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메르 문명의 기원은 한국이다_김상일 박사
수메르 문명과 알타이어 연구의 권위자 김상일 박사의 특강 핵심입니다. 탱그리 신앙과 알타이 언어 연구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수메르의 기원에 대해 알아봅니다. [STB콜로키움 52회 수메르 문명의 기원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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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와 한국어와 관계에서 선행연구는 문정창 선생입니다. 1978년 그 무렵에 수메르 이스라엘 한국의 역사라는 책을 썼습니다. 또 가야사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분이 대영백과사전에 나오는 자료만 가지고 글을 썼다. 대영백과사전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고정된 내용만 적혀 있으니까, 대영백과사전만 가지고 하는 것이 좋지않냐 하는 변을 하고 있어요. 크래머의 책을 본 것 같은데, 대영백과사전에 있는 자료만 보더라도 한마디로 말해서 수메르의 기원은 한국이다 하는거에요. 사무엘 크레머하고 하는 아시죠. “역사는 스메르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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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수메르는 어디서 시작돼었냐. 수메르인들이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내려갈때는 이미 고도의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내려갔어요. 이미 어디에선가 가지고 내려갔단 말잉에요. 그러면 수메르의 기원은 어디인가?
카스피 연안에서 내려왔다. 이건 서양사람들이 (뿌리를) 구라파에 두고 남쪽에서 올라왔다고 생각하는거에요. 또 자고로스 산맥 그 북쪽에서 내려왔다. 이런 논란을 ‘수메리안 문제성(Sumerial problem)’, 이라고 합니다. 서로 탐스러워서, 왜 그러냐면 수메르가 자기꺼라면 자기역사가 가장 지구상에서 오래된 문명이 되니까, 서로들 언어학자들 종교학자들 역사학자들이 달려 들어서 수메르를 자기들 것과 동일시하는 연구를 하게되었구요. 가장 연구 많이 한 사람이 헝가리 사람인 것 같아요.
여기에 착안해서 문정창 선생께서 수메르는 한국에서 시작되었다. 너무 단독적으로 이야기했어요. 그 당시에 수메르인들이 BC 3000년경, 연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더라고, 지구상에서 수메르와 유사하게 고도로 동일하게 문자를 가지고 있던 곳은 어디냐 하면 만주 요하 일대이다. 요새 소위 말하는 홍산일대이고. 그 때 뭐냐면 만주 요하 일대에 있던 문명이 바로 누구냐면 소호금천씨다 하는거에요. 이건 아주 문정창 선생은 소호금천씨가, 아마 소호금천씨를 역사학계에서 역사인물로 취급도 안할거에요. 나중에 전욱(顓頊高陽)한테 망하지만.
소호금천(少昊金天)씨 일족이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유역, 메조포타미아, 즉 양강유역이라는거죠. 소호금천씨가 내려가서 정착한 곳이 구약성서에서 말한 에덴동산이라는데다. 하나님이 만드신 특별한 장소인 것 같지만, 문정창씨는 에덴동산씨라 하는곳은 소호금천씨가 처음내려가서 세운 나라라 할까, 영토라 할까. 소호금천씨 왕국이었다는거에요.
에덴(Eden)이란 말이 에딘(E-din)입니다. ‘에’가 한자로 말하면 '옥(屋)'이에요. 옥을 에로 읽는거에요. C. J 보리 발언이 한자 옥을 '에'로 읽는 것, 여기서부터 수메르와 중국말이 같다고 책을 방대하게 쓰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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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딘. 이게 바로 딩-기르. '딩기르'가 '딘그르', '딩그르'라는 말이 '탱그리'라는 말이에요. 수메르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어려하는 것이 하나 있어요. 수메르와 한국과의 관계를 연구할 때 방법론에서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거기에 근거에서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는거에요. 딩기르라는 말은 몽고어 '탱그리'라는 말과 같다.
요새는 인제 탱그리즘, 탱그리즘이라는건 뭐냐면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우주베키스탄이라든자, 투루크니스탄이라든지. 이쪽 심장지대 일대-지구상에서 하트에 해당하는-에 있는 나라들이 연방에서 탈퇴해서 나와서 맑시즘에 대응되는 무슨 새로운 이념으로 묶을거냐, 이게 탱그리즘이에요. 맑시즘 대칭되는 것이 탱그리즘이라는 말이에요. 탱그리라는 말이 중앙아시아 심지어 구라파까지 널리 퍼져 있는말이고, '탱그리'라는 말이 두말할 것없이 '하늘에서 가장 높은 신'이라는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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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뭐냐면 단군이라는 말이 어디서 유래하냐. 이것도 또 국내학자들이 다 동의하는 말이에요. 단군이라는 말은 ‘댕그리’에서 유래했고, ‘댕그리’는 ‘탱그리’에서 유래했다. 지금도 호남 일대에 가면 무당을 ‘당골레’라고 해요. 이것도 의문의 여지 없이 합의를 보고 있고, 이것도 의문의 여지 없이 합의를 보고 있고. 학자들이 동의(agree)하는 바에요.
