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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전선2 망명 쌍추연역

나레이션
(어둠. 온통 어둡다.)
나레이션
(자욱한 안개가 더해진 어둠이 내 눈을 가리고, 어디선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메아리를 듣건대, 엄청 넓은 공간 같다.)
나레이션
(여기는... 분명...)
신원불명
떠날 셈인가?
신원불명
이유를 듣고 싶군.
신원불명
무너진 질서를 바로 세워, 갈기갈기 찢어졌던 이 세상이 마침내 하나가 되는 걸세.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새로운 세상, 새로운 질서로 재구성됐어. 이제 우리의 칼끝이 미래를 새로 쓸 차례야.
###
..."우리"라뇨, "당신"이겠죠.
애당초 반드시 저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당신에게 있어 저는 언제든지 대체할 수 있는 도구, 장기말일 뿐이죠.
더는 당신에게 부려먹히지 않겠습니다.
신원불명
어떤 선택을 하려는지 알고 싶을 뿐이네.
###
“절대적인 진리를 신봉하는 고슴도치는, 세상을 단 하나의 틀에 넣고 가시를 세워 다른 사상을 모조리 거절했다.”
“반면 교활하고 변덕스러운 여우는, 어지러운 시대의 파도 속에 숨어 눈을 가늘게 뜨고 세상을 뒤집을 불협화음을 찾아 나섰다.”
###
그때의 질문에 대한 답을 지금 하겠습니다.
신원불명
고슴도치는 되지 않겠다?
###
여우가 될 생각도 없습니다.
신원불명
도피로군.
###
아뇨, 더는 당신에게 이용당하기 싫은 겁니다.
제가 했던 모든 선택이, 결국엔 전부 당신과 당신 같은 빌어먹을 작자들을 위한 발판이 됐습니다.
###
그런데 제가 무슨 선택을 하든 무슨 상관이죠? 세상은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았습니다, 제 선택으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신원불명
이전의 일에 대해서는 해명하지 않겠네. 허나 자네는 선택을 함으로써 지나간 과거를 딛고 넘어서야만 해.
도피는 어떠한 결과도 내지 못하네. 스스로를 동정하는 것은 겁쟁이나 하는 짓일세.
###
도피? 겁쟁이? 하, 마음대로 생각하시죠.
다시는 저를 찾지 마십시오, 돌아올 생각도 없으니. 저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이것이 제가 선택하는 망명길입니다.
###
안녕히 계십시오, 훈작사.
신원불명
올바른 선택을 하게. 자네는 결국 올바른 길로 되돌아올 운명이야.
이 짧은 이별을 충분히 즐기게나.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그날까지.
신원불명
지휘관.
지휘관
아야야...
나레이션
(메인 콘솔 앞에서 바쁜 그로자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나를 불렀다.)
그로자
깼어, 지휘관?
커피 머신 옆 테이블에 해장차 뒀어.
지휘관
해장... 뭐?
그로자
해장차.
메이링이 취했을 때 적어놓은 레시피대로 한번 만들어 봤어. 마셔봐.
지휘관
메이링이...?
나레이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테이블로 가, 이미 식어버린 호박색 액체가 든 잔을 들었다.)
지휘관
...이거 뭐 들어간 거야?
그로자
이름부터 이상한 재료들.
지휘관
잘 알지도 못하는 걸 내게 먹이시겠다?
그로자
“나는 너의 방패와 검이 되어 줄 테니, 너는 내가 만든 모든 것의 맛을 봐 줘.”
설마 까먹었다고 하진 않겠지?
지휘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런 수명 깎는 약속은 안 했지...
지휘관
――크헥?! 콜록콜록! 매, 매워!
이거 정말 마셔도 되는 거 맞아?!
그로자
맛은 몰라도 효과는 확실한 모양이네?
지휘관
윽... 확실히 냄새만 맡아도 정신이 확 드네...
지휘관
남은 건 다음 파티 때 쓰게 남겨 둘까.
그로자
한동안 파티는 없을 거야, 어제 누구누구 씨가 메이링의 컬렉션을 싹 털어다 캐롤릭의 환영식에 써버렸는걸.
그거, 어떻게 보상해 줄지는 생각했어?
지휘관
...요즘 루련에서 개척 계획 추진에 더 속력을 내고 있는 것 같고.
