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대선, 88년 총선 결과 여소야대되면서 국회에 협의제적 의사진행 체제 제도화
-문 정권, 거대양당 중심 대결구도 복원. 중간정당 소멸하며 ‘양극화된 양당제’로 퇴행
-향후 양극화정치는 시민사회에도 양극화된 운동동원 심화시킬 것. 공동체 붕괴 위험
1. 시민 분열의 양극화 정치 대신 연합 정치의 길 열자
1) 민주화 이후의 한국 민주주의는 협의제와 다수제의 혼합 체제
1987년 대통령 선거와 1988년 국회의원 총선 결과 여소야대가 등장하면서, 국회는 협의제적 의사 진행 체제를 제도화했다. 1990년 삼당 합당을 통해 정치 전반을 다수 지배로 운영하고자 하는 역전 시도가 있었지만, 1992년 총선에서 다시 여소야대가 됨으로써 협의제 전통은 지켜져 왔다.
2007년까지는 국가-시민 사회, 행정부-입법부, 여-야 사이의 견제와 균형이 유지되었고, 이 체제는 여야를 넘나드는 연합 정치, 시민운동의 성장 그리고 당정 분리를 통해 유지되었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야당으로의 수평적 정권 교체가 가능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2) 2008년 이후 양극화 정치 시대로 급변
이명박 행정부와 18대 국회에서 ‘입법 100일 작전’과 한미 FTA 및 종편 관련 ‘입법 전쟁’이 나타나고, 전직 대통령에 대한 무리한 조사로 인해 여야의 전면전과 의회 밖 촛불 집회가 터져 나왔다. 야당의 반대와 시민 사회의 항의가 결합된, 이른바 ‘이중의 정치 사이클’이 본격화되었다.
이에 대한 정치적 대응으로 ‘국회 선진화법 체제’가 등장했다. 이는 집권당 중심의 다수주의와 소수당 중심의 협의주의를 재결합하려는 시도였다. 의안 및 예산안 자동 상정, 패스트트랙 등 다수당의 요구에 직권 상정 제한과 필리버스터 등 소수 정당의 비토권을 인정하는 ‘정치적 교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통진당 사태 등에도 불구하고 19대 국회 내내 국회 선진화법 체제는 유지되었다.
박근혜 정부에서 선진화법 체제에 대한 대통령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와 열렬 지지자를 동원한 정치, 그리고 뒤이은 청와대의 공천 개입에 의해 기존의 당정 분리 체계 또한 붕괴되기에 이르렀는데, 그 부작용으로 당이 분열하고 20대 총선에서 패배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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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대중 동원과 보수적 대중 동원의 본격적 경쟁 체제는 ‘양극화 정치 – 양극화 사회 – 양극화 시민’을 강화시키는 진영 대립의 시대로 접어들게 했다.
3) 연정의 전기가 될 수 있었던 2016년 촛불 집회의 특별함
박근혜 정부는 촛불 집회와 탄핵 동맹의 출현으로 붕괴되었다. 친박 공천을 통한 대통령의 역전 시도는 20대 총선의 참패와 다당제의 등장과 함께 좌절되었고, 20대 국회에서 협의주의의 정치 틀은 회복되었다.
이때의 촛불 집회는 진보는 물론 상당수의 보수 시민이 참여한 “사실상의 사회적 대연정 체제”였다고 정의할 수 있다. 여기에 집권당 내 상당수가 탄핵 정치 동맹에 가담하면서 20대 국회 전반기는 “사실상의 정치적 대연정”이 실천되었다. 이는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합의 민주주의의 토대가 될 수 있는,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4) 문재인·민주당 정부 앞에 놓인 두 개의 길
하나는 탄핵 정치 동맹을 유지하며 구체제 개혁을 공동으로 추구하는 길(협의주의 강화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탄핵 정치 동맹을 붕괴시키고 여야 일대일 체제를 복원해 정국 주도권을 행사하는 길(다수주의로의 퇴행의 길)이다.