꼭 몽고에 탱그리즘 치면, 상당히 박사학위급 논문도 여러편 나와 있어요. 그것은 맑시즘 이후에 탱그리즘, 그런 시각에서 이야기하고 있고, 단군하고 연관하고 있는것도 있는데. 수메르의 딩기르하고 연관시키고 있지는 않는 것 같아요. 일반 학계에서 하는 시도를 이어받아서 넘어서는 방법은 이 셋을 연결시키는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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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러니까 1987년도에 '인류문명의 기원과 한'에서 수메르와 한국어의 관계에서 3가지 관점에서 봤어요. 첫 번째가 고산숭배, 두 번째가 모계사회의 전통, 세 번째가 수메르언의 수사(數詞). 하나하나가 굉장히 연구주제가 되겠습니다만 지금 그때는 탱그리즘 가지고 엮지는 못했어요. 지금 더 확고한 근거 방법론에 있어서 이렇게 연결시켜 나가면 수메르 이스라엘 한국과의 관계를 연결시키는데 있어서 국제적으로도, 국내 안에서도, 인정받는 방법론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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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서적
- 인류문명의 기원과 한 (김상일)
http://www.yes24.com/Product/goods/67485545
-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사무엘 크레이머)
http://www.yes24.com/Product/Goods/59432923
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장군의 삶 살펴보기, 10분 정리
일제강점기 독립군 최대의 전투였던 봉오동 대첩과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 대한 독립과 한민족 역사정신 회복을 위해 가장 처절히, 마지막까지 싸웠던 장군의 장렬한 삶을 통해 항일독립전쟁의 위대한 역사를 복원합니다.
[프로그램: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 항일독립전쟁의 살아 있는 전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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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눈으로 역사를 보는가
역사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각자의 사관과 역사의식 등에 따라 우리 역사학자들의 관점도 다양하다. 스스로 재야학자로 부르는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도 기존 학계와는 색다른 시선으로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학자 중 한 사람이다. 서울신문은 ‘새롭게 보는 역사’라는 제목으로 우리 역사에 대한 이 소장의 새로운 해석을 매주 1회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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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장수왕이 부친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것이지만 앞부분은 시조 추모왕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실려 있다. (권태균씨 제공)
역사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데, 역사공부에 왕도란 없다. 1차 사료를 많이 보고, 그 의미를 깊게 생각하는 것뿐이다. 1차 사료란 그 시대에 쓰인 사료를 뜻한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현장을 답사해서 사료와 현장 사이의 연결점을 찾는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즉 역사관이다. 역사관은 그 종류가 많아 보이지만 크게 나누면 둘이다. 나의 눈으로 보는 역사관과 남의 눈으로 보는 역사관이 그것이다. 누구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 팔레스타인을 유대인의 시각으로 보느냐, 아랍인의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역사를 보는 관점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규보(李奎報·1168~1241)와 김부식(金富軾·1075~1151)의 눈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둘 다 고려인이고, 유학자였다. 김부식은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남겼고, 이규보는 ‘동명왕편’(東明王篇)을 남겼는데, 김부식은 유학자의 관점으로 ‘삼국사기’를 썼다. 공자가 ‘춘추’(春秋)에서 천명한 유학의 역사관이 유학의 역사관이다. 공자는 주(周)나라를 정통으로 보고 ‘춘추’를 서술했는데, 이것이 춘추필법(春秋筆法)이다. 주나라를 임금의 나라로 보고 나머지는 신하의 나라인 제후국이나 오랑캐로 보는 역사서술이다. 여기에서 중국 한족(漢族)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중화(中華) 춘추사관이 나왔다.
그런데 김부식·이규보처럼 몸은 한족(漢族)이 아니지만 유학자의 시각으로 역사를 보는 경우이다. 이족(夷族)의 몸에 한족(漢族)의 눈을 가진 유학자들이 탄생한 것이다. 김부식은 사마천의 ‘사기’를 본뜬 기전체(紀傳體)로 ‘삼국사기’를 썼는데, 기전체가 바로 춘추필법의 역사서다. 황제의 사적인 ‘본기’(本紀), 제후의 사적인 ‘세가’(世家), 신하의 사적인 ‘열전’(列傳) 등으로 나누어 쓰는데 이민족의 역사는 열전에 서술하기 때문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삼국 임금들의 사적을 ‘본기’(本紀)라고 불렀지만 실제 내용은 제후들의 사적인 ‘세가’(世家)에 준해 편찬했다.
이규보도 공자의 제자를 자처한 유학자였다. 이규보는 고구려 시조 추모왕(동명성왕)의 이야기를 담은 ‘동명왕편’을 썼다. 이규보는 그 서문에서 “세상에서는 동명왕의 신이(神異:신기하고 이상)한 사적에 대해서 어리석은 남녀들까지도 많이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고려 사람들이 고구려 시조의 신이한 사적에 대해 많이 말한다는 것은 고려를 고구려의 후신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동명성왕이 고려의 개국시조고 왕건은 중시조로 여겼다는 뜻이다. 이규보는 이를 듣고 웃으면서 “스승 중니(仲尼·공자)께서는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동명왕의 이야기는 실로 황당하고 기괴한 이야기라서 우리들(유학자들)이 이야기할 바가 아니다”라고 믿지 않았다. 공자는 “괴력난신(괴이한 것과 용력과 패란과 귀신)에 관한 것은 말하지 않았다(논어 ‘술이(述而)’)”라고 말했는데, 이를 따라 동명성왕의 신이한 사적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던 이규보는 명종 23년(1193)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읽어 보게 되었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구삼국사’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참고했던 책이다. 그런데 이규보가 본 ‘구삼국사’는 “(동명성왕의) 신이한 사적이 세상에서 말하는 것보다 더해서 처음에는 믿지 못하고 귀(鬼·도깨비)나 환(幻·허깨비)의 이야기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규보는 “세 번을 반복해서 탐미해 점점 그 근원에 들어가니, 그제야 환(幻)이 아니라 성(聖·거룩함)이요, 귀(鬼)가 아니라 신(神·신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세 번을 탐미하자 고구려 시조사를 바라보는 역사의 눈이 달라졌다는 뜻이다. 그러자 도깨비, 허깨비의 이야기가 아니라 거룩한 사적이고 신령한 이야기로 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명왕편’을 썼다는 것이다. 이규보는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이런 내용들을 빼놓은 것을 비평했다.
