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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종족적 사고의 근원에 대하여

¶글쓴이 : 정광제 이승만학당 연구원/한국근현대사연구회 고문

–“큰 피해 우려됐던 태풍이 ‘다행히’ 일본으로 진로를 틀었습니다.” 방송멘트 당연히 여기는 사회

-‘civic’과 ‘ethnic’이라는 두 가지 민족 개념. 영국·미국 등 전자, 독일·한국 등 후발국이 대개 후자

-민족이란 개념이 정착하는 과정도 조선 전통문화와 상호작용. ‘친족’의 확장 형태로 수용해 정착  

이 글은 지난 7월 12일 필자가 이승만학당에서 강연한 ‘반일 종족적사고의 근원 고찰’ 발제문입니다. 필자의 허락을 받아 3회에 걸쳐 나누어 게재합니다. <편집자> 

1. 들어가는 말 

“큰 피해가 우려됐던 태풍이 ‘다행히’ 일본으로 진로를 틀었습니다.”

이런 코멘트가 공중파 방송에서 서슴없이 나오고, 그걸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정상이라고 볼 수 있는가? 

종족주의의 사전적 정의는 ‘자신의 종족을 가장 우선시하는 태도나 사상’이다. 전 근대적 세계관인 종족주의는 끊임없이 자신 주위에 적을 만들어 가면서 자신의 생존을 이어간다. 

작금의 대한민국에서는 종족주의에 기초된 반일감정과 국민의 애국심이 동일시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반일적·종족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가? 지난 35년의 일제 병합의 역사 그 자체인가? 아니면 그 역사에 대한 우리의 사유와 그런 역사와 사유를 가능케 한 세계관인가? 본고는 반일 종족적 사유의 근원이 후자라는 전제 아래, 우리의 역사사유의 기저인 세계관을 고찰하고자 한다. 

본고에서 논하고자 하는 반일 종족주의는 이 땅에서 태어나 교육받고 살아가는 대다수 ‘인간’의 내면을 지배하는 여러 정신적 구조들 중의 하나이다. 오늘날의 대다수 ‘한국인’들은 20세기 초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 역사와 관련하여, 취약한 실증적 논거를 가진 통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 통념은 전근대적인 성리학적 세계관에 기반한 국익우선주의와 샤머니즘을 토대로 한다. 

본고는 우선, 종족적 민족주의를 먼저 간략히 살피고, 그 다음 반일 종족주의를 논하되 반일과 종족주의를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반일감정이 종족주의를 낳은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를 가진 종족적 세계관이 어느 한 역사적 계기를 통해 반일감정으로 표출 형상화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2. 종족적 민족주의 

•‘네이션 nation’ 개념의 등장

무릇 문화의 변동은 전파에 의해서 일어난다. 생명체가 돌연변이에 의해 진화하는 것과 같다. 인간생활에 필요한 교환이나 거래는 원시시대부터 존재해 왔지만 근대 자본주의가 발생한 것은 영국과 그 주변이었다. 그것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이런 인식은 ‘서구중심주의’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사실은 사실인 것이다. 

‘민족’이란 개념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에서 16세기에 성립되기 시작해서 18세기에 프랑스에 도입되었다. 그 영향을 받아 독일 등지로 퍼져 나가면서 각각의 토착적 처지에 맞게 변용되면서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 우리의 경우 19세기 말에 일본을 통해 ‘민족’이란 개념을 접하게 되면서 ‘민족주의’도 형성되기 시작했다.  

‘네이션’ 개념이 각지로 전파·확산돼 가면서 점차 ‘네이션’을 문화·역사적으로 ‘독특한’ 집단으로 해석하는 종족(ethnic)의 네이션 개념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민족’이란 조어는 종족적 의미가 강하게 들어간 말이었다. 이처럼 문화는 전파되면서 변용되어 정착된다. 때문에 어떤 문화 현상의 원형(原型)을 아는 것은 우리 자신의 그것을 이해하는 데 긴요하다. 

역사사회학자 그린펠드(Liah Greenfeld)에 따르면, 내셔널리즘(nationalism)의 원형은 영국의 잉글랜드에서 형성되었다. 내셔널리즘은 계층·지역적 차이를 넘어선 ‘인민’으로서의 네이션(nation)-민족이나 국민 중 어느 하나로만 옮길 수 없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에 대한 소속감이다. 그 인민은 주권을 보유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내셔널리즘은 근대 현상이다. 

