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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의 사회심리학] 감정노동하면서'번아웃'을 막으려면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미국에 있다가 한국 콜센터에 전화할 일이 생겼을 때 지나치게 따뜻하고 순종적인 톤의 목소리에 흠칫 놀랐던 적이 있다. 너무 과도한 감정 노동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문제는 감정노동에는 많은 심리적, 사회적 ‘비용’이 따른다는 것이다. 

감정노동이란

펜실베이니아주립대의 심리학자 알리시아 그랜디 교수에 따르면 감정노동은 고용주가 고용인으로 하여금 특정한 감정을 표현하길 요구하며 감정에 제한을 두는 것으로, 이 과정에서 고용인들은 감정을 통제하기 위한 다양한 전략과 노력을 사용하며 애쓰게 된다. 흔히 낯선 사람들과 높은 빈도로 접촉하며 고객의 마음을 사기 위해 기분 좋은 얼굴과 목소리를 해야 하는 콜센터 직원, 간호사, 버스 기사 같은 직업에서 감정노동이 요구된다. 

특정 감정을 단순히 권장하는 수준이 아니라 미소를 잘 짓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채용한다든가(선택), 미소와 인사에 대한 트레이닝을 반복한다든가(훈련), 얼마나 고객 응대를 밝고 따뜻하게 하는지 평가하는 등(평가) 감정노동 현장에서는 다양한 유무형의 외압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감정노동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항상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내가 어떤 사람인지와 상관없이 실제 내 모습과 다를 수 있는 특정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 자체가 정신 건강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깊은 연기 vs. 얕은 연기

그랜디 교수에 따르면 감정노동의 형태에는 크게 깊은 연기와 얕은 연기의 두 가지가 있다. 깊은 연기는 나의 생각과 태도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해당 감정이 진심으로 우러나오게 만드는 것이다. 예컨대 고객을 공주님이라고 불러야 할 때 물론 조금 황당스럽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이고 특별한 사람이니까 어쩌면 우린 누구나 진짜로 누군가의 공주일지도 모르고, 또 이렇게 부르는 게 고객을 기쁘게 만든다면 부끄럽지만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라는 식으로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이런 인지적 ‘재해석’을 통해 기꺼이 고객을 '공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깊은 연기다. 

반면 얕은 연기는 속으로는 ‘그냥 좀 대충 처먹어라’고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생글생글 “네 알겠습니다 고객님. 말씀하신 대로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는 웨이터가 한 예다.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는 상태에서 억지로 특정 모습을 연기하는 것이다. 

번아웃이 심한 연기는

예상할 수 있겠지만 내면과 외면이 어느정도 일치하는 깊은 연기보다 겉과 속이 많이 달라서 적극적으로 자신과 사람들을 속여야 하는 얕은 연기가 더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95개의 기존 연구들을 분석한 결과 얕은 연기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몸이 많이 아프고 우울, 피로, 무기력 등 번아웃 증상을 더 많이 보이며 연기에 에너지 소모가 큰 나머지 정작 중요한 일을 처리할 주의력과 에너지가 부족해져 성과가 떨어지거나, 자기통제력을 잃거나, 직장을 그만두는 경향을 더 많이 보였다. 또한 고객들 역시 직원의 얕은 연기가 심할수록 만족도가 다소 떨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참고로 이미 존재하는 감정을 억지로 바꾸거나 억압하는 것은 생각과 태도, 감정의 원천을 바꾸는 것보다 더 어렵고 스트레스가 심한 감정 통제 방법이다. 예컨대 ‘어쩌면 그렇게 화를 낼 일이 아닐 수도 있어’라고 납득해서 화가 누그러지는 경우와 이미 잔뜩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나는 화가 나지 않았어’라고 우기는 것 중 전자(재해석)가 더 효과적으로 화를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이다. 이미 존재하는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되려 그 감정에 더 불을 붙이는 역효과를 내곤 한다. 감정을 억압할수록 내 혈압이 높아지고 분명 뭔가 있는데 아니라고 우긴다는 점에서 분명 ‘상대방’의 혈압 또한 높아지게 만든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깊은 연기보다 얕은 연기가 더 직접적으로 감정을 억압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더 많은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깊은 연기는 어떨까. 안타깝게도 얕은 연기보다 정도는 덜 하지만 깊은 연기 역시 많이 하는 편일수록 몸이 여기저기 아프고 번아웃이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얕은 연기와의 차이라면 깊은 연기는 많이 할수록 고객의 만족도가 높았다는 점이다. 결국 얕든 깊든 나의 감정과 생각, 태도 등을 고용주의 의지에 맞춰 애써 바꾸려는 시도 자체가 상당히 힘들며 번아웃을 불러올 수 있다는 얘기다.

번아웃을 막으려면

어떻게 하면 번아웃을 막을 수 있을까. 그랜디는 우선 대체로 즐거운 편이고 자기통제력이 좋으며 직업과 자신의 정체성이 잘 일치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중요하다고 말한다. 다른 말로 이런 직장에 지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굳이 특정 캐릭터를 연기할 필요가 없는, 원래 그러한 사람이 해당 역할을  맡는 것이 쓸데없는 고통을 줄이는 한 가지 방법이라는 것이다. 고객 응대가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며 동기를 부여해주는 것도 중요하다. ‘자율성’도 중요해서 미소 짓는 방법이나 대사 하나하나를 위에서 지시하기보다 직원들이 각자 알아서 자기만의 고객 응대법을 자유롭게 사용하게 하면 감정노동을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직업은 내가 아니다

한편 많은 경우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내가 연기해야 하는 나’ 사이의 간극 때문에 스트레스가 발생하는 것이므로 직업과 나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수 있다. 직업을 곧 나 자신이라고 여기는 등 직업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직업은 직업일 뿐 나의 진짜 모습과 별 상관없다고 생각하면 직장에서의 내 모습과 진짜 내 모습 사이의 간극이 덜 중요하기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직업은 하나의 역할 놀이일 뿐 직장에서 꼭 진정한 나의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가장 나쁜 것은 지나친 연기를 요구하는 환경, 또는 그런 사람들이다.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받으면 되지 지나친 친절과 미소, 순종을 받을 필요는 없고 그럴 권리도 없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는 것이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참고자료

-Butler, E. A., Egloff, B., Wlhelm, F. H., Smith, N. C., Erickson, E. A., & Gross, J. J. (2003). The social consequences of expressive suppression. Emotion, 3, 48-67.
-Grandey, A. A., & Sayre, G. M. (2019). Emotional Labor: Regulating Emotions for a Wage. Current Directions in Psychological Science, 28, 131-137.
-Hülsheger, U. R., & Schewe, A. F. (2011). On the costs and benefits of emotional labor: A meta-analysis of three decades of research. Journal of Occupational Health Psychology, 16, 361–389.

※필자소개

박진영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를 썼다. 삶에 도움이 되는 심리학 연구를 알기 쉽고 공감 가도록 풀어낸 책을 통해 독자와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지뇽뇽'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미국 듀크대에서 사회심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