거기에 바랴그단도 여기저기서 날뛰지, 시생물도 갈수록 자주 보이지, 임무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
나레이션
(테이블 위의 단말기를 보니, 화면은 여전히 임무 인터페이스에 머물러 있었다.)
나레이션
(임무 번호 TASK-3115, 물품 운송. 임무 시작 후 오늘로 25일째인데, 진도는 아직 63%다.)
나레이션
(임무 수행 예산에 시간을 곱해서, 돈으로 환산하면...)
지휘관
......
그로자
그래서?
지휘관
돈벌이가 어려워져서, 우리 엘모호도 매월 적자라고...
그러니까 메이링의 쌀술은 임무 끝난 다음에 얘기하자. 뭐어, 이해심 없는 애도 아니잖아?
그로자
우리도 요즘 들어 지출이 갈수록 늘어서 꾸준히 의뢰를 받아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
새 멤버가 들어왔으니 상황이 조금은 호전되겠지만.
지휘관
캐롤릭 말이지?
드디어 네메시스와의 소통 문제가 해결되는구나...
지휘관
다른 애들은?
그로자
지금 여유 있는 애들은 모두 엔진룸에서 메이링을 도와 벡터 엔진을 점검 중이야. 3시간 전에 드론이 붕괴폭풍을 포착했거든. 이쪽으로 접근 중이야.
지휘관
3시간 전... 그럼 우리 지금 폭풍 안에 있는 거야?
그로자
포착했을 당시엔 다들 휴식 중이었거든. 그래서 차량도 그냥 기존에 설정된 경로대로 이동했어.
지휘관
여기 붕괴폭풍 다발 지역이었나?
그로자
글쎄? B.R.I.E.F.가 제공한 환경 정보엔 그런 주의 사항은 없었어.
지휘관
거 참 믿음직하네... 주변 지형도 띄워 봐.
나레이션
(그로자의 조작으로 지휘실 보조 스크린에 지형도가 표시됐다.)
그로자
보다시피 우린 지금 붕괴폭풍에 다가가고 있어.
역풍 방향에 협곡이 있지만, 지형이 많이 복잡해서 폭풍을 피하러 갔다가 매복에 당할 위험이 있어.
지휘관
...벡터 엔진이 아직 점검 중이야. 이대로 폭풍을 맞는 게 더 위험해. 협곡으로 들어가자.
그로자
최근 기지차량의 잔고장이 부쩍 늘었어, 언제 한 번 대대적으로 점검해야 할 거야.
지휘관
그야 10년이나 굴렀으니...
이번 임무 마쳐서 보수 들어오면 엘모호부터 통째로 뜯어고치자.
그로자
그래서 말인데, 이번 임무, 보수가 너무 센 것 같지 않아?
지휘관
그렇지... 게다가 그린존까지 들어가야 하니, 여간 고생이 아닐 거야.
그래도 현상금 사냥꾼이니까, 돈을 받았으면 얌전히 심부름을 해야 먹고 살지.
그로자
...당신의 지난 10년간의 행실 중에 어디가 얌전하단 걸까?
지휘관
음... 더 예전에 비하면 얌전하지 않나?
그로자
...그건 그렇네.
그로자
협곡의 실제 고도가 지형도 데이터랑 달라. 폭풍 때문에 드론을 내보낼 수도 없어서 주변 지형 정보와 실시간 정황을 파악하기 힘들어. 이런 상황에서 계속 전진하면 매복에 당할 위험이 더욱 높아질 거야.
지휘관
즉,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모른다... 벡터 엔진 정비는 어때?
그로자
여전히 작업 중.
지휘관
출력 상한 해제하고 전속력으로 통과한다.
...나중에 시장 들르면 메이링한테 술 몇 병 사 줘야지.
그로자
협곡 통과 예정 시각 08시 54분.
나레이션
(그리고 지휘실은 조용해졌다.)
나레이션
(하지만 시간은 확실하게 흘러, 이윽고 협곡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
깨워.
??
얌마, 일어나!
??
칫.
지휘관
......
??
깼냐?
지휘관
...그 마크, 바랴그단이냐?
바랴그단 두목
흥.
지휘관
좀 더 편하게 묶을 순 없었어?
바랴그단 두목
하, 주둥아리는 살아가지고.
맨몸으로 붕괴폭풍 쐐본 적 있냐?