“김부식 공이 국사(國史)를 다시 편찬할 때 자못 이런 기사를 생략한 것은 국사는 세상을 바로잡는 책이니 크게 기이한 사적을 후세에 보일 수 없다고 해서 생략한 것이 아니겠는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이규보가 본 ‘구삼국사’의 내용과 달리 동명성왕의 신이(神異)한 사적들을 생략했다는 것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시조 동명성왕이) 재위 19년(BC 19) 가을 7월 승하하니 마흔 살이었다. 용산(龍山)에 장사 지내고 시호를 동명성왕이라고 했다”고 썼다. 그러나 이규보는 ‘동명왕편’에서 “왕이 하늘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았으니 나이가 마흔 살이었는데, 태자가 남긴 옥 채찍을 용산에 장사 지냈다”고 썼다.
김부식은 동명성왕이 마흔 살 때 세상을 떠났다고 썼지만 이규보는 “하늘로 올라갔다”고 달리 쓰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인들이 직접 쓴 ‘광개토대왕릉비문’은 어떻게 쓰고 있을까? ‘광개토대왕릉비문’은 “왕이 세상의 지위를 즐기지 않자 황룡이 내려와서 왕을 맞이했는데, 홀본(忽本) 동쪽에서 용의 머리를 밟고 하늘로 올라가셨다”라고 말하고 있다.
고구려인들의 시각에서 쓴 ‘동명왕편’, 즉 ‘구삼국사’와 ‘광개토대왕릉비문’은 모두 추모왕이 세상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하늘로 승천했다고 쓰고 있었다. 이규보는 ‘동명왕편’ 서문에서 “이를 시로 지어 기록함으로써 아국(我國)이 본래 성인(聖人)의 나라라는 것을 천하에 알리려는 것”이라고 끝맺었다. 유학자의 눈에는 중국 개국군주들의 사적만 성인(聖人)의 사적이었는데, 고구려인의 눈으로 보자 동명왕의 이야기도 나라를 개창한 성인의 사적으로 보인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 ‘고조 본기’에서 한 고조 유방(劉邦)의 모친 유온(劉?)이 대택(大澤) 언덕에서 잠잘 때 꿈에 신을 만났고, 교룡(蛟龍)이 그 몸 위에 올라와 유방을 낳았으며, 적제(赤帝)의 아들이라고 썼다. 유방 부모의 신분이 낮은 것을 감추려 한 것이다. 또 유방이 있는 곳의 하늘에는 늘 운기(雲氣)가 서려 있었다는 등의 황탄한 이야기를 잔뜩 써 놓았지만 중국의 역대 주석가들은 그 의미를 분석하고 덧붙였지 황탄하다고 비판하지 않았다.
유독 우리나라 학자들만 자국사에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 깎아내리는데 그 근본 이유가 남의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이 나라는 역사학자들과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일반 국민들 사이의 괴리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가 되었다.
때로는 중국인의 시각으로, 때로는 일본인의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본다. 모두 자국사를 환(幻)과 귀(鬼)로 보는 것이다. 그러니 국조(國祖) 단군(檀君)의 사적을 신화라고 깎아내리기 바쁘다. 이규보가 역사를 보는 눈을 바꾸자 환(幻)과 귀(鬼)가 성(聖)과 신(神)으로 보였다. 우리 사회가 중심이 없고 혼란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역사관이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체는 세계 10위권 경제로 성장했지만 정신은 유아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 성(聖)과 신(神)의 역사관으로 나 자신을 찾을 때가 되었다.
■사학자 이덕일 소장은
숭실대 대학원에서 ‘동북항일연군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사학자다. 식민사관을 비판하고 한사군이 한반도가 아닌 현재 중국의 영토에 있었다고 주장해 학계에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많은 부분에서 기존 역사학계와 다른 시각에서 우리나라 역사를 바라보고 해석한다. 이 소장의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마찬가지로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 또한 많다.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누가 조선왕을 죽였는가’,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등 수십권의 저술과 저서가 있다. 조만식숭실언론인상을 받았고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를 창립해 활발한 연구,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STB 상생방송 대한독립 운동사
<국학연구소 연구원, 前 인하대학교 연구교수, 중국 연변대학교 역사학박사 임찬경 박사 강의 편집>
1910년 국망 이후 독립운동 역사가들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에게 참역사가 없었기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신채호, 박은식을 비롯한 독립운동 역사가들은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에 의해 말살되고 왜곡된 참역사를 되찾기 위해 역사 연구와 현지답사를 통하여 우리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노력하였고 이 역사를 바탕으로 독립의 힘을 키우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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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의 역사정신
독립운동과 역사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독립운동가 이상룡, 박은식, 유인식, 김교헌, 이시영, 김승학, 김창규, 신채호, 계봉우 이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이면서 역사를 연구하고 직접 역사책을 저술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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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들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우리민족의 역사, 특히 우리민족의 고대사와 관련된 문제들을 아주 심도있게 써내려간 책들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역사를 특별히 중시 했습니다. 목숨을 건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역사를 연구하고 저술했는데요. 독립운동가들이 국외에 망명해서 어느지역에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게 되면 거기에 역사책을 만들고 그 책으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면 신흥무관학교는 독립운동을 위해 세운 학교인데요. 거기서 가장 중요시한 과목이 바로 역사입니다. 역사를 가르쳐서 독립운동의 큰 동력을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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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역사를 중요시한 독립운동가들은 망명할 때 역사책을 가지고 갔다는 일화들이 많이 전해집니다. 많이 알고 계시는 신채호 이분은 1910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하게 되는데요. 그때 가슴에 소중하게 지니고 간 책이 조선후기 안정복이 단군조선부터 고려말까지 다룬 역사책 동사강목(東史綱目)입니다.
