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둥을 중심으로 남중국 일대에 자리 잡고 있던 漢族의 남비엣(南越: BC 207, BC111)이 남하하면서 BC 179년 베트남 북부지역을 병합
출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발간 <베트남 전쟁과 한국군>
1. 중국의 지배와 저항 시대(BC 179~AD 938)
고대 베트남의 최초 국가는 BC 690년 베트남 북부 홍(Hong) 강 삼각주 일대에 수립된 ‘반랑’이었다. ‘반랑’은 오늘날의 ‘하노이’를 중심으로 하는 넓은 평야지대에서 논을 이용한 경작에 종사했으며 이모작까지 했다고 한다. 광둥을 중심으로 남중국 일대에 자리 잡고 있던 漢族의 남비엣(南越: BC 207, BC111)이 남하하면서 BC 179년 베트남 북부지역을 병합했다.
그때부터 베트남은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그 후 중국의 왕조는 계속 바뀌었지만, 그들의 베트남 지배는 1000여 년 동안 계속됐다. 베트남 토착세력들은 중국의 지배가 계속되는 동안 지배세력에 복종하기도 했지만, 관리들의 횡포가 계속될 경우 그들에 맞서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 사람들은 오늘날의 게릴라전과 유사한 저항방식을 터득하게 됐다.
그 후 AD 938년 그들의 항쟁은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되었다. 봉기를 주도했던 토착세력 응오꾸엔이 당시 남중국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남한(南漢)의 군대를 ‘바익당’ 강 전투에서 격파하고 독립을 쟁취한 것이다. 그 결과 1000년이 넘는 중국의 베트남 지배는 끝을 맺게 되었다.
2. 베트남 전통왕조 시대(939~1862)
중국의 지배를 물리치고 수립된 ‘응오’ 왕조(939~965)가 멸망한 후 베트남 북부는 몇 차례의 왕조교체를 거쳐 1225년 쩐(陣)왕조가 수립됐다. 그 때 중국 대륙에는 몽골이 남하해 元을 건국하고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부상했으며, 그 과정에서 3차례에 걸쳐 베트남을 침략했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은 몽골의 침략에 굴하지 않고, 전 국민이 참가하는 게릴라전으로 맞섰다. 그 결과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군도 베트남만큼은 굴복시키지 못했다. 그 후 몽골을 대신해 중국을 통일한 明의 永樂帝가 1407년 베트남을 점령해 20년 동안 지배했다. 명의 베트남 지배는 또 다시 토착세력의 저항을 불러왔는데, 끈질긴 게릴라전을 전개했던 ‘레러이’가 1428년 명의 군대를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했다.
그 후 레 왕조는 강력한 남진정책을 계속 추구해 1471년 지금의 ‘뀌년’ 남쪽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이어진 남북조 시대를 이용해 중부지역의 참파와 남부지역의 캄보디아를 위협하면서 남진 정책을 계속 추구한 결과 1757년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베트남이 만들어졌다.
3. 프랑스 지배와 저항시대(1858년~1954년)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였던 ‘응웬’ 왕조는 건국과정에서 프랑스의 지원을 받았다. 당시 베트남에서 가톨릭을 전파하고 있던 프랑스의 아드란 주교가 곤경에 처한 응웬 왕조를 도와 통일 왕조 수립에 기여했던 것이다. 그 때부터 베트남과 프랑스는 보다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당시 유럽 세력들은 적극적인 해외 팽창정책을 추구하며, 베트남과 중국, 조선 등 동양에 침략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특히 베트남을 중국 진출의 발판으로 이용하려 했던 프랑스는 가톨릭 탄압을 빌미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조치가 1858년 9월 1일 베트남 중부의 다낭을 점령한 사건이었다. 그 후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를 점령하고 북부까지 침공했다.
그리고 종주국 행세를 해오던 청을 축출하고 베트남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이어서 캄보디아와 라오스까지 장악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식민정부를 수립해 동남아시아에서 본격적인 식민지 경영에 나섰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베트남에도 새로운 사상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세계대전 중 프랑스에 강제 징집되어 유럽전선에 파병되었던 수만 명의 베트남 젊은이들과 프랑스에 유학했던 젊은이들이 자유주의 또는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고 돌아왔다. 그 때부터 베트남에도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공산주의자 또는 민족주의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호지명 역시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4. 일본의 패망과 호지명 정부 수립(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가열되면서 유럽에서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아시아에서는 일본군이 1940년 6월 베트남을 포함한 동남아시아를 점령했다. 무기력했던 프랑스의 비시 정권은 그 해 8월 일본과 조약을 체결해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의 정치-경제적 우위를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일본은 1945년 3월9일 전격적으로 프랑스군을 공격해 무장해제 시킨 후 베트남을 직접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일본은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웬’ 왕조의 ‘바오다이’를 황제로 내세워 꼭두각시 정권을 수립했다. 한편, 프랑스 식민당국이 일본에게 굴복하는 것을 지켜 본 베트남 사람들은 “자신들의 독립이 막연한 꿈이 아니라 반드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때부터 베트남 민족주의 운동이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1941년 5월 호지명의 베트남독립동맹이 결성됐다. 그 결과 ‘베트민’은 베트남 민족주의 운동의 핵심세력으로 성장했다.
1945년 접어들면서 베트민이 봉기를 위한 준비를 하나하나 진행시키고 있을 때 일본의 항복이 임박해졌다. 기회를 잡은 베트민은 일본의 항복과 함께 즉각 행동에 나섰다. 8월18일 하노이의 모든 공공시설을 접수한 베트민은 일본의 꼭두각시 정권으로 간주되고 있던 바오다이 황제를 퇴위시켰다. 이어서 호지명은 9월2일 50만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베트남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출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발간 <베트남 전쟁과 한국군>, 최용호 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