16세기 잉글랜드에서는 지성과 교양을 갖춘 신흥귀족과 중간층에 속한 사람들이 종래의 봉건적 세습귀족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그때까지 멸시받아 온 하층민을 가리키는 말인 인민(people), 네이션 혹은 잉글랜드인이라는 개념으로 칭하고 지위상승을 정당화했다. 이러한 ‘개념혁명’을 거쳐 ‘네이션’ 개념은 17세기 영국의 시민혁명 과정에서 민주화에 큰 역할을 수행했다. 

•시민과 종족

이러한 민주적인 ‘네이션’ 개념이 각지로 전파·확산돼 가면서 점차 ‘네이션’을 문화·역사적으로 ‘독특한’ 집단으로 해석하는 종족(ethnic)의 네이션 개념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래서 민족주의는 ‘시민적(civic)’과 ‘종족적(ethnic)’이라는 두 가지의 대극적(對極的) 관념을 기본 원리로 하여 구성되었다. 영국·미국·프랑스가 전자에 해당하고 독일·러시아·일본·한국 등 후발국들이 대개 후자에 해당한다. 물론 위의 구분은 어디까지나 이상형이다. 실제 각 ‘네이션’의 ‘내셔널리즘’은 비율의 차이가 있지만 두 가지 측면을 다 갖고 있기 때문이다. 

번역어 선택이 입장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네이션의 번역이 대표적이다. 이것을 ‘민족’으로 번역하느냐, ‘국민’으로 번역하느냐는 정말 어려운 문제다. 일본은 19세기 서구 문화 수용기에 우여곡절 끝에 ‘민족’으로 번역했고 그것이 조선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2차 대전 후 ‘민족’과 ‘민족주의’라는 말을 쓰지 않고 그냥 ‘네이션(ネ—ション)’으로 음역하고 있다. ‘네이션’에는 종족·문화·역사적 의미를 강하게 가지고 있다고 느껴지는 ‘민족’의 의미와 근대국가의 주권을 가진 집합체로서의 ‘국민’이라는 의미가 함께 들어 있다. 또 구성하고 있는 주민들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두는 ‘국가’라는 말이 될 때도 있다. 국제연합의 원어인 ‘United Nations’에서 ‘nation’이 그런 경우다. 

•종교를 대신한 민족주의

이와 같이 근대주의 관점과 정치적 측면으로 끝나지 않는 민족과 민족주의기 때문에 그것들은 애매모호하고 복잡한 현상을 유발한다. 민족주의가 가진 그런 문화적이고 종족적인 마력이 대중들에게 저항하기 어려운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해왔다. 민족주의 연구로 유명한 사회학자 스미스(Anthony Smith)는 “민족주의는 과거에 전통과 종교가 해 오던 일-구원-을 근대사회에서 하는 대행자로서, 하나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훨씬 넘어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인화성 높은 여러 운동이 일어난다. 

우리의 경우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를 딜레마에 빠트리는 여러 문제에 직면해왔다. 민족과 민족주의가 갖고 있는 낭만적 감성과 그것에 대한 한국인들의 충성심을 틈새로 이용하여 북한 정권과 남한 좌파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폄훼하고 전복하기 위한 갖은 공작과 운동을 벌여 오고 있다. 

•우리의 ‘민족’ 형성의 원리

앙드레 슈미드라는 캐나다 학자가 쓴 <Korea Between Empires 1895-1919>이란 책이 있다. 한국인이 민족이란 개념을 수용하는 과정과 실태를 잘 묘사한 책이다. 슈미드에 의하면 민족이란 번역어가 조선에 들어와 정착하는 과정 역시 철저히 조선의 전통문화와 상호작용하는 과정이었다. 한마디로 조선에서 민족은 친족(종족, 필자 주)의 확장 형태로 수용되고 정착하였다. 

최초로 민족이란 말을 전파한 황성신문은 민족을 해설함에 있어서 친족의 개념을 활용하였다. 우리 모두는 한 조상의 자손이란 식이었다. 전통사회에서 친족이란 아래로 무한 확장하는 것이어서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민족의 역사에 대한 서술은 광대한 족보의 형식을 띠게 되었다. 슈미드는 한국인이 민족과 친족을 공통의 감각으로 연결하게 된 데에는 땅에 기맥이 흐른다는 풍수지리설의 작용이 있기도 했음을 지적하였다. 