문재인·민주당 정권은 후자의 길을 선택했다. 한편, 제3당(국민의당)에 대한 전면 공격을 통해 호남을 탈환하고, 적폐 청산을 앞세워 거대 양당 중심의 대결 구도를 복원했다. 2018년 지방 선거를 거치며 국민의당과 바른정당 등 중간 정당이 소멸의 길로 접어들면서 한국 정치는 전보다 더 나빠진 ‘양극화된 양당제’로 퇴행했다.
5) 더 강화된 청와대 비서실 정부의 등장
민주당과 청와대 사이의 관계는 ‘당정 분리’에서 ‘당정 통합’으로 전환되었다. 대통령의 열성 지지자를 통해 집권당을 통제하는, 박근혜 대통령도 성공하지 못했던 일에 성공했고, ‘비서실 정부’ 체제가 다시 등장했다.
그에 따라 여론은 다시 적대적 두 진영으로 분열되었고, 보수 태극기 집회가 대중 동원에 성공했다. 이전까지는 야당과 사회 운동의 결합을 특징으로 하는 진보적 대중 동원이 시민 사회를 주도했으나, 이제는 그에 대한 일종의 ‘대항 모델’로서 보수적 대중 동원 또한 강력한 동원력을 갖게 되었다.
진보적 대중 동원과 보수적 대중 동원의 본격적 경쟁 체제는 ‘양극화 정치 – 양극화 사회 – 양극화 시민’을 강화시키는 진영 대립의 시대로 접어들게 했다. 감염병 비상 시국 때문에 수면 아래로 내려갔지만, 향후 양극화 정치는 시민 사회 안에서도 양극화된 운동 동원의 양상을 심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정치만이 아니라 공동체 또한 붕괴될 수 있는 위험 상황이 아닐 수 없다.
-40%대 지지 대통령-집권당이 국정 운영 독점하는 다수 지배 체제는 갈등만 심화
-협의주의 이룬 시기에 더 많은 변화와 개혁 이뤄. 연합 정치는 현대 민주주의 상수
-교육받은 중산층이 다수 이루는 한국 사회에서는 이념적 극단에 대한 거부감 강해
6) 연합의 정치를 실천해야 한다
다수주의가 과연 한국 정치와 한국 사회에서 더 크고 넓은 개혁을 가져올까, 아니면 더 큰 분열과 적대를 가져올까? 답은 후자이다. 40%대 초반의 지지를 받은 대통령과 집권 당이 국정 운영을 독점하고 국회를 일방적으로 이끄는 다수 지배 체제는 해결할 수 없는 갈등만 심화시킨다.
다수 지배 정치가 더 많은 개혁을 이뤄냈을까? 그것도 아니다. 협의주의 정치가 이루어진 시기에 더 많은 변화와 개혁이 이루어졌다. 민주화 이행기의 법-제도 개혁을 마무리한 13대 국회의 4당 체제나 대통령 탄핵을 안정적으로 이끈 20대 국회의 3.5당 체제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오히려 과반수 1당이 다수주의를 밀어부친 18대와 21대 국회에서 정치는 물론 사회 분열은 더 심각했다.
연합 정치, 연합 정부는 현대 민주주의의 상수라 할 수 있다. 대통령제에서 연정은 안 맞다? 전혀 그렇지 않다. 대통령제에서도 연립 정부의 빈도는 단독 정부의 빈도보다 많다. 연정의 결과도 나쁘지 않다. 표현의 자유와 정부의 책임성, 정책의 효율성, 법의 지배 등에 있어서 연정의 사례는 단독 정부보다 통치 효과가 나은 것으로 나타난다.
1996년부터 2009년 사이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63개 민주주의 국가를 분석한 결과, 소수 여당의 출현 빈도는 442번이었고, 그 가운데 연립 정부 구성의 사례는 전체의 56.6%인 250번이나 있었다.
