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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베트남 역사는 중국과 투쟁史...10만대군 끌고 선제 공격하기도

1979년 중·월전쟁 당시 베트남군이 포로로 붙잡은 중국군.

최근 베트남에서 반중 시위가 일어나 100명 이상의 중국인이 죽거나 다쳤다. 한국을 포함한 베트남 투자 외국기업들도 과격한 시위에 큰 해를 입었다. 베트남 정부가 시위자 1000여명을 체포 혹은 구속하는 형태로 적극 개입함에 따라 시위는 소강상태이나 긴장은 지속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육해공 연합작전을 통해 자국민 수천 명을 베트남에서 탈출시키는가 하면 일시 여행 금지를 발표했다.

베트남의 반중시위는 지난 5월 2일 중국 해양석유총공사가 베트남 해안에서 240㎞ 떨어진 파라셀군도(베트남명 황사黃沙군도, 중국명 시사西沙군도) 인근에 원유 시추 시설 설치를 강행하면서 촉발되었다. 중국이 지난해 10월 남중국해 자원을 베트남과 공동으로 개발하겠다는 합의를 무시하고 원유 시추 시설의 설치를 강행했던 것은 자원개발 자체보다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속셈이 컸다.

중국이 지난해 11월 동중국해에 일방적으로 방공식별구역을 설정한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이뿐 아니라 중국의 파라셀군도 개발 강행은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보여준 미국의 힘의 한계, 중·러 밀월관계, 베트남·미국 관계의 한계, 남중국해를 둘러싼 베트남·아세안 관계의 한계 등을 간파한 중국의 치밀한 전략일 수도 있다.

베트남은 자국의 배타적경제수역(EEZ)과 대륙붕에서 이뤄지는 중국의 원유 시추가 불법이라고 즉각 반발하면서 연안경비대 초계함과 어업지도선을 파견하여 저지하였다. 그 과정에서 양측의 선박이 일부 파손되고 부상자가 발생했다. 양국 선박의 충돌 장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수도 하노이와 호찌민에서 “중국은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지 말라”는 반중 피켓시위가 일어났다. 베트남 정부는 징병령을 내리는가 하면 남중국해에서 장시간 실탄 포사격을 실시하는 형태로 중국과의 대결의지를 과시하였다.

그동안 주변국들과 함께 반중 연대를 구축해온 베트남 정부는 이번 자국민의 반중시위를 정책 차원에서 이용하려는 의도가 어느 정도는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베트남과 같이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하에서 정부의 묵인 없이는 어떠한 형태의 시위도 불가능하다. 설사 시위가 일어났다 할지라도 이번처럼 전국적일 수 없고 막대한 손실을 일으킬 수 없으며 장기간 일어날 수도 없다. 베트남 공산당 정부가 철저하게 인민을 관리하고 지배하며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의 반중시위는 베트남 정부의 의도를 넘어 격해지면서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고 말았다. 중북부 하띵의 대만 포모사 플라스틱그룹의 제철소 공격과 남부 빙 즈엉의 중국, 싱가포르, 한국, 일본 기업 등에 대한 약탈 등 인명 살상까지 벌어진 시위는 베트남 정부로서도 뜻밖의 사태였다고 볼 수 있다.

반중시위가 살인과 약탈의 형태로 변질되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외국인의 탈출이 이어지며 막대한 손실을 입은 외국 기업들이 베트남에 대한 투자를 재고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베트남 정부는 긴급히 군대를 파견하여 시위를 차단하는 한편 외국 피해 기업들에 대한 손해배상을 들고나왔다. 베트남 정부의 적극적 개입으로 반중시위는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반중시위는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 그리고 시위의 규모도 지금보다 더 커질 수 있다. 베트남과 중국 간에는 침략과 투쟁이라는 역사가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베트남 침략은 기원전 179년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베트남은 기원후 938년까지 1000년 이상 중국에 병합되었다. 이 기간 베트남인은 중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숱하게 싸웠다. 938년 중국의 원정군에 대승리를 거둔 응오꾸엔이 939년 왕위에 올라 처음으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최초의 왕조인 응오 왕조를 세웠다.

하지만 중국의 베트남 영토에 대한 야욕은 그치지 않았다. 베트남의 독립왕조 이후 중국의 첫 번째 베트남 침략은 송나라 때인 981년에 있었다. 당시 베트남은 거짓 항복과 유인 작전을 써서 송군을 물리쳤다. 당시에 송나라가 베트남을 재침하지 못했던 것은 지나친 문치주의로 국방이 약해져 있었고 북방의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와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립왕조 시대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는 조공과 책봉 관계였다. 그렇다고 중국이 베트남을 완전한 독립국가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춘추전국 시대나 한나라 시대의 봉건제도처럼 중국은 베트남을 자신들의 봉토로 여겼다. 따라서 베트남의 왕을 교지군왕(交趾君王), 정해군절도사(靜海軍節度使), 남평왕(南平王)으로 책봉하였다.

국력에서 절대적으로 밀린 베트남은 이러한 사대 관계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토대로 베트남은 발달한 중국의 문명과 문화를 받아들여 힘을 축적하고 그를 기반 삼아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중국이 베트남을 완전한 독립국가로 인정했던 때는 938년 독립 후 236년이 지난 1174년이다. 이때 안남국 및 안남국왕으로 책봉했다. 이는 북방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밀려 안위에 위협을 느낀 남송이 남쪽의 베트남을 자국으로 끌어들여 기각지세를 모색하려는 고육책이었다.