민족의 형성과 관련하여 추가로 지적할 점은 친족 간의 횡적 결합도 중요했다는 것이다. 1931년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라는 족보가 편찬되었다. 전국에 분포한 330개의 유명 친족집단을 하나로 통합한 족보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들이 대개 불천위(不遷位) 조상을 모신 일급 신분의 양반이었다. <만성대동보>는 이들 일급 양반 신분의 혼인 관계를 추적한 작품이다. 

대동보의 서문은 여러 사람이 쓴 것을 하나로 모은 것인데, 각각의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집집마다 족보가 있는데, 이것을 횡으로 연결한 것은 우리 모두가 원래는 한 조상의 자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단군으로부터 지금까지 4300년 동안 인구가 증식한 것을 추산하니 오늘날의 인구수와 같다는 논리를 펼쳤다. 우리 모두는 단군의 자손이라는 민족의식은 이와 같은 정신작용의 산물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15∼19세기의 조선에서는 그러한 의식이 없었다. 조선인의 까마득한 조상으로서 단군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막상 국가와 문명의 정통성은 3000년 전 중국에서 건너온 기자(箕子)라는 성인에게서 구해졌다. ‘조선’이란 국호 자체가 기자조선을 계승한다는 뜻이다. 

그러한 문명사관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단군의 자손이라는 공동체의식이 생겨날 리가 없다. 더구나 사회는 기자의 가르침을 깨우친 양반과 그렇지 못한 상놈과 종놈의 신분으로 심하게 대립하는 구조였다. 그러한 사회구조 역시 민족의 성립을 저해했다. 민족은 기자의 나라가 망하고 양반 신분도 해체된 20세기에 들어 한국인 모두가 일제의 억압과 차별을 받으면서 생겨난 새로운 공동체의식이었다.

¶글쓴이 : 정광제 이승만학당 연구원/한국근현대사연구회 고문 

-소중화사상, 자신들만이 문명국이며 주변의 이민족의 국가들에 비해 문명의 수준이 높다고 자부

-청나라와 일본 ‘적대적 타자’ 동일시. 저항과 거부, 반감이 자주의식과 민족정서, 주체사상과 결합

–돈과 지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샤머니즘. 선과 악 가르는 절대자 없고 종족주의와 결합  

이 글은 지난 7월 12일 필자가 이승만학당에서 강연한 ‘반일 종족적사고의 근원 고찰’ 발제문입니다. 필자의 허락을 받아 3회에 걸쳐 나누어 게재합니다. <편집자> 

3. 한국인의 세계관 

‘애국심이란 당신이 당신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당신 나라가 다른 나라들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하는 것’ 이라는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은 극단적 민족주의(국수주의, ultranationalism)의 전형적 발상이다. 대다수 한국인들은 해방과 대한민국의 건국과 함께 과거 조선의 세계관인 성리학이 사라진 것으로 착각하지만, 조선인의 정신을 지배한 성리학은 여전히 현대 한국인의 사고를 지배하는 가장 기층적인 세계관이다. 

그런데 조선에 들어와 변형된 성리학은 위계질서를 기반으로 하는 배타적성격을 갖고 있다(외래 사상인 성리학은 이 땅의 전통적 종교적 세계관인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조지 버나드 쇼가 조선 또는 한국에서 태어나 위와 같은 말을 했다손 치더라도, 그의 말은 아무런 저항 없이 환영받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조선이 받아들인 성리학이야말로 (중국 중심의) 국수주의적 사유체계와 배타성(국수주의적 배타성은 주변을 적 또는 하등한 존재로 간주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위계질서 등을 그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나라의 멸망 후 상국 중심의 성리학의 화이질서를 조선을 중심으로 축소 변형한 것이 조선말기를 지배한 소중화 사상이다. 

3-1. 반일 세계관의 성리학적 기저 : 종속과 혼돈의 소중화 사상

소중화 사상은 중국 이외의 나라에서 중화 사상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자기민족 중심주의 사상이다. 중화 사상에서 중국 한족들이 자신을 문명의 중심으로 놓고 주변국가들을 이민족으로 본 것처럼 자신들만이 문명국이며 주변의 이민족의 국가들에 비해 문명의 수준이 높다고 자부하였다(정효운, 《고대 한·일 국가와 타자인식》, 신라문화 28집, 2006 – 한국과 일본의 소중화 사상의 기원 연구).