지휘관
......
유감스럽게도 아직은.
바랴그단 두목
거 참 잘 됐구만, 이참에 체험시켜 주랴?
나레이션
(나는 몸을 최대한 펴, 가슴 아래의 신원 식별 추적기가 제자리에 있는 걸 확인했다.)
바랴그단 두목
뭐냐! 가만 안 있어!?
지휘관
다리 저려서 좀 펴는 것도 안 되냐.
바랴그단 두목
수작 부릴 생각 말고 있는 대로 다 불어!
지휘관
불라니, 뭘?
지휘관
내가 어제부터 내내 술만 마셔서... 아, 차 한 잔도 마셨지.
지금 불면 입냄새 끔찍할 텐데?
바랴그단 두목
헛소리 말고 새꺄! 이 망할 것 여는 법 불라고!
지휘관
망할 것? 지금 네 발밑의 그 상자 말이야?
상자 따는 일은 너네 바랴그단이 아주 전문이라 들었는데.
지휘관
...큭!
바랴그단 두목
혓바닥 놀리는 것도 눈치 봐 가면서 해라.
오늘이 제삿날 되기 싫으면 당장 이거 열라고!
지휘관
...패스워드가 필요해.
바랴그단 두목
이거 하나 여는데 비번이 필요하다고?
지휘관
그래, 비밀번호.
그걸 가져가려는 이유를 말하면 비밀번호를 알려 줄게.
바랴그단 두목
이이유우~?
바랴그단이 물건 뺏는데 이유가 필요하냐? 눈치 있으면 이거 말고도 돈 될 만한 거 다 꺼내!
지휘관
...돈 때문이라면, 우리 거래하는 건 어때?
몸값 낼 테니까 그 상자랑 같이 풀어 줘.
바랴그단 두목
거래는 개뿔, 그딴 고물딱지나 끌고 다니는 놈이 뭔 돈으로?
지휘관
음, 그건 좀 상처받네.
바랴그단 두목
비번이나 빨리 불어!
지휘관
비번이 많이 복잡해서 말이지, 조금――커흑!
바랴그단 두목
대가리 따서 직접 속을 뒤져봐야겠냐?
지휘관
...우리 의뢰인이, 긴급 상황 아니면 열지 말라고 해서 말이다.
그리고 패스워드는 내 차량 콘솔 안에 있어.
바랴그단 두목
헛소리가 풍년이네 이 새끼가! 네 차랑 그 고물 인형들이랑 싹 다 찌꺼기 하나 안 남기고 박살냈어 임마!
지휘관
박살냈다...
이상하네, 멀쩡해 보이는데?
바랴그단 두목
뭐라고!?
바랴그단원
형님!
나레이션
(지프를 타고 어느 정도 달린 뒤, 나는 의료상자를 꺼내 어깨의 총탄이 스친 상처를 응급처치했다.)
지휘관
뭐 하다 이제 왔어?
??
들판 위. 폭풍이 모습을 감추어, 볼 수 없는 사물...
지휘관
어... 응, 그렇구나.
그로자, 캐롤릭은? 그리고 너희 왜 더미 소체야?
그로자
지휘실에 있던 나, 그리고 엔진룸에 있던 캐롤릭과 네메시스 모두 폭발에 휘말렸어. 메이링은 빈 연료통 속에 숨어서 살았고.
소체 격납고가 완파돼서 나와 네메시스의 마인드맵을 그나마 무사했던 더미용 소체에 인스톨할 수밖에 없었어. 지금 인스톨 끝나자마자 온 거야.
그로자
메이링은 지금 드론 엘리베이터를 수리 중이라 공중 지원을 받으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해.
지휘관, 지시를.
지휘관
......
상자를 탈환한다.
나레이션
(조수석에서 주위를 경계하던 그로자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로자
...그러면 당신을 지킬 사람이 없어.
지휘관
지금 내가 보호가 필요한 상태로 보여?
저 상자를 뺏기면 우린 쫄쫄 굶어야 된다고.
그로자
......
그로자
알았어.
나레이션
(지프를 타고 어느 정도 달린 뒤, 나는 의료상자를 꺼내 어깨의 총탄이 스친 상처를 응급처치했다.)
지휘관
뭐 하다 이제 왔어?
??