중국의 베트남 침략은 그 뒤에도 있었다. 명나라는 1406년 베트남의 내정을 빌미로 다시 침략하였다. 이때부터 1428년까지 베트남은 중국에 다시 병합되었다. 이 시기 중국의 베트남 통치는 혹독하고 치밀했다. 그러나 10년의 투쟁을 통해 베트남은 중국을 물리치고 다시 주권을 되찾았다.

중국의 베트남 침략은 청나라 때인 1788년에도 있었다. 혼란스러운 베트남의 안정 회복을 빌미로 청군 29만이 베트남을 침략하였다. 그러나 청군은 하노이에서 참패했다. 당시 베트남은 청군에 하노이를 점령당했지만 기상천외한 기습 작전을 펼쳐 청군을 거의 전멸시켰다.

베트남은 중국으로부터 침략만 당한 게 아니다. 중국의 힘이 약해지면 먼저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1075년, 송나라가 왕안석의 개혁정책으로 어느 정도 국력을 회복하자 베트남은 송의 침략을 사전에 차단하자는 전략에서 10만 대군을 동원해 중국을 선제공격했다. 이는 지금까지 베트남 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중국을 침략했던 사건이다.

당시 베트남 리(李) 왕조는 리 트엉 끼엣 장군으로 하여금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수륙양로로 선제공격에 나서도록 하여 광동, 광시성을 점령하고 수천의 포로와 다량의 전리품을 노획하여 귀환하였다. 이에 송나라에서도 곽규(郭逵)를 토벌군 사령관으로 임명해 베트남 공략에 나섰으나 리 트엉 끼엣 장군은 송나라군을 대파하였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베트남과 중국의 갈등은 반복됐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종식되자 중국(장제스 정부)의 베트남 정복 야욕은 또 수면 위로 올라왔다. 북·남 베트남에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하여 각각 중국군과 영국군이 진출하였다. 이때 베트남을 식민지배했던 프랑스도 베트남의 재식민지화를 위하여 영국군을 따라 남베트남에 들어왔다.

연합군의 승리로 중국은 이전과 달리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베트남을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았다. 그러나 당시 장제스는 마오쩌둥과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 공략에 힘을 쏟을 여력이 없었다. 장제스 군대는 베트남에서 눈물을 삼키며 철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신 장제스는 베트남에서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프랑스로부터 최대한 보장받는 행태로 자신들의 임무를 프랑스에 위임하였다.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는 1949년 중국이 공산 혁명에 성공하면서 달라졌다. 세계는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으로 나뉘면서 중국은 프랑스와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을 치르고 있는 베트남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이 프랑스의 100년 지배를 종식시킬 수 있었던 데는 국경선을 접하고 있던 공산 우방국 중국의 지원이 크게 작용했다.

중국의 지원은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일명 베트남전쟁)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중·소 간 간격이 벌어지고 베트남전쟁의 전세가 북베트남으로 기울고 있는 상황에서 미·중 간 핑퐁외교는 베·중 관계를 새로운 국면으로 몰아갔다. 베트남전쟁 막바지인 1974년 1월, 중국이 공군과 해군을 동원해 파라셀군도를 점령해버렸다. 파라셀군도는 17세기부터 베트남의 영토였다.

그리고 베트남전쟁 당시에는 남베트남의 영토였다. 베트남전쟁의 전세가 북베트남 측으로 기울고 있는 상황에서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는 파라셀군도를 자국의 이익을 위해 중국은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실효지배하고 있다. 더 나아가 현재 중국은 양국의 공동개발협정을 무시하고 파라셀군도를 독자 개발하려고 한다. 이런 중국의 야욕은 이념보다는 국가 이익이 앞서는 냉엄한 국제질서를 보여준다.

파라셀군도 점령으로 악화된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이후 다시 전쟁으로 이어졌다. 1979년 2월 중국은 정규군 9개 군단 예하 30개 사단으로 구성된 60만 병력으로 1400㎞에 달하는 국경선을 따라 베트남을 침략하였다. 1978년 12월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략에 대한 응징 차원에서 비롯된 중국의 침략은 한 달간 지속되었다.

이른바 중·월전쟁으로 불린 당시 전쟁에서 중공군은 상당한 고전을 하였다. 중공군은 베트남 진지를 공략하기 위하여 많은 전차와 보병을 투입했지만 산악지대를 이용한 베트남군의 저항을 받으며 오히려 개전 24시간 만에 전차 13대를 격파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베트남군의 유격전과 베트남을 지원하는 소련의 위협으로 고전하던 중국은 베트남을 응징했다는 명분을 내걸며 1979년 3월 6일 철군해 일단 전쟁은 종식됐다. 당시 중공군은 무기가 낙후했고 문화대혁명 때 유능한 지휘관들을 잃어 전술에서도 취약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베트남군은 미국과의 전쟁에서의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효율적으로 전쟁을 치렀다. 중·월전쟁 이후 베트남군은 스스로 ‘세계 최강’이라는 자부심을 내보이기도 했다.

베트남의 역사는 ‘인위와 자연과의 투쟁사’라고 말한다. 그중 인위의 대표적인 존재가 중국이다. 국제관계에서 ‘이웃한 국가끼리는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이 상식이다.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도 예외는 아니다. 끈질긴 투쟁이 없었더라면 베트남은 이미 광동, 광시, 윈난, 티베트처럼 중국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베·중 간에는 국제관계를 운운할 상식마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베트남은 무릎을 꿇지 않는 투쟁을 통해서 중국과의 관계를 유지해 왔다. 이것이 베트남의 생존법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