1904년 아손 그렙스트라는 스웨덴 기자가 서울을 방문하여 몇 달 간 머물렀다. 어느 날 그는 통역을 데리고 감옥서를 방문하였다. 대한제국의 감옥이 어떠한 곳인지, 죄수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취재하고 싶어서였다. 감옥서의 서장은 불시에 나타난 외국인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무엇 때문에 왔는지를 세밀하게 심문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그렙스트의 몸 이곳저곳을 만지고 아래위를 세밀하게 살폈다. 이윽고 서장은 “왜 당신은 눈이 둘인지”, “왜 등에 뿔이 없는지”를 캐물었다. 이 이야기는 당시 대다수 조선인이 보유했던 세계에 대한 인식의 수준을 실감나게 전해주고 있다.  

전형적인 화이질서(화이사상)를 표현한 그림. 위에서부터, 중화, 대중화, 소중화, 이적, 금수.

<그림> 환상의 소중화적 세계관.

위 <그림>의 왼쪽은 17~19세기의 조선인들이 그린 ‘천하도’, 곧 세계지도이다. 관리들이 지방을 순행할 때 지참하는 지도첩의 머리에 실리기도 하고, 양반가의 병풍으로 걸리기도 한 그림이다. 

천하는 3겹의 동심환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심은 중국과 그에 부속하는 나라들이다. 조선의 소속은 여기였다. 그 바깥의 바다 속은 야만의 나라들이다. 일본이 거기에 속하였다. 또 그 바깥의 대륙은 금수의 나라들이다. 이들 야만과 금수의 나라 가운데 하나가 일목국(一目國)인데, 거기에 사는 족속의 생김새는 <그림>의 오른쪽과 같이 눈이 하나 밖에 없다. 

1904년 감옥서의 서장은 스웨덴에 관한 설명을 듣고선 그 나라를 일목국으로 판단하였다. 그런데 거기서 온 사람의 생김새가 위와 달라 그토록 자세하게 그렙스트의 몸을 만지고 살피고 했던 것이다. 소중화에 매몰되어 역사의 시간이 멈춘 조선의 우울한 단면이다. 

이런 화이사상의 기원은 조선 건국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392년 태조 이성계는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다음 종주국 명에 국호의 하사를 요청하였다. 명은 조선이란 국호를 하사하였다. 새로운 왕조의 지배층은 조선을 3천 수백 년 전에 중국의 성인 기자가 동쪽으로 건너와 세운 기자조선의 도통을 잇는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환영하였다. 이래 조선왕조의 지배층은 자국의 국제적 지위를 중화제국에 소속한 제후국으로 설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형태로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이후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였다. 명은 대군을 파견하여 조선을 구원하였다. 조선의 지배층은 그 은혜에 감읍하였다. 1616년 만주에 오랑캐 여진의 나라 청이 세워졌다. 1627년과 1637년 청은 조선을 침공하여 굴복시키지만, 조선의 명에 대한 충성심은 여전하였다. 

1644년 종주국 명이 청에 의해 멸망하였다. 오랑캐가 중원을 차지한 역사의 변태를 맞이하여 조선의 지배층은 조선을 중화를 정통으로 계승하는 유일한 나라로 간주하였다. 조선은 겉으로는 청에 복속하였지만 내심에서는 스스로를 소중화로 자부하였다. 궁중의 깊은 후원에 세워진 대보단에서의 멸망한 명나라 황제에 대한 제사는 1894년의 청일전쟁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국왕이 주재하고 백관이 참례한 이 제사는 종주국 청의 주목을 피해 깊은 밤중에 거행되었다. 이렇듯 조선이 소중화를 자처하면 할수록 변방 오랑캐로서의 일본은 조선 조정과 백성들 사이에서 소원한 관계 속에 있는 멸시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한 35년은 이렇듯, 수 백년에 걸쳐, 바다 건너 오랑캐라고 여겨온 일본에게 당한 수치심, 그 자체였다. 2천여 년 반종속의 관계에 있어온 상국 중국에 대한 수치심은 느끼지 못하지만 하국 일본에게 종속된 35년은 대단히 수치스럽고 울분에 찰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해방 후 국사학계의 최대 사명은 구겨긴 조선의 종족적 자존심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역사의 누락과 은폐와 과장이 등장하였다. 거짓말만 역사왜곡이 아니라 누락과 은폐와 과장도 역사왜곡이다. 