조사 대상의 사례에서 연정의 긍정적인 효과는 뚜렷하게 나타났다. 예컨대 표현의 자유와 책임성, 정부 효율성, 법의 지배 등에서 연정의 사례는 과반 여당의 단독 정부보다 통치 효과가 나은 것으로 나온다(홍제우, 김형철, 조성대, 2012, “대통령제와 연립 정부: 제도적 한계의 제도적 해결” <한국정치학회보>, 46집,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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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P 연합 하에서 6.15 남북 정상 회담을 하고 기초 생활 보장제를 포함해 사회 복지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시도 또한 재평가되어야 한다.
최근의 연구 역시 대통령제 하에서 단일 정부보다 연립 정부가 ‘행정부 견제’ 기능과 ‘정부 위기’ 대응 능력이 더 우월한 것으로 조사되었다(안용흔, 2018, “대통령제에서의 다수정부, 소수정부 및 연립정부의 정치·경제적 수행력 연구,” 국회 운영위원회 정책연구 용역과제).
연정은 다원주의 정치를 좀더 적극적으로 제도화하는 길을 열어 준다. “정당 간 경쟁과 연합의 제도화”라는, 민주주의 본래의 정의에 가깝게 정부를 운영하는 것이 필요하다. 연합을 야합으로 보는 것도 시대착오적이다. 우리 현실에 맞는 한국형 연합 정치를 구현하는 것이 과제일 뿐, 연정을 유럽의 내각제에서나 가능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틀린 말이다.
DJP 연합 하에서 6.15 남북 정상 회담을 하고 기초 생활 보장제를 포함해 사회 복지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시도 또한 재평가되어야 한다. 이런 전통으로부터 벗어나, 박근혜, 문재인 행정부 하에서 적폐 청산 정책을 기점으로 퇴행적 정치 갈등이 재등장하고 대결적 정치 동원이 심화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7) 양극화 정치는 다수가 원하는 길이 아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특징은 민주적 한계선을 넘는 시도에 대해서는 불관용적이라는 데 있다. 크게 보면 양극화 정치 세력은 물론, 이를 지지하는 시민은 다수가 아니다. 한국 사회는 교육받은 중산층이 절대 다수를 이루는 사회이고, 이념적 극단에 대한 거부감도 강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다수 시민은 여야가 함께 정치를 운영하는 공동의 파트너십이 유지되는 정치를 바란다.
양극화 정치는 강렬한 열정을 동반하기에 대세인 것처럼 보일 뿐, 성공하기도 어렵다. 일당 중심의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오로지 복수 정당 사이에서 합의의 공간을 넓혀가는 정치만이 사회 통합과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 지난 경험으로부터 이런 지혜를 얻지 못한다면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는 밝을 수 없다.
흔히 ‘협치(協治)’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이를 여야 관계에 맥락 없이 확대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 협치는 중국어 사전에도 없고, 한국어 사전에도 없던 일본말에서 온 개념일 뿐이다. 2000년 1월 당시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자문 그룹의 보고서(「21세기 일본의 구상」)에서 ‘거버넌스(governance)’의 일본어 번역어로 처음 등장했다.
게다가 그 뜻은 여야 간 협력을 의미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그동안 일본 사회의 단점으로 지적되었던 국가와 공(公) 중심 체제를 개선하고 “진정한 개인의 확립”을 지향하는 사회 운영 원리로 제시된 것이었다. 여야 협력을 뜻하는 게 아니라, 국가와 국민 관계를 새롭게 하자는 의미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개념을 가져와 야당에 협치를 강박하는 것은 억지다. 한자 협(協)과 치(治)의 뜻 그대로 이해하고 여야 간 협력하는 정치를 하자는 것이라면, 의회 정치와 정당 정치 본래의 개념인 정당 연합, 정책 연합, 연립 정부 등 제대로 된 개념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집권 초 과도한 기대. 집권 말 되면 대통령에게 모든 책임 돌리는 일을 반복해와
-우리가 뽑은 대통령이 좋은 정치, 좋은 정부, 좋은 정당 이끌 수 있는지 질문해야
-적폐 청산 등 민주vs반민주 구도 무리하게 복원하려다 민주주의, 대혼란 상태로
2. ‘대통령 뽑기 민주주의’에서 ‘좋은 정치 가능한 민주주의’로
1) 민주화의 첫 단계를 넘어서야 할 때 과거로 돌아간 한국 정치
이제 우리는 ‘언제까지 대통령 개인에게 의존하는 민주주의를 운영할 것인가’라는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때가 왔다.