1911년 1월에 망명한 이상룡이란 분은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땅에 도착하는 그 어려운 망명의 과정에 서점에 들려 만주지지 등 역사를 연구할 수 있는 책을 구입하여 본격적인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그다음 윤세복이란 분이 계시는데요. 이 분은 망명해서 지금의 중국 압록강 중류 일대에 환인이란 지역에 정착하게 되는데요. 이 분 집에는 엄청난 양의 역사서적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역사서적을 가지고 박은식, 신채호 이런 분들이 역사를 연구해서 훌륭한 책들을 쓰게 됩니다.
이렇듯 독립운동가들은 역사를 중시했고,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저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독립운동
독립운동가들에게 역사란 어떤 의미가 있기에 이렇듯 역사를 중요시했던 것일까요? 독립운동가들에게 역사 연구 및 저술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중요한 독립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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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대외적으로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는 유력한 사상적 무기입니다. 두번째 대내적으로는 반민중적, 반민족적 봉건세력을 비판하여 해체시키는 문화 도구입니다. 세번째 민족 성원을 각성시켜 독립운동 전선에 나서게 하는 교육과 선전의 핵심입니다. 네번째 목숨까지 바쳐서 건설하려는 독립된 자주 국가를 건설하는 청사진이 담긴 것입니다.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은 조선시대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 반성 중에 가장 큰 것이 우리 역사가 조선시대에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다. 이런 반성을 하게 됩니다.
고려 중기 이후부터 조선시대를 거치며 사대사관에 의한 우리 민족사의 왜곡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는데요. 신채호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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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어려운 상황은 우리민족에게 역사가 올바로 정립되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참역사가 없는 이런 상태가 우리 민족을 어렵게 만들고 일제 식민지로 만들어 가는게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당시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시점에 많은 분들,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생각했습니다. 과연 우리가 무슨 문제인가? 일본이 지나치게 잘났기 때문에 우리가 식민지로 전락한 것인가? 이런 문제를 생각한 끝에 우리에게도 문제가 있었다는 결론을 내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 중요한 것은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을 위해서, 독립운동을 조직하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했는데요. 그런데 독립운동을 누가 하나요. 바로 이땅의 많은 사람들이 해야 하죠.
그렇게 되려면 우리함께 독립운동을 하자고 얘기하고, 사람들을 깨우쳐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 되겠죠. 그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역사를 알려줘서 우리민족이 어떻게 살아왔고 우리민족은 이런데 현재 지금은 이렇다. 우리민족은 어떻게 나가야 된다. 이렇게 싸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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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을 올바로 알고. 자신을 알고. 뭔가 뭉쳐서 싸울 수 있는. 자주적으로 만들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 되는데 이것을 역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은 우리역사를 어떻게 서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기존의 역사를 돌아 봤습니다.
그랬더니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주위에서 찾은 우리역사는 참다운 역사가 없었습니다. 조선이란 시대속에서 우리역사는 너무 많이 왜곡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이 볼 때 조선시대에 나온 역사책들은 하나도 가치가 없다는 겁니다. 이 역사책들을 우리민족 구성원들에게 얘기해 줘봐야 우리민족이 자존심을 가질 수도 없고, 우리민족의 역사를 제대로 알 수도 없는 겁니다.
이런 역사를 가르쳐봐야, 이런 역사를 알고서는 이 어려운 시기에 독립운동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는 겁니다. '조선에 참 조선사가 없다' 이런 상황을 인식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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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상황은 일제에 의해서는 오히려 이용당했습니다. 일제는 사대사관을 이용하여 식민사학을 만들어 내는데요. 조선시대 사대사관으로 왜곡된 역사를 한층 더 왜곡시킵니다. 일제가 단시간에 식민사관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데는 사대사관이 있었습니다.
식민지 역사로 왜곡시키고 우리 역사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데 거기에 쓰인 것이 식민사관이고 그렇게 만들어진것이 식민의 역사, 식민사학입니다.