반청감정과 반일감정은 소중화라는 동일한 기반 가져 

작금 한국사회의 반일감정은 역사적으로 보면 효종 시절 북벌론이나 다를 것이 없는 허상이다. 1637년 병자호란을 당한 인조는 삼전도에 나가 자신들이 ‘오랑캐’라고 하대하던 여진족 추장 홍타이지(청 태종)에게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아홉 번 이마를 땅에 찧는(三拜九叩頭禮)” 치욕스런 항복을 했다. 

이후 조선 지배층은 자신들의 항복 행위를 자위하기 위해 황당무계한 북벌론을 주장하고 나섰지만, 자신들의 주장이 너무 현실성이 결여되었다고 판단되자 조선 지배층은 슬그머니 북벌론을 접고 환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조선의 국력으로는 감히 청에 대적할 수 없다는 현실과, 반드시 오랑캐에 대한 복수를 해야 한다는 이상의 참담한 괴리를 겪은 조선 지배층은 이미 멸망해서 지구상에서 사라진 명나라에 의리를 지킨다는 배청복명(排淸服明), 존명사대 등 점점 더 비이성적, 비현실적 망상의 세계로 현실도피를 했다. 

조선의 양반 지도층들은 명을 칭할 때는 중국, 혹은 중조(中朝)·황조(皇朝)·황명(皇明)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청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그들의 머릿속에 든 ‘중국’은 명나라였을 뿐, 결코 청나라는 아니었다. 

“중원이 오랑캐 만주족에게 더렵혀진 현실에서 중화 문물을 간직한 나라는 조선밖에 없다. 중화문명의 적통이자 계승자는 만주족 오랑캐가 세운 청이 아니라 조선이다. 따라서 이 세상 유일의 문명국이요 중화국은 조선이다. 조선은 ‘소중화’의 나라다.” 

이것이 바로 조선 지도층의 현실 인식을 마비시킨 소중화 사상의 핵심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청’이라는 적대적 타자는 청이 망해 없어진 후, 일본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적대적 타자에 대한 저항과 거부, 반감은 한국인들의 강렬한 자주의식과 민족정서, 주체사상과 결합되었다. 그 결과 여차하면 반일감정에 휘말려 손에 촛불 들고 광화문 광장으로 뛰어나가 집단 광기를 일으키는 파시즘적 전체주의 멘탈리티를 구성했다. 오늘날 횡행하고 있는 親中 반일정서는 청나라가 망해 없어진 이후 반청정서를 고스란히 정서적으로 물려받은 것이다. 

3-2. 종족적 세계관의 샤머니즘적 기저

반일 종족주의의 형성에는 여러 가지 세계관적 요인이 있다. 종족 수준의 적대 감정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는 어떤 ‘세계관의 구조’가 한국인 자연관, 나아가 삶과 죽음의 원리에 내재해 있다. 다름 아닌 샤머니즘에 기반한 세계관이다.

돈과 지위가 모든 행복의 근원이라는 가치관, 그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동원리가 물질주의이다.  

돈과 지위가 모든 행복의 근원이라는 가치관, 그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동원리가 물질주의이고 샤머니즘이다. 이는 종족주의로 이어진다.

선과 악을 가름하는 절대자 신이 없는 샤머니즘은 이런 물질주의와 종족주의적 특성을 지닌다. 즉 샤머니즘에서 행위개체의 기본은 종족 또는 부족이다. 그런데 이 종족은 이웃을 악의 종족으로 감각한다. 이것은 객관적 논변이 허용되지 않는 불변의 적대감정이다(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 미래사, 2019.7.1.,20p). 

샤머니즘, 물질주의, 종족주의는 서로 깊이 통한다. 샤머니즘의 세계에서 양반은 죽어서도 양반이고, 종놈은 죽어서도 종놈이다. 이 같은 삶과 죽음의 연쇄에서 선과 악의 절대적 구분이나 사후死後 심판은 성립하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양반이 되는 것은 한 인간의 영혼이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그래서 양반 신분으로 승격하는 데 필요하다면 거짓말이든 돈이든 다 정당화되는 물질주의 사회가 성립하였다. 샤머니즘과 물질주의의 관련은 바로 이와 같다. 