집권 초 대통령에 과도한 기대를 걸었다가, 집권 말이 되면 대통령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일을 반복해 온 것이 한국의 대통령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서로 다른 대통령을 지지했던 시민들 사이에 복수감을 갖게 한 한국의 대통령제가 낳은 후유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열망과 실망의 사이클이 반복되면서 시민과 사회는 계속해서 멍들어 왔지만, 정치는 또 때가 되면 대통령 뽑기를 둘러싼 권력 투쟁으로 치달아 온 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이다.
1987년 체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을 내 손으로”의 과제는 오래 전 마무리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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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체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을 내 손으로”의 과제는 오래 전 마무리된 상태이다.
1987년, 대통령을 국민 손으로 뽑자는 것에 여야는 물론 국가-국민 사이의 확고한 사회적 합의로 민주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헌법 개정과 대선을 통해 새로운 공화국이 수립됨으로써 이 목표는 대체로 잘 완결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후에도 몇 번의 촛불집회가 상징하듯, 권위주의로의 회귀나 민주적 최저선을 넘는 통치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는 정도의 민주화가 안착/공고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내가 찍은 후보가 대통령이 되느냐 아니냐를 넘어, 그 대통령이 “좋은 정치 – 좋은 정부 – 좋은 정당”을 이끌 수 있느냐 즉 대통령의 역할이 무엇이냐의 문제를 중시해야 하는 시대이다. 민주화의 다음 단계로 도약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민주적 업그레이드가 필요할 때 정작 한국의 현실 정치는 ‘과거 추궁형 정치’로 퇴행하고 있다는 데 있다.
군부 권위주의 25년, 그것을 훨씬 넘는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34년. 7번의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3번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현재 한국 정치의 현실을 과거 군부 권위주의 탓으로 알리바이 댈 수 없는 상황이다. 국정운영 시스템의 민주적 도약이 필요한데, 그게 안 되고 적폐 청산과 같이 ‘민주 vs 반민주’의 변형된 구도를 무리하게 복원하려다 한국 민주주의가 대혼란에 빠진 게 지금의 현실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의 현실과 모순을 냉정하게 성찰해야 할 때이다. 우리 사회에서 과거의 적폐가 청산되어 정치가 더 협력적이고 미래지향적이 되었을까? 공직 사회가 더 헌신적이 되고 더 깨끗해졌을까? 재벌 의존적인 경제체제가 개선되고 좀 더 공정하고 자유로운 시장경제 체제가 만들어졌을까? 합리적 노사관계가 발전하고 시민사회가 더 평화롭고 협력적이 되었을까?
정치가 사회를 넓게 대표하고 통합하는 정당 간 경쟁이 아니라 누가 집권할 것인지를 둘러싼 당파적 권력 투쟁으로 단순화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정치가 사회를 통합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분열로 이끄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 것은 아닐까?
-정치의 역할 실종. 동료 의식은 배타적 진영 의식으로 대체. 상대 탓하며 공격이 습관화
-사회에서 정치 유리. 사회적 기반 없는 여론동원형 정당정치 판치고 정치적 피로감 누적
-증오와 적대의 정치에서 책임 공유하는 정치로의 전환은 어떻게 가능한지 물어야 할 때
2) 한국 민주주의, 이대로 갈 수는 없다!