들판 위. 폭풍이 모습을 감추어, 볼 수 없는 사물...
지휘관
어... 응, 그렇구나.
그로자, 캐롤릭은? 그리고 너희 왜 더미 소체야?
그로자
지휘실에 있던 나, 그리고 엔진룸에 있던 캐롤릭과 네메시스 모두 폭발에 휘말렸어. 메이링은 빈 연료통 속에 숨어서 살았고.
소체 격납고가 완파돼서 나와 네메시스의 마인드맵을 그나마 무사했던 더미용 소체에 인스톨할 수밖에 없었어. 지금 인스톨 끝나자마자 온 거야.
그로자
메이링은 지금 드론 엘리베이터를 수리 중이라 공중 지원을 받으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해.
지휘관, 지시를.
지휘관
......
상자를 탈환한다.
나레이션
(조수석에서 주위를 경계하던 그로자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로자
...그러면 당신을 지킬 사람이 없어.
지휘관
지금 내가 보호가 필요한 상태로 보여?
저 상자를 뺏기면 우린 쫄쫄 굶어야 된다고.
그로자
......
그로자
알았어.
나레이션
(옐로우존, 협곡의 개활지.)
나레이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붕괴폭풍 속을 나아가던 지프가, 지면에 튀어나온 돌부리를 밟아 심하게 요동쳤다.)
나레이션
(한쪽 발만 창문틀에 걸친 채 루프 위에서 작업하던 그로자가 균형을 잃어 떨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나레이션
(이 와중에 가까운 절벽 위의 붕괴폭풍에 휩쓸린 커다란 돌덩이가, 하필이면 이쪽으로 굴러오고 있었다.)
나레이션
(그리고 지프가 돌부리에 걸려 속도가 급격히 떨어진 탓에, 끈질기게 쫓아오던 바랴그단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나레이션
(선두의 바랴그단 졸개가 루프에서 우리와 상자를 향해 화력을 퍼부었다.)
그로자
지휘관, 상자를 고정할 수가 없어!
지휘관
칫...!
지휘관
(포탄과 돌덩이가 거의 동시에 지프와 상자에 도달했고, 꼼짝 못하는 그로자는 어느 것도 막을 수 없었다.)
지휘관
그로자!
지휘관
(계속되는 흔들림과 전투에 상자의 금이 점점 벌어지다가, 결국 폭발했다.)
지휘관
(우연일까, 터진 상자의 파편이 포탄과 돌덩이를 튕겨냈다. 하지만 그 충격파로 지프의 한쪽 모서리가 움푹 패였고, 그로자도 차 밖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지휘관
차 세워 네메시스!
지휘관
(네메시스는 급정거를 밟아 차를 세웠다.)
지휘관
(부서진 상자가 뱉어낸 것은 조금 작은 사이즈의 상자였다. 겉보기만으론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지휘관
(그런데 작은 상자가 공중에서 살짝 움찔하는가 싶더니, 충격파에 떠밀려 그로자와 함께 몇 미터 정도 날아갔다.)
지휘관
......?
지휘관
저게 무슨...?
그로자
지휘관...!
그로자
(붕괴폭풍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상자 가까이에 떨어진 그로자가 힘겹게 일어섰다.)
그로자
(차를 멈추니 추격해 오던 바랴그단에게 둘러싸이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다만 놈들의 두목이 탄 차량은 졸개들 뒤로 저 멀리에서 멈췄다.)
바랴그단 두목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냐?
지휘관
......
지휘관
목숨을 낭비하는 건 아주 멍청한 짓이야.
그리고 우리도 너희한테 쓰기엔 총알값이 좀 많이 아깝거든?
바랴그단 두목
...저 상자 가져와.
바랴그단 두목
저 자식은 죽여버리고!
바랴그단 두목
얼른 안 가!? 저 상자 가져오라고!
나레이션
(바랴그단들이 잠깐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포위망은 여전히 조금 느슨했다.)
지휘관
머릿수 차이가 심각한걸...
그로자, 상황은?
그로자
움직일 순 있지만 타이어가 터져서 느릴 거야.
바랴그단 두목
야 이 쫄보 놈들아! 고작 몇 명 상대로 뭘 꾸물거려!? 한꺼번에 공격하라고!
지휘관
드론 지원은 언제 와?