3-2-1. 샤머니즘의 인간관 / 현세관 / 내세관 / 인생관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조상과 신령의 지배를 받는 이 땅의 샤머니즘적 인간관은 생자필멸의 법칙을 긍정하는 철저한 자연주의적, 현실적 인생관을 기초로 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사고의 발상이 살아있는 사람의 입장을 근거로 해서 전개된다. 삶의 현실만이 발상의 근거요, 중심이요, 기준이 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의 샤머니즘은 모두가 살고 싶은 욕구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욕구를 한마디로 물질적 복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이 땅의 샤머니즘의 모든 내용은 궁극적으로 되도록 많은 복을 얻어 삶을 풍요하게 하고, 그 삶을 파괴하거나 복을 잃게 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위협과 재화를 막자는 목적을 지향하는 심성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세에서 복과 장수를 누리려는 인간 존재의 영구지속을 위한 현세 중심 세계관이 한국인의 현세관이다. 

샤머니즘에서 보여주는 세계는 ‘이승’과 ‘저승’의 이원론적 구조다. 이승은 현실 세계이고, 저승은 영혼의 세계이지만 이들 세계는 엄연히 구별, 분리되는 것은 아니고 연속적이다. 이승과 저승을 ‘단절’이 아니라 ‘구분’으로, 나아가 저승을 이승의 연장으로 샤머니즘은 이해하고 있다. 

샤머니즘의 내세관에는 미래에 대한 종교적 구원 관념이 없고 자연적 의미를 갖는 형태로 나타난다. 샤머니즘의 내세관이 자연적 의미를 갖는 것은 샤머니즘 자체가 자연적 원시 종교 그대로, 체계화된 종교적 손길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내세관 역시 자연 그대로의 형태로 나타나 있다. 고등 종교의 내세관이 선과 악에 의한 이상향과 지옥으로 형태상의 이중적 구조를 갖는데 반해 샤머니즘의 내세관은 선악의 인위적 징계성이 채 부여되기 이전의 미분화된 자연적 단일구조를 갖는다. 

이 땅의 샤머니즘에서의 인간은 신령이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신령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간은 신령의 가호를 받으면서 자라나고 성인이 되어서는 신령의 도움으로 성공적인 삶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믿는다. 샤머니즘 신화에 따르면, 지상에는 원래 인간이 없었는데 ‘당금아기’라는 天界의 처녀신이 신승과 결혼해서 아들 3형제를 낳고 나서 후에 삼신할머니가 되고 아들 3형제는 3불제석(三佛帝釋)이 되었으며 이 삼신 할머니가 최초로 지상의 인간을 점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땅의 샤머니즘에서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되어 자연을 소유한다거나 자연을 지배하려는 의도는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 인간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 질서를 거역하려는 인위성도 없다. 사람은 자연 질서에 보다 잘 적응함으로서만 그 질서에 어긋나지 않는 일생을 살 수 있는 존재이다. 

모든 샤머니즘에서의사고는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사람의 입장을 근거로 하고서만 전개된다. 삶의 현실만이 발상의 근거요 중심이요 기준이 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샤머니즘의 교리는 살고 싶은 욕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욕구를 한마디로 ‘복’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많은 복을 얻어 삶을 풍요하게 하고, 그 삶을 파괴하거나 복을 잃게 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위협과 재앙을 막자는 심성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란, 자연 속에서 자연 질서에 의해 태어난 그 질서 속에서 자연처럼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자연적 삶을 중시하는 존재이며 우리의 샤머니즘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한국에 외래 종교가 도입되기 이전 한국 종교의 주류는 샤머니즘이었다. 특히 고대의 재정일치시대에 전 한민족이 거국적인 제의를 올렸기 때문에 전체 한국인이 샤머니즘 신자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전통은 삼국 시대 중엽까지 고대 한민족의 종족적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는데 기여해 왔으나, 삼국 말기부터 외래 사상이 유입되면서 샤머니즘은 퇴락하기 시작하였다. 

통일 신라 이후부터는 국가적인 행사인 제사의례가 조상숭배를 통한 혈족 내지, 가문의식으로 왜소화되고 공동체 의식 강화를 위한 종교 의례 또한 계층별로 이질화되었다. 고려 중엽 이후부터는 상류 지배 계층은 유교식으로, 평민층은 전통적인 무속 의례의 방식으로 자기네 집단 내지는 가문 중심의 조상숭배 제의를 계속해왔다. 