□한계점에 서 있는 대한민국호(號)
•정치적으로: 모두가 상대 탓하고 공격하며 화를 내는 게 습관화되어 있다. 정치의 역할이 실종된 것이다. 정치인들 사이에 동료 의식은 사라지고 배타적 진영 의식으로 대체되었다. 그 결과, ‘사나운 말 – 사나운 정치 – 사나운 지지자’의 삼위일체가 이뤄졌다.
•경제적으로: 불평등으로 인한 상실감과 이를 초극하려는 한탕주의가 공존한다. 국가 차원에서는 G7 가입, 혁신 경제, 선도 경제가 목표로 설정되는 동안, 일반 시민들의 경제적 삶은 깊은 좌절감과 함께,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영혼 파괴적’ 투자/투기 열풍이 불고, 그로 인해 부동산 정책에 대한 정부 신뢰의 저하와 더불어, 코로나 19 방역이 개인 위주의 안전에 집착하게 만든 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까가 우려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사회적으로: 미래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다. 최고 자살 국가, 최저 출산 국가, 소송 사회, 고소·고발 사회, 처벌 위주의 법 집행, 공동체의 규범 실종 등으로 인해 결속, 연대, 신뢰, 협력 등의 사회 기반이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2016 촛불집회 때와는 크게 대비되는 사회 해체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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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와 적대의 정치에서 책임을 공유하는 정치로 전환은 어떻게 가능한지 물어야 할 때인데, 정작 여야는 서로를 공격할 호재만 찾는 데 모든 열정을 집중하고 있다.
□자기 조정 능력을 잃은 양극화 정치
•국회와 정당 등 민주 정치를 이끌어야 할 중심적 제도의 역할과 규범은 완전히 혼란 상태이다. ‘매일 국민투표 하는 민주주의’처럼 여론조사에 매달려 대통령직을 향한 권력적 열정만 쏟아내는 상황이다.
•정치가 사회로부터 유리되었다. 사회적 기반 없는 여론 동원형 정당 정치가 판을 치고, 정치적 피로감 누적되고 있다. 시민/유권자의 선택이 매년 국난을 겪은 나라처럼 매우 짧은 주기로 급변해 온 상황이다. 앞으로 또 무슨 예기치 못한 정변을 만들어낼지 알 수 없다.
•증오와 적대의 정치에서 책임을 공유하는 정치로의 전환은 어떻게 가능한지, 성실하게 일한다면 부유하지는 않아도 자기 삶을 안정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경제는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지, 가난해도 모멸을 받지 않고 소외되지 않고 서로 협력하고 연대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가 물어져야 할 때인데도, 정작 여야는 서로를 공격할 호재만 찾는 데 모든 열정을 집중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인–사회–국가, 각자의 역할이 살아나는 민주주의
-일원적 국가주의 강화하는 ‘과도한 대통령 중심주의’ 이제 그만해야 할 때
-한국정치에서 대통령 권력은 시민분열-정치 양극화의 강력한 계기로 작용
3) 다름과 차이가 선용되는 다원 민주주의 국가론이 필요한 때, 더 강해진 대통령주의 혹은 대통령=국가의 일원론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인 – 사회 – 국가, 각자의 역할이 살아나는 민주주의
•①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평등한 권리를 갖는 개인 ② 거대한 분업 구조 속에서 결속하고 교섭하고 연대함으로써 개인을 보호하고 소속 의식을 갖게 하는 사회 ③ 시민권을 보장하는 의무와 사회를 보호하는 책임성을 실천하는 국가
•이를 위해 정치가 해야 할 일은 ① 국가 의존적 정치가 아닌 권리 중심적 정치, ② 자율적 교섭과 협상이 중심이 되는 이익 조정 정치, ③ 양극화 정치 부추기는 양당 패권 정치에서 다당제 연합 정치
•누구도 국가나 정부가 모든 것을 다 해 주길 바라지 않는다. 자율적 개인, 공동체로서 사회가 가능할 수 있도록, 이런 목적에 맞게 여야가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적용하는 데 책임성을 갖기를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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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인 – 사회 – 국가, 각자의 역할이 살아나는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직의 민주적 역할>
➀ (견제와 균형을 핵심 원리로 삼는 민주 헌법의 근본 규범에 맞게) 통치권을 절제해서 사용해야 하는 역할
➁ (입법의 취지와 법률주의 원칙에 맞게) 법을 집행하는 동시에 행정 조직 전반을 유능하고 활력 있게 이끌어야 하는 역할
➂ (특정 정당의 공직 후보로 선출되고 공약을 통해 주권을 위임받은 사실에 맞게) 집권당을 통해 책임 정치를 실천해야 하는 역할
□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
•대통령과 국가가 시민의 사회와 개인의 생활 세계 전반을 재구조화 혹은 대개조할 수 있는 듯이 말하는 ‘유기체주의 국가론’이 이른바 국정 담론을 지배하는 게 현실 아닌가.