그로자
출발 전에 메이링이, 엘리베이터가 언제 다 고쳐질지 알 수가 없다고 했었어. 지금은 붕괴폭풍의 영향 때문에 통신도 불가능하니...
좀 더 버텨야 할 거야, 지휘관.
지휘관
좀 더 버티려다 지휘관 새로 모시게 생겼는데.
바랴그단 두목
큰 거 가져와! 후딱 해치운다!
지휘관
저건...?
그로자
개조 기갑이야! 대구경포를 탑재했어, 빨리 차에서 내려!
나레이션
(붕괴폭풍이 몰아치는 한복판에, 공업용 기계를 개조한 듯한 기갑이 위풍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나레이션
(놈들의 차량들 뒤에서 나타난 기갑은, 제자리에 굳어버린 졸개들의 차를 거칠게 밀어내며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바랴그단 두목
어디 내 포탄을 맞고도 총알이 아깝나 보자고!
나레이션
(뜻밖에 등장한 놈들의 비밀병기는 문자 그대로 설상가상이었다. 너덜너덜해진 내 지프는 다가오는 기갑에게 무용지물이었다.)
지휘관
아무래도――여기까진가 보다.
??
지휘관!
바랴그단 두목
얼른 안 가!? 저 상자 가져오라고!
나레이션
(바랴그단들이 잠깐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포위망은 여전히 조금 느슨했다.)
지휘관
머릿수 차이가 심각한걸...
그로자, 상황은?
그로자
움직일 순 있지만 타이어가 터져서 느릴 거야.
바랴그단 두목
야 이 쫄보 놈들아! 고작 몇 명 상대로 뭘 꾸물거려!? 한꺼번에 공격하라고!
지휘관
드론 지원은 언제 와?
그로자
출발 전에 메이링이, 엘리베이터가 언제 다 고쳐질지 알 수가 없다고 했었어. 지금은 붕괴폭풍의 영향 때문에 통신도 불가능하니...
좀 더 버텨야 할 거야, 지휘관.
지휘관
좀 더 버티려다 지휘관 새로 모시게 생겼는데.
바랴그단 두목
큰 거 가져와! 후딱 해치운다!
지휘관
저건...?
그로자
개조 기갑이야! 대구경포를 탑재했어, 빨리 차에서 내려!
나레이션
(붕괴폭풍이 몰아치는 한복판에, 공업용 기계를 개조한 듯한 기갑이 위풍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나레이션
(놈들의 차량들 뒤에서 나타난 기갑은, 제자리에 굳어버린 졸개들의 차를 거칠게 밀어내며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바랴그단 두목
어디 내 포탄을 맞고도 총알이 아깝나 보자고!
나레이션
(뜻밖에 등장한 놈들의 비밀병기는 문자 그대로 설상가상이었다. 너덜너덜해진 내 지프는 다가오는 기갑에게 무용지물이었다.)
지휘관
아무래도――여기까진가 보다.
??
지휘관!
??
지휘관님! 들리시나요? 지휘관니이임!
나레이션
(붕괴폭풍을 뚫고, 드론 2대가 나의 위치로 급강하했다.)
나레이션
(드론에 장착된 단거리 통신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신호 교란 때문에 뚝뚝 끊겼지만,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우리 모두 안도했다.)
지휘관
메이링, 타이밍 환상적이었어. 기지차량은 어때?
메이링
우리 망해써여 지히간니이임!! 엘모호 완전 구멍 송송 바람 숭숭이에여어어!!
지휘관
...아...
메이링
창고 물자도 부품 재고도 전멸이에요! 제가 모아뒀던 붕괴결정 샤드까지 싹 다 털렸다고요! 으아앙!!
지휘관
어... 메이링? 괜찮아, 샤드는 다시 모으면 되잖아. 일단 우릴 여기서 탈출시켜 줘.
드론 얼마나 더 날 수 있어?
메이링
아...! 아아 그렇지! 지휘관님이 계시니까 돈은 또 벌면 되죠!
나레이션
(메이링은 드론 한 대로 개조 기갑에게 제압 사격을 가하는 동시에, 다른 한 대를 살짝 먼 위치의 안전한 절벽 위에 착륙 대기를 시켰다.)
메이링
지금 드론에 남은 연료면 56분은 버틸 거예요! 빨리 타세요!
지휘관
그로자, 네메시스, 철수한다.