3-2-2. 토지기맥론(土地氣脈論)

외래 사상인 성리학은 조선의 전통문화와 상호작용하였다. 성리학은 전통문화를 억압하기도 했지만, 그에 제약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중국과 상이한 조선 성리학이 형성되었다. 성리학이 전통문화에 영향을 미친 한 가지 예가 토지기맥론이다. 

한국인의 자연관은 이런 토지기맥론을 근거로 한다고 이영훈 교수는 말한다. 즉 토지에 어떤 길하거나 흉한 기맥이 흐른다는 생각이다. 한국인은 전 국토를 하나의 신체로 감각한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간주하는 세계관을 반영하여 조선의 땅은 중국에 절을 하는 노인과 같은 모습이라고 했다. 

20세기엔 그 모습이 백두산을 정수리로 하는 호랑이의 모습으로 바뀐다. 그러한 신체적 감각은 어느덧 강렬한 반일감정의 원천으로 승화되었다. 또한 독도문제에도 어김없이 토지기맥론이 작용하고 있다. “독도는 우리 조상의 담낭”, “독도 바위를 깨면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라는 표현은, 우리가 심리적으로 마치 독도를 우리 몸의 한 부분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토지기맥론은 20세기에 들어 한국인을 하나의 민족으로 결속하는 문화적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신체적 감각은 어느덧 반일 감정의 원천으로 그 역할을 바꾼다. “일본아 후지를 자랑마라, 우리에게는 백두가 있다.”즉 백두산이 반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독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일본과의 독도분쟁이 개시되자 독도는 갑자기 반일 적대감정의 가장 치열한 상징이 되었다. 거기에도 어김없이 토지기맥론은 작용하였다.

¶글쓴이 : 정광제 이승만학당 연구원/한국근현대사연구회 고문

-성리학, 다양한 민족 문화와 접촉할 기회 차단. 현대에도 한국인 ‘우물 안 개구리’ 속성 개선 안돼

-노무현정부 이후 수면 아래 갈등 공공연히 드러내고 배타적 적대감정을 상대 공격하는 수단 삼아

-한국 민족주의, 중화사상의 화이질서와 샤머니즘이 특징. 종속과 혼돈, 부족주의의 ‘야만성’ 내포

이 글은 지난 7월 12일 필자가 이승만학당에서 강연한 ‘반일 종족적사고의 근원 고찰’ 발제문입니다. 필자의 허락을 받아 3회에 걸쳐 나누어 게재합니다. <편집자>

4. 종족사회의 현상들

“큰 피해가 우려됐던 태풍이 ‘다행히’ 일본으로 진로를 틀었습니다.”

TV 기상캐스터는 태풍이 한반도를 비켜 일본열도 쪽으로 방향을 바꾸자 ‘다행’이란 표현을 쓴다. 물론 한국에는 다행이지만 다른 나라에 큰 불행을 몰고 올 기상 뉴스에 대해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미국 일본의 한국 동포가 차별을 받았다면 모두들 흥분하지만 한국 내 화교나 제3세계 사람들이 받는 차별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 왜 한국인들은 유독 민족이나 핏줄 따위에 목을 매는 것일까? 이중적인 잣대로 세상을 보면서, 스스로는 제대로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일까?

한국의 교육에선 ‘5000년 역사, 단일민족’이란 개념이 강조되어 왔다. 다른 민족은 곧바로 적, 또는 침략자의 형태를 띠었을 뿐, 성리학은 여러 민족과 다양하게 접촉할 기회를 차단해 버렸다. 현대에 들어서조차 이 같은 ‘우물 안 개구리’ 속성은 개선되지 못했다.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다. 1970년대 학생들이 강제로 외워야 했던 국민교육헌장의 첫 구절도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고, ‘민족’이란 단어에 코끝이 찡해지는 감성적인 반응을 보이곤 했다.

종족주의의 세계는 외부에 대해 폐쇄적이며 이웃에 대해 적대적이다. 이에 한국의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반일 종족주의이다.

최빈국 시절에는 박정희 식의 이런 저급한 형태의 민족주의 혹은 국수주의가 통했다. 그러나 매년 결혼하는 커플의 10% 이상이 국제결혼이고, 외국인 노동자가 50만 명을 넘으며, 연간 1000만 명이 해외를 드나드는 것이 현실 속에서 1차원적인 종족주의는 국가발전의 저해요소일 뿐이다. 즉 물질과 몸은 커졌는데도, 정신은 여전히 종족주의적 세계관에 함몰되어 있다는 말이다.