•대통령과 국가가 사람들의 요구를 다 들어 주고 실현해 줄 수 있듯 말하는 ‘온정주의적 가부장 국가론’이 지배하는 것 아닌가.
⇒ 일원적 국가주의를 강화하는 ‘과도한 대통령 중심주의’는 그만해야 할 때이다. 그런 대통령은 시민을 조급하고 사납게 만들 뿐이다.
□ 과도한 대통령 중심주의의 정신 구조
•정당한 절차와 과정을 통해 개선하기보다 즉각적으로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는 권위주의적 ‘긴급 명령주의’에 가까운 정서 자극하고, 이견을 보인 반대자를 사적으로 공격하려는 성향 갖게 한다.
•당사자 집단 안에서 자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약화시키는 개혁론만 키운다. 노조든 학교든 기업이든 모두 청와대 권력을 향하게 하고, 그에 따른 ‘타율적 개혁’을 요구하는 정서를 만들어낸다. 누군가를 향해 처벌하라, 척결하라, 구속시켜라 같은 ‘유사 공안 담론’이 공론장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유사 인격 신을 만드는 문제도 크다. 대통령 개인을 둘러싼 과도한 열정도 문제다. 좋아하는 사람은 너무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너무 싫어하는 것 때문에 한국 정치에서 대통령 권력은 시민을 분열시키고 정치를 양극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특정 대통령을 추종하든 적대하든 두 집단 모두 자신만큼 대통령을 좋아하거나 자신만큼 싫어하지 않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는 심리 자극이 있다.
-‘개인 대통령(a president)’ 넘어 ‘제도로서 대통령직(the presidency)’의 문제 실종
-청와대 관심 법안, 대통령 공약 사안 등 법안이나 의제 놓고 여야가 국회서 사생결단
-대통령과의 거리에 따라 권력 배분하고, ‘공론장’을 지배하는 것도 열성 지지자 집단
□ 열정의 과잉 대표 문제
선호 강도가 강한 열정적 지지자의 의견이 과대 대표되고 과잉 표출되게 만드는 문제이다. 특정 대통령 개인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시민의 의견만 주목받는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런 현상 속에서 ‘개인으로서의 대통령(a president)’을 넘어 ‘제도로서의 대통령직(the presidency)’의 문제는 실종되고 만다.
결국 대통령 개인에게 모든 문제의 해결자 같은 슈퍼 대통령을 기대하고, 입법-행정-사법의 견제로부터 자유로운 초대통령(hyper president)으로 역할 하길 바라는 시민문화를 만드는 부작용을 낳았다고 말할 수 있다.