일제는 이렇듯 조선에 참 조선사가 없는 그런 시대상황을 오히려 악용, 조선고대사를 왜곡하고 조작하여 일제가 조선민족을 문화적으로 영구히 지배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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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사대사관, 일제가 만든 식민사관, 이것이 바로 그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발견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은 우리가 독립을 위해선 우리의 참역사를 가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먼저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을 동시게 극복하지 않고는 우리역사를 바르게 서술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합니다.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우리 참역사를 정립하는 역사운동 이 자체가 바로 독립운동인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역사를 바로 쓰는 그 작업이 선행되지 않으면! 우리의 독립운동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에게 이 역사 연구 자체가 또 하나의 중요한 독립운동이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나서야 할 때
그렇다면 2019년의 오늘 날은 어떨까요. 광복 74주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오늘. 독립운동가들의 역사, 그 정신이 제대로 계승되고 있을까요? 안타깝지만 아직도 사대사관, 식민사관에 의해서 만들어진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 독립운동가의 역사서술은 묻히고 식민사관은 그대로 존속 되었습니다. 청산되어야 할 역사적 적폐는 소위 '통설'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사회 역사학계를 장악했습니다. 지금 학국사회의 역사학계는 조선시대의 사대사관과 일제강점기의 식민사관 등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채, 그 적폐들을 심화시켜 기형적인 모습으로 오히려 우리 역사의 정립(正立)을 오히려 방해하는 주범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 한국 학계에서는 독립운동가의 역사학, 역사 정신을 총체적으로 민족주의 역사학, 민족주의 사학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용어에는 세심히 살펴봐야 할 심각한 함정이 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민족주의란 이름을 붙여서 오히려 독립운동을 위해 서술했던 역사의 특성이라던가 계승해야 될 여러가지 장점들을 사회속에서 오히려 잊혀지게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민족주의 사학이라는 용어는 독립운동가들이 만든게 아니고 학계에서 만들어낸 용어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살아 계셨다면 자신의 역사학에 민족주의사학 이렇게 붙이는걸 결코 원치 않으셨을 텐데요.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을 위한 방법론으로 '침략적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저항적 민족주의'를 선택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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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민족주의는 수단 혹은 방법이지 독립운동가들의 궁극적 목적이 민족주의가 아니었습니다. 민족주의 선택의 궁극적 목적은 독립운동이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의 역사연구, 역사 결과들은 민족주의사학이 아닌 독립운동사학으로 불러야 합니다.
또 다른 이유로 시간이 지나면서 민족주의의 부정적인 면을 사회에서 부각시킵니다. 우리민족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나쁘게 표현할 때 쓴다던지, 민족주의를 가진 사람을 오히려 이상하게 보는 시각을 가지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얘기하면서 '민족주의사학'이란 이름으로 이 독립운동가들의 역사학을 사회에서 조명되지 못하게, 빛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민족주의사학이란 용어대신 독립운동사학으로 불러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독립운동가들의 역사는 독립운동사학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연구, 서술했던 역사, 역사정신을 되돌아 보고 더 나아가 그 정신을 계승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을 청산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며 우리민족의 올바른 역사를 정립해야 합니다. 이제는 때가 됐습니다. 잘못된 역사를 극복하고 우리에게 과제처럼 남겨진 우리 역사 바로쓰기.
이제는 우리가 역사광복군으로 나서야 될 때입니다.
조선시대 때 매년 입춘이 되면 경복궁 내에 있는 관상감(천문, 지리, 기상을 기록하던 관청)에서 ‘신도(神茶)’ ‘울루(鬱壘)’ 라는 도깨비 이름을 빨간 글씨로 써서 문설주에 붙였다.
아래 그림은 퇴계 이황의 종택 대문으로 '신도 울루'를 써서 붙이고, 작은 글씨로 문신호령(門神戶靈), 가금불상(呵禁不祥)을 써서 붙였는데 이는 “신도와 울루라는 대문을 지키는 신과 집의 영이 있으니, 불길한 것을 꾸짖어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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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의 종택 대문. 도깨비 이름 신도, 울루라고 써서 안좋은 기운이나 잡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
아주 오래전부터 도깨비는 귀신을 쫓는 신이었기 때문이다.
대만이나 중국에서도 대문에 신도 울루 그림을 붙여놓기도 한다. 또한 복숭아 나무가 귀신을 쫓아내기 때문에 복숭아 나무에 신도와 울루를 새겨서 가지고 다니기도 한다.그런데 왜 도깨비는 귀신이 무서워하는 신이 되었을까? 그 이유는 치우천황과 황제헌원의 탁록대전에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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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도깨비 문고리. 신라 왕실의 별궁이었던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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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 때 흔했던 도깨비 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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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에서 발행한 신도울루 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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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나무에 새긴 신도울루. 부적처럼 가지고 다녔던 신도울루 명패를 자세히 보면 도깨비가 위에 있고 사각의 판에 신도울루의 모습과 글자를 새겼다.)
“도깨비가 귀신을 물리치게 된 유래와 도깨비의 실체”
‘서울의 숲’으로 변한 뚝섬에는 그 유래를 설명하는 표지석이 있다. 뚝섬은 조선시대 때 큰 비가 오면 일시적으로 물길이 생겨서 섬처럼 보였던 곳인데, 뚝섬에는 치우천황 사당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사당을 치웠다는 이야기가 있기도 하며 큰 홍수로 유실 되었다고도 한다.
그 후 일제는 치우사당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 말을 키우는 장소로 사용했고 얼마 전까지 경마장이 있었다.
뚝섬은 본래 둑섬이라 불렸는데, 치우천황 사당에 둑기가 걸려 있어서 둑섬이라 했다. 사당 내부에는 치우천황과 중국의 황제헌원이 10년간 전쟁을 했던 탁록대전 벽화가 있었다고 한다.
