게 된 정황을 그대로 이승만에 뒤집어씌워버린 겁니다.

당시 김일성의 빤쓰런이 어느 수준이었냐면, 평양 시민들에게 "우리는 평양을 사수한다"는 방송을 공언하며 정작 본인은 승용차로 청천강을 넘은 뒤 미군의 공중폭격이 두려워 도보로 산길을 헤쳐 압록강으로 빤쓰런을 해 버린 자입니다.

국군 1사단이 대동강 철교를 건너 평양 입성 후 만수대에 있던 인민위 김일성 집무실을 점거했을 때 스탈린과 김일성의 커다란 초상화 이외에 성급하게 도망가느라 여기저기 서류등이 마구 흩뿌려져 있던 상태였습니다.

 

 

 

 

김일성 자체가 얼마나 간교하고 궐력농단에 능했던 자 였냐면.. 전세 역전의 책임을 남로당 지도자로 있다가 월북해서 북한서열 2위를 차지하던 박헌영에게 그 책임을 모두 뒤집어 씌운 자 입니다.

대한민국 국군의 북진에 압록강으로 둘이 도망쳤을 때 김일성과 박헌영이 서로 책임문제로 싸우다 김일성이 박헌영에게 재떨이 집어던진건 아주 유명한 일화이죠.

 

그리고 후에 김일성이 박헌영을 미제의 간첩죄를 덮어씌워 굶주린 개를 풀어 물어뜯어 죽여버립니다.

 

 

 

그럼 저 좌익들이 기습남침한 김일성에게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부모죽인 원수보다도 더 이악물고 물어뜯는 이승만을 볼까요?

좌익들이 이악물고 물어뜯는 라디오 방송은 6월25일 새벽6시의 일 입니다. 그 방송도 담당자가 급하게 피난가느라 미처 끄지 못 하고 도망간 것이지요.

그리고 끝까지 버티던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을 벗어나게 된 계기는 측근들의 속임수였습니다. 대통령이 잡히면 그 순간 대한민국은 끝이지요. 그 시각이 6월 27일 새벽2시였습니다.

저들이 물어뜯는 라디오 방송과 무려 2일이나 차이가 났지요. 실질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너무 늦게 도피한 겁니다. 방송하고는 아무런 연관조차도 없습니다.

 

아래는 북한보도내용

 

 

그래서 좌익들이 다음으로 물고 늘어진 것이 한강다리 폭파지요. 그럼 6월 28일 새벽2시에 에 있었던 한강다리 폭파도 살펴볼까요 ? 사실 대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할 음해선동입니다.

당시 교량은 북단 남단 모두 군 헌병과 공병대가 통제하고 있었고 한강교에는 민간인 자체가 진입할 수 없었으며, 대신에 한강에는 수많은 포구들이 있어서 전차가 지나갈 수 있어 폭파계획이 있었던 민간인들을 통제시킨 한강교 대신 뒤늦게 피난중인 서울시민들은 배로 계속해서 도하를 하고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럼 가장 후미에서 뒤따라오다 한강교 폭파로 희생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그것은 경찰병력이었습니다.

차량으로 도하중에 한강교 노들섬 남단 1번 2번 상판이 폭파되서 종로서 성북구 경찰들이 희생된 것입니다.

최창식 공병감은 이시영 부통령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차량이 없음을 확인하고 폭파했다고 진술했는데 아쉽게도 북단에서는 희생된 경찰병력이 차량으로 내려오는 중이었습니다.

이건 당시 관측과 교신의 오류에서 비롯된 참사였습니다.

희생된 사람 가운데 유일하게 확인된 경우는 종로경찰서 직원 77명.

최창식 대령 사형. 사후에 무죄 판결.

폭파를 명령한 채병덕 참모총장은 전사.

폭파에 관여한 명령 계통 군 수뇌부가 모두 6.25 전쟁중 전사.

이게 전쟁입니다..

남침급보 듣자마자 바로 한밤중에 잠자는 맥아더에게 전화해 깨워서는 지금 당장 우리를 안 도와주면 남한내 미국인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해 미국을 끌어들인 지혜를 발휘한게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었습니다.

 

실질적으로 초기형태의 최초 국군은 1946년에 형태가 갖춰지고 1949년에야 비로서 3군의 형태가 갖춰진지 불과 1년 뒤, 북괴 김일성 이 XX의 기습남침으로 제대로된 메뉴얼도 갖춰지지 않는 상태에서의 많은 오류들이 전부 정비되어 1.4후퇴때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제대로 대처하게 됩니다.

 

 

 

낯익은 아래 사진은 이승만 대통령이 한강다리를 폭파해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사진입니다. 그런데 이 사진의 진실은 1950년 12월 12일 AP통신 기자 막스 데스포가 대동강 철교를 찍어 플리쳐상까지 받은 사진입니다. 과거 518청문회 당시 무장공비 검거사진을 들고와 518학살 사진이라 우겨댄 이해찬 처럼 우리 역사에서 이와같은 조작날조 사례는 정말 비일비재 합니다. 정말 거짓으로 점철된 역사 그 자체입니다. 전부 싹 다 뜯어고쳐야 할 정도로, 그렇게 된 원인은 해방 이후 건국의 정통성을 북한으로 두고있는 좌익계가 사학계를 점령한 이유도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