□ 지금의 대통령제, 그대로 두고 변화가 가능할까
한국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정당 운영이든 입법이든 정책 결정이든) 공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의 대부분을 대통령과 청와대가 주도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정당은 친이, 친박, 친문처럼 대통령 개인의 성을 따라 불리는 세력들이 주도한다. 국회는 ‘청와대 관심법안’, ‘대통령 공약 사안’이라고 불리는 법안이나 의제에 따라 여야가 사활적 대결을 벌이곤 한다. 대통령이 중심이 된 적대적 공생의 양극화 정치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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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김정치는 폐쇄적 인간관계 등 문제가 많았지만, 힘의 한계를 인정하고 독점이나 독주보다 연합과 협력을 추구하는 등 정당정치 본연의 역할을 중시했다.
혹자는 이를 ‘3김정치’의 유산이라고 말할지 모르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1990년의 3당합당, 1997년 DJP연합에서 보듯이 3김정치는 연합과 타협, 협상이 더 일반적인 특징이었다. 청와대와 내각 구성 역시 여러 세력의 연합체제를 특징으로 했다.
물론 3김정치에도 폐쇄적 인간관계를 포함해 문제가 많았지만, 힘의 한계를 인정하고 독점이나 독주보다 연합과 협력을 추구하고 이를 통해 정당정치 본연의 역할을 중시했다는 점에서는 평가해야 할 측면이 있다. 대통령이 정당 정치의 한 요소가 아니라, 정당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혹은 정당 정치를 지배할 수 있는 독자적인 대중 권력을 직접 동원하는 것이야말로 한국 정치의 새로운 특징이자 위협요인이 아닐 수 없다.
정치가 의회나 정당이 아닌 대통령 당파에 의해 압도되면서 정견이나 이념, 신념의 가치는 나타날 수 없게 되었다. 정책 논쟁이든 제도 논쟁이든 대통령 당파에 유리한지에 대한 판단이 모든 결정을 압도했다. 권력은 능력도 대표성도 아닌 대통령과의 거리에 의해 배분되었고, 여론 공론장을 지배하는 것도 박사모나 문파(빠)처럼 열성 지지자 집단들이었다.
이들이 여론을 주도함에 따라 독립 언론이라고 불릴 만한 매체도 점차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방송도 별로 다르지 않다. 공중파 방송도 넓게 보면 종편과 마찬가지로 진영의 관점에 의해 압도되는 방향으로 변했다. 시민단체도 마찬가지로 대통령을 둘러싸고 찬반 집단으로 나뉘어 양극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권력정치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 후보들부터 변화 요구해야
첫째, 청와대 비서실 정부에 대한 개혁 비전은 있는가? 둘째, 국회와의 관계, 야당과의 관계를 포함해 국정 운영의 새로운 방안은 있는가? 셋째, 지금의 대통령제가 민주주의 발전을 억압하는 쐐기 역할을 할 수 없도록 통치구조 개혁을 할 의사는 있는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대선 후보들이 답해야 한다.
지금 당장 개헌을 하고 대통령제 폐지하고 내각제로 대체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해도, 지금의 대통령제가 왜 민주주의의 가치와 충돌하는지, 왜 정치를 나쁘게 만들고 국회나 정당정치의 기능이 발휘될 수 없게 하는지, 어떤 변화나 개선이 필요한지에 대한 사회적 공론을 열고 점차적인 권력 구조 개선안을 만들어가는 노력을 해야 할 때이다.
-정부가 될 수도 없고 돼서도 안 되는 대통령비서실이 사실상 최고 통치기구 역할
-불평등도 개선하고 복지도 발전시킨 나라들은 대통령 중심제 아닌 의회 중심제
-민주주의는 의회와 정당 통해 다원적 조정과 협력, 타협. 더 큰 합의 기반 만들어
3. 청와대 정부 개혁, 모든 일의 전제다
1) 청와대 정부는 헌법과 법률에 반한다
□ 정부가 될 수도 없고 돼서도 안 되는 대통령비서실이 사실상 최고 통치기구 역할
청와대 비서실은 대통령이 자의적으로 기구를 만들고 인사권을 행사하며 자유롭게 운영할 수 있는 임의조직이다. 한마디로 말해 헌법 기관이 아닌데도 그 어떤 헌법 기관보다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이들 가운데 누구도 국회 청문회를 거친 인사는 없다.