탁록대전은 배달국 14대 자오지 환웅천황(치우천황)과 중국의 시조라 하는 황제헌원이 중국 탁록에서 10년간 73번 전쟁을 했는데 치우천왕이 전승을 했던 대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귀신을 부리는 황제헌원은 귀신부대를 동원했고, 도깨비왕이었던 치우천황은 도깨비 부대를 운영했다. 황제는 곤륜산 근처에서 우연히 백택이라는 동물을 만났는데 호랑이를 잡아먹고 살며 사람의 말을 잘했다. 황제는 그 백택이 알고 있는 귀신을 다루는 방법을 배웠는데 귀신의 종류가 11,500개가 넘었다.
치우천황은 이매, 망량, 신도, 울루와 같은 도깨비를 동원했다. 10년간 73번 싸운 탁록전쟁에서 신통한 도깨비들이 항상 귀신들을 이겼기 때문에 도깨비는 귀신을 이기는 존재가 되었다. 이런 전통이 도깨비를 부적처럼 여기게 되어서 오늘 날까지 전해진 것이다.
치우는 청동기 시대에 철제 무기를 발명한 군신이자 전쟁의 신으로 고대세계에서 매우 추앙을 받았다.
한서(漢書) 지리지(地里志)에 따르면 치우천황의 능은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 궐향성에 있으며 높이는 7장이라 한다. 진한(秦漢) 시대의 주민들은 항상 10월에 제사를 지낼 때면 반드시 진홍색 비단 같은 붉은 기운이 뻗쳤다고 한다. 이를 치우기(蚩尤旗)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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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한국조폐공사에서 발행한 치우천황 기념화폐)
매년 둑섬에서는 군신인 치우천왕에게 국가제례인 둑제(치우제)를 올렸다. 큰 환란이 있을 때는 사당에서 정체모를 붉은 연기가 피어올랐다고 한다. 이것을 치우의 깃발, 치우기(蚩尤旗) 또는 둑(纛 :독으로도 읽음)이라 했다. 치우사당에는 소의 꼬리털로 만든 둑기(치우기)가 항상 새워져 있었다. 그래서 둑도, 독도로 불리다 뚝섬이 되었다.
아래는 조선시대 정조대왕의 화성능행도 8폭 병풍중에 한양으로 내려오는 행렬도의 일부분인데, 행렬 앞쪽에 치우기(둑기)가 그려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삿된 기운을 물리치는 전쟁의 신이기 때문에 왕이 행차를 할 때 항상 같이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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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 화성능행도 8폭병풍 중 한양으로 귀환하는 행렬의 일부분. 붉은 둑기(치우기)가 용 깃발 앞에 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도 군신인 치우천황에게 3차례의 둑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거북선의 전면 아래 부분에 도깨비(치우) 형상을 붙여서 왜군의 배와 충돌할 때 충격을 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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둑신제는 중국의 여러 왕조에서도 행했었다. 한(漢)나라를 새운 유방도 치우천왕을 군신(軍神)으로 받들어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 반드시 사당에 들러 제를 올렸다.
몽골의 칭기즈칸도 둑기를 사용했는데 원정을 다니던 칭기즈칸은 이동식 집인 게르 앞에 9개의 둑기를 세웠다고 한다.
칭기스칸은 자신을 주둑(독)으로 하고 그 밑으로 9개의 부족을 합쳤기 때문에 9개의 둑을 사용했다. 지금도 몽골의 정부청사 앞에는 9개의 기가 걸려 있는데 평시엔 흰색을 사용했으며 전쟁 때는 검은색 기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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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의 둑기. 가운데 큰기는 칭키즈칸의 부족을 상징하며 나머지는 연합한 부족의 둑기이다.)
도깨비는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으로 내려오는 동안 궁전이나 국가제례뿐만 아니라 민속에도 꾸준히 등장하는 문화이다. 지역마다 도깨비를 부르는 이름도 다양하고 문화도 다양하다.
아래는 황해도에 있는 고구려 안악3호분 무덤의 주인이 들고 있는 부채에 도깨비가 새겨져 있다. 상나라 주나라에서도 도깨비 문양을 새긴 화로를 널리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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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가 그려진 부채를 들고 있는 고구려 안악3호분 무덤 주인. 그림에는 없지만 무덤을 떠받치는 기둥머리도 도깨비로 장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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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도깨비 모양의 화로. 불을 좋아하고 불을 잘 다루는 도깨비이기 때문에 화로의 모양은 도깨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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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 도철문 화로)
도깨비는 동아시아는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 네팔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리고 유럽에서도 흔하게 사용했으며 중남미에서도 발견이 된다. 일본 역시 전쟁의 신이 었던 치우천황의 분신인 도깨비를 전쟁의 수호신으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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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장군의 투구에 올려진 전쟁의 신 치우. 비엔나 무기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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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비엔나 무기박물관에 있는 방패에 6개의 도깨비가 있다.)
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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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펭수
출신 : 남극
나이 : 10살(2020년이니까 11살인가?)
직업 : 자이언트 펭TV (인기)크리에이터, EBS연습생
인맥 : 매니져, 김명중(EBS사장님)
매력포인트 : 포커페이스 귀여운 외모에 힙 스웨그, 대선배 뽀로로 앞에서 당찬 멘탈
이 글은 대한민국의 소수 성씨 팽씨에 대해 알아보는 글입니다.