갓난아이 때 스웨덴에 입양된 한 여류 작가는 한국을 다녀간 뒤 “한 핏줄임을 입증하려고 달려드는 한국인들의 태도에 대해 당혹스러웠다”고 고백했다. 미국 우주인 마크 폴란스키의 모계가 한국인 하와이 이민자였다는 가족 족보까지 대대적으로 보도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잘나가는 그 사람, 알고 보니 한국인”이라는 자기 최면적 반응들이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라고 반문한다.

이처럼 순전히 개인적 차원의 문제를 그가 속한 집단과 민족 혹은 국가의 문제로 확대 해석하는 게 한국인의 특징인 것처럼 깊어지고 있다.

근대 이전의 종족주의에 여전히 사로잡혀있는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니다. 대내적으로 보수와 진보, 영남과 호남, 종북 좌파와 자유우파 등으로 적대적 프레임을 만들어내었다. 대외적으로는 일본과 중국과의 적대 감정이 구축되고 있다. 이것은 나의 상대를 악으로 간주하는 세계관의 발로이다.

한국의 정치가 이러한 종족주의의 특질을 강하게 지닌 가장 좋은 예는 지역감정이다. 예컨대 매번의 대통령선거에서 호남은 하나의 종족으로 단결한다. 거의 90% 이상이 단일의 선택을 보인다. 대소 차이는 있지만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현상은 종족주의의 원리로 설명될 수밖에 없는 특수성이다.

노무현 정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국내외적으로 대립되는 세력들 간에는 어느 정도 대화가 기능하였다. 갈등의 소지는 그 당시에도 상존했으나, 서로 간에 상충되는 이해관계의 조정을 위해 갈등요소는 물밑으로 가라앉히거나 삭힐 줄 알았다.

그러나 배타적 적대감정은 노무현 정부 이후, 수면아래 있던 갈등을 공공연히 드러내놓고 상대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삼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벌써 대략 15년 전의 일이다. 이후로 적대시하는 두 세력들 간에는 갈등을 위한 갈등, 갈등을 위한 투쟁, 그리고 갈등을 위한 외교만 있을 뿐, 협력을 위한 대화와 토론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5. 나가는 말

한국 민족주의의 기저에는 소중화 사상에 입각한 화이질서와 샤머니즘이 있다. 배타적 소중화 사상은 역사가 멈춘 종속과 혼돈의 사상이다. 또한 한국의 민족주의는 종교이다. 문명 이전의, 야만(野蠻)의 종족 또는 부족의 종교이다. 그러나 그것이 문명시대, 곧 국가시대 이후에도 길게 이어져 왔다. 그래서 20세기에 성립한 한국의 민족주의는 종족주의의 특질을 강하게 띤다.

한국의 민족은 자유로운 개인의 우애공동체와 거리가 멀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종족주의의 신학이 만들어낸 반자유주의적, 전체주의적 마성의 권위이자 공포의 폭력이라고 이영훈 교수는 말한다. 종족주의의 세계는 외부에 대해 폐쇄적이며 이웃에 대해 적대적이다. 이에 한국의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반일 종족주의이다. 건국 71년, 그 사이 이 나라의 경제가 이룩한 높은 성과에 비해 이 나라의 정신문화는 낮은 수준에서 헤매고 있다. 다름 아니라 반일 종족주의가 바로 그 주범이다.

한국의 정치문화가 대외적으로 일본과의 관계에 이르면 더없이 거센 종족주의로 분출된다. 아주 오래전부터 일본은 원수의 나라였다. 반일 종족주의의 저변에는 그렇게 역사적으로 형성된 적대 감정이 깔려 있다. 이와 반대로 중국에 대한 적대 감정은 역사적으로 희박하였다. 그래서 반중 종족주의라 할 만한 것은 없다. 오히려 중국에 대해서는 조선이 그러했듯이 사대주의의 자세를 취하는 수가 많다.

반일 종족주의는 1960년대부터 서서히 성숙하다가 1980년대에 이르러 폭발하였다. 자율의 시대에 이르러 물질주의가 만개한 것과 공통의 추세였다. 반일 종족주의에 편승하여 한국의 역사학계는 수많은 거짓말을 지어냈다. 그 거짓말은 다시 반일 종족주의를 더욱 강화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정신문화는 그러한 악순환이었다. 그 사이 한국의 정신문화는 점점 낮은 수준으로 추락하였다고 이영훈 교수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