그런데도 비서실장이 총리급 권위를 행사하고, 정책실이 경제-사회-교육 부총리 포괄하는 역할을 하며, 수석과 보좌관들은 각부 장·차관은 물론이고 관련 권력기구들을 통제하는 권한을 행사한다. 국회 운영위조차 감사 권한을 행사할 수 없는 막강한 청와대 권력이다. 비서관이 차관 인사에 개입하고 행정관 인사가 장관 인사보다 더 비중 있게 다뤄지는 경우도 있다.
대통령이 집권당과 함께 내각과 부처를 통해 일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부다운 길이다. 민주화를 왜 했겠는가? 청와대가 중심이 되어 정부를 운영하려 한다면 권위주의 체제를 그대로 두고 대통령만 잘 뽑는 것이 가장 나을 것이다. 청와대 정부는 권위주의에 맞는 모델이지 민주 정부에 맞는 모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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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불평등 구조도 개선하고 복지도 발전시킨 나라들은 대통령 중심제 아닌 의회 중심제 국가들이었다.
□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까지 관장하려는 비서실 권력
개헌을 포함해 입법과 사법 기능 전반을 통할하고자 하는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는 문제가 심각하다. 견제와 균형을 핵심 원리로 한 헌법 규범과 배치되고, 권한과 책임의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는 정부조직법의 취지에도 반하는 일이다.
우리 헌법은 비록 그 틀이 권위주의 시기 만들어졌음에도, 대통령의 정부 운영은 국정 전반에 대한 심의권을 가진 국무회의와 행정각부 통할권을 가진 총리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다. 이점을 재삼 강조하고 중시해야 한다.
2) 청와대 정부로는 큰 변화를 만들 수 없다
□ 청와대가 개혁의 센터?
“청와대 주도의 정부 운영은 개혁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하거나, 청와대를 “개혁의 센터”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즉 ① 기득권과 적폐 세력이 워낙 강해서 강한 대통령 권력을 집권 초부터 다부지게 앞세워야 개혁할 수 있다 ② 다툼과 소모적 논란으로 일관하는 국회에 맡겨서는 아무 일도 안된다. 이런 식의 논리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내전을 벌일 일이지 정치를 할 일이 아니게 된다.
□ 의회 역할 없이 큰 개혁 없다
권위주의에서라면 대통령 권력이 강할 때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그게 권위주의의 특징이다. 민주주의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지난 200년 가까운 시기 동안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의 역사적 경험과 현재 120개 정도의 민주주의 국가들의 현실을 놓고 볼 때, 자본주의 불평등 구조도 개선하고 복지국가도 발전시킨 나라들은 어디일까? 대통령 중심제 국가가 아니라 의회 중심제 국가들이었다.
민주주의란 시민이 법을 만들고 자신이 만든 법에 시민이 따르는 체제이다. 행정부와 사법부에게 위임된 것은 주권이 아니라 법을 집행하고 적용하는 기능과 권한이다. 그 역할을 못하면 제1의 주권기관인 입법부의 불신임을 통해 그 권한을 회수한다는 것이 애초 시민 주권의 핵심이다. 큰 개혁 사안일수록 입법부의 뒷받침 없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정당들의 협조 없이 큰 개혁이 평화적이고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권위주의는 반대나 이견을 억압하고 일방적인 힘의 논리로 변화를 만든다. 민주주의는 갈등과 차이를 억압할 수 없기에 의회와 정당을 통해 다원적 조정과 협력, 타협을 통해 더 큰 합의 기반을 만들어 일한다. 이견과 갈등은 권위주의와 양립하기 어렵지만 민주주의는 그런 차이를 변화/개혁의 엔진으로 삼기에 정당성은 물론 사회통합의 효과도 발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