최근 ebs 연습생 펭수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EBS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자이언트 펭TV》에 등장하는 펭귄인데 펭수는 '남극 펭'+빼어날 '수'(秀), Pengsoo)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실제 팽씨가 있습니다. ‘어이’의 펭씨는 아니고 ‘아이’ 팽씨입니다.
실제 처가댁 조카가 팽씨인데 학교에서 희귀성씨라서 그런지 적지 않게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습니다. 뽀로로가 펭귄이라고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뽀로로의 성공을 보고 BTS 같은 글로벌 스타가 되고 싶어 한국에 왔다는 펭수가 나오자 조카들은 더 큰 자신감을 얻은 것 같더라고요.
펭수는 남극펭이라고 했는데, 실재 역사속에 팽씨는 용강 팽씨와 절강 팽씨가 있습니다. 둘다 중국계 귀화성씨로 알려져있는데요. 정말 그런지는 뒤에 얘기하겠습니다.
용강 팽씨는 고려 의종 때 팽적(彭逖)이 시조라고 합니다. 팽적은 금릉 출신으로, 노국대장공주를 배종하여 들어왔다고 한다. 용강은 현재의 평안남도 룡강군. 남한의 2000년 인구는 795명입니다.
한편 절강팽씨는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조선에 온 명나라 장군 팽우덕(彭友德)의 후손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덕은 아들 신고(信古)와 함께 많은 전공을 세웠는데, 그 후손들이 조선에 귀화하였다고 합니다. 남한의 2000년 인구는 1,578명입니다. 중국 저장성을 한국어로 독음하면 절강이 됩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팽씨역사인데 환단고기 기록을 보면 놀라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히려 다른 성씨보다 오래되고 유서깊은 성씨로 기록돼있습니다.
환단고기 해제를 보면
“5,700여년전 배달국의 5세 태우의환웅은 아들 열둘을 두셨다. 이 5세 환웅의 막내아들이 바로 태호복희이다. 복희씨는 신시에서 출생하여 우사 관직을 세습하였고 그리고 풍산風山에서 살게 되어 성을 풍씨로 하였다.
인류최초의 성씨인 풍씨는 뒤에 패佩, 관觀, 임任, 기己, 포庖, 이理, 사姒, 팽彭이라는 여덟가지 성으로 갈라졌다. 풍씨 성은 15대 만에 끊어지고 다른 성씨로 분파되었다. 뒤에 배달국 혈통인 신농씨가 강수에서 태어나 강씨 성을 썼다. 따라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성씨는 강姜씨이다.”
위씨, 팽씨는 모두 풍씨에서 나온 전욱의 후예라고 했다.《당세계표》
이 내용은 인류최초의 성씨 풍씨가 여러 성으로 분파되는 과정에서 팽씨가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희귀성씨고, 귀화한 성씨로만 알았던 팽씨가 이렇게 오랜 역사와 배경을 가졌던 것입니다.
배달국을 이은 단군조선시대에도 팽씨로 볼수 있는 기록이 <단군세기>에 나옵니다. 초대 단군왕검께서 임금님이 되신지 50년 됐을 때 큰 홍수가 발생합니다. 이는 중국의 9년홍수사건으로도 널리 알려진 동북아시아에 실제 있었던 홍수입니다.
■동방의 대홍수 사건과 마리산 참성단의 유래
재위 50년 정사(단기 50, BCE 2284)년에 홍수가 범람하여 백성이 편안히 살 수 없게 되었다. 왕검께서 풍백風伯 팽우에게 명하여 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높은 산과 큰 하천을 잘 정리하여 백성이 편안히 거처하게 하셨다.
우수주牛首州에 이 내용을 기록한 비碑가 남아 있다.(여기서 우수주는 지금의 속말강涑沫江(송화강) 남쪽에 위치한 만주 길림성 지역으로 추정된다(『규원사화』).)
재위 51년 무오(단기 51, BCE 2283)년에 왕검께서 운사雲師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혈구穴口7)에 삼랑성三郞城 을 건설하게 하시고, 마리산摩璃山 에 제천단을 쌓게 하시니 지금의 참성단塹城壇이 곧 그것이다.
재위 67년 갑술(단기 67, BCE 2267)년에 왕검께서 태자 부루扶婁를 보내어 우순虞舜(순임금)이 보낸 사공司空(우禹를 말함) 과 도산塗山에서 만나게 하셨다.
태자께서 ‘ 오행의 원리로 물을 다스리는 법[五行治水之法]’을 전하시고, 나라의 경계를 살펴 정하시니 유주幽州·영주營州 두 주가 우리 영토에 귀속되고, 회수와 태산 지역의 제후들을 평정하여 분조分朝 를 두어 다스리실 때 우순을 시켜 그 일을 감독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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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핵심은 단군조선초기 홍수로 인해 벌어진 나라의 위기를 풍백 팽우에게 명해 다스리게 하셨다는 겁니다.
여기서 팽우가 팽씨성인지는 논란이 있을수 있지만 다른 비교자료를 찾을수 없어 팽씨성으로 보고 정리해보겠습니다. 팽우는 풍백風伯이라는 관직명으로 1대 단군왕검을 보필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風伯之立約, 雨師之施政, 雲師之行刑”(풍백지입약,우사지시정,운사지행형)이라 했는데, 풍백(입법관), 우사(행정관), 운사(사법관)는 신교의 삼신사상을 국가 통치 조직의 원리로 이화理化하여 만든 배달국 시대의 관직명입니다.
이 3백伯은 계획-조직-통제로 파악하거나, 조화-교화-치화의 3화化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천지인天地人 3신神에서 나온 것이다(이강식,『한국고대 조직사상사』, 280-281쪽).
이 신시 시대의 조직은 그 후 단군조선 시대에 내려와서 삼신의 우주관인 천일, 지일, 태일의 정신을 기초로 하여 진한, 번한, 마한의 ‘삼한관경제’와 ‘삼경 제도’로 발전되었습니다.
현대의 정치제도에 비교해보면, 풍백은 입법관(立法官)으로 지금의 국회의장에 해당하고, 우사는 행정관(行政官)으로 국무총리에 해당하며, 운사는 사법관(司法官)으로 대법원장에 해당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초대 단군임금님때의 입법관이 다름아닌 팽씨였다는 것은 희귀성씨로 역사속에 유명한 사람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던 팽씨가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높은 계층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강화도 마리산에 제천단인 참성단을 쌓아 천제를 올리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으니 당시 풍백 팽우는 지금의 펭수 이상의 유명세를 가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조카들아! 성씨에 자긍심을 가져라^^
계속해서 기록을 보면 단군세기, 황후와 주요 신하 편에 보면
"단군왕검께서 어명을 내려 팽우彭虞에게 토지를 개간하게 하셨다“(『단군세기』)
처가댁에서 재능이 많은 조카들을 어떻게 키울까 얘기하던 중 저는 이 기록을 보고 아이들을 부동산쪽으로 가르쳐 보시는게 어떠냐고 제안을 해봤습니다.^^
단군왕검께서 풍백 팽우에게 명하여 물을 다스리게 한 사실은 『단군세기』 외에 홍만종洪萬宗의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과 이종휘李種徽의 『동사東史』에도 전합니다.
펭수는 최근 유산슬과 만나서도 자신감있는 토크와 재치있는 언변으로 대세임을 다시 한번 증명했습니다. 볼때마다 조카들이 생각나고 기뻐하고 있을 모습이 떠오릅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 더 나아가서 환단고기 역사문화속에 팽씨성의 등장과 역할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펭수는 유튜브 자이언트 펭TV로 대세가 됐습니다. 팽우는 단군왕검을 보필한 풍백으로 실존역사속의 원조 대세였던 것입니다.
펭하로 시작한 이 글을 이렇게 끝내고 싶습니다. 팽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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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삼신(환인-환웅-단군) 신앙의 성지 히코산 신궁
일본 규슈 후쿠오카현에 위치한 히코산英彦山은 고대부터 ‘신神의 산’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영산靈山이다. 히코日子라는 말은 원래 태양의 아들, 즉 하늘의 아들을 뜻한다.
예로부터 수험도修驗道의 3대 성산이며 일본 열도에 존재하는 환인·환웅·단군 삼성조 신앙의 성지이다. 특히 히코산은 독특하게 신전을 배치하고 있다. 산 정상에서부터 상궁·중궁·하궁의 삼신전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이것은 환인·환웅·단군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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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치만 신앙연구로 유명한 나카노 하타노(中野幡能, 1916~2002) 교수는 ‘히코산 신궁에서 모시고 있는 환웅상은 한국에서 건너왔음'을 밝혔다.
"히코산을 비롯한 일본 북규슈의 여러 산에서 백산신白山神을 모시고 있는데 이것은 한국 산악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국의 산악신앙이란 단군신앙을 말하는 것으로 백두산을 중심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다. 신앙의 대상은 환인·환웅·환검(단군)의 삼신三神인데, 그중에서도 환웅은 인간세상을 교화하기 위하여 태백산에 내려온 신으로서 민중의 신앙이 두터웠다.
이 한국의 환웅신앙이 일본의 히코산에 전파되어 등원환웅藤原桓雄이 되고 일본의 환웅신앙이 되었다.’ 『영언산英彦山을 탐구한다』 (1985)
히코산에 관한 13세기 기록인 『히코산유기彦山流記』를 보면 ‘히코산 산신이 진단震旦國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진단국이란 동쪽의 나라 즉 한국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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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 박성수교수는 “한국과 일본의 단군 관련 유적을 답사한 뒤 히코산이 환웅산이었음을 밝히기도 했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히코산 신궁의 말사인 다마야 신사玉屋神社에는 후지와라 환웅藤原桓雄을 모신 그림이 보관되어 있었으며, 하궁 근처에 있는 히코산 수험도관에는 후지야마 환웅의 목조상도 볼 수 있는데 ‘환웅’이란 글씨가 너무도 분명히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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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코산 신궁의 절이나 신사에 소속되어 시주를 하고 신앙하는 사람들을 단가檀家, 또는 단나檀那로 칭하는데, 이 말은 원래 단군의 집, 단군의 후손을 뜻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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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수험도修驗道는 산에서 수행하여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일본 고대의 산악신앙이 불교와 결합한 종교이다.
이 히코산은 수험도의 거점이었는데 미륵신앙과 신선도, 고구려의 조의선인 문화와 신라의 화랑도를 융합한 형태를 띄고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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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일본의 신도문화를 만든 기층문화에는 환인·환웅·단군으로 배표되는 삼신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히코산의 삼신전이 명증하고 있다.
더불어 한반도에서 넘어온 동방 신교의 삼신문화는 규슈를 기점으로 씨가 뿌려지고 일본전역으로 이종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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