상자 챙겨!
나레이션
(드론이 임시 수리된 엘모호의 루프 엘리베이터 위에 비상 착륙했다.)
나레이션
(우리는 잔해 속에서 몸부림치며 기어나와야 했고, 그 바람에 내 어깨의 상처가 벌어져 피가 스며나왔다.)
지휘관
아야야야...
그로자
지휘관, 피가...
지휘관
스친 것뿐이야, 나중에 정밀 검사 받을게. 메이링은?
나레이션
(때마침 메이링이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나타나 헐레벌떡 달려왔다.)
지휘관
아, 메이링? 우리 지금 붕괴 방사선에 절여지고 왔으니까 감동의 포옹은 나중에 할까?
메이링
무슨 태평한 소리예요?! 지금 구동부도 통신 설비도 죄다 망가졌다고요! 제어 시스템은 일부나마 어떻게든 고쳤지만, 부품 재고에 인형 소체까지 전부 포함해서 창고가 완전히 박살났어요!
메이링
새 설비를 장만하려 해도 예산이 이미 바닥인데... 지휘관님, 아직 비상금으로 꿍쳐둔 샤드 있으시죠? 그렇죠? 제발 그렇다고 해 주세요!
지휘관
...그래, 내가 낼게.
메이링
다행이다아...!
지휘관
하지만 통신 설비가 망가진 상태로는 B.R.I.E.F.에 발주를 넣을 수 없겠지?
메이링
아.
그로자
벡터 엔진은 어때?
메이링
어... 어떻게든 작동은 하는데요, 제어 시스템을 제대로 수리하려면 부품이 부족해요. 지금 상태론 차량에 무리 안 가게 움직이려면 시속 25km밖에 못 내요.
그로자
통신 설비는 얼마나 망가졌는데?
메이링
송신기째로 터져버렸어요.
차내 예비 시스템을 쓰면 단거리 통신은 가능하겠지만, 신호 증폭 및 중계에 필요한 통신 장치가 완전히 박살나서... 네트워크 연결이나 장거리 통신은 무리예요.
그로자
어떻게 고칠 순 없을까?
메이링
으음, 예비 부품이 있었지만 창고랑 같이 펑 해서요...
지휘관
상황이 많이 힘들긴 해도, 임무 물품인 상자는 아직 우리에게 있어.
이 임무만 완수하면 엄청나게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다고.
메이링
저, 정말요...?
지휘관
당연히 정말이지.
지금은 먼저 통신과 이동수단을 복구해야 해, 나머진 천천히 해결할 수 있어.
나레이션
(그로자가 짊어졌던 상자를 내려놨다. 그런데, 그로자가 멀어지자 그때까지 덜덜 떨리던 상자가 바로 진동을 멈췄다.)
그로자
이 안에... 여자아이가 있는 것 같았는데?
지휘관
네메시스, 어떻게 생각해?
네메시스
불꽃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혈관을 도는, 냉엄한 독재자의 귀환...
그로자
...소체도 전부 잃어서 캐롤릭을 재기동할 수가 없어.
지휘관
이렇게 봐서는 비싸기만 한 평범한 상자 같은데...
그런데, 왜 지금은 진동하지 않는 거지? 그로자, 다시 가까이 가 봐.
나레이션
(그로자가 접근하자, 상자가 다시 떨기 시작했다.)
지휘관
네메시스, 네가 해봐.
나레이션
(그로자가 멀어지고 네메시스가 가까이 가도, 상자는 계속 진동했다.)
지휘관
그로자가 문제인 건 아닌가 보군... 메이링?
나레이션
(네메시스가 멀어지자마자 바로 상자의 진동이 멎었다.)
메이링
저와 지휘관님의 공통점이라면... 인간이라는 점이려나요?
지휘관
......
지휘관
후속 임무 계획부터 확인하자, 전원 지휘실로 집합.
메이링, 안전한 곳에 상자 보관하고 수리 작업 계속해 줘.
메이링
아, 네!
그로자
차량 전체 자가 진단 개시, 완료 예상 시각 08시 12분.
나레이션
(나는 지휘실의 창문 앞에 섰다. 지금 창밖은 신기하리만치 조용했다.)
지휘관
지속되는 붕괴폭풍, 기상 데이터 오류, 지형도 오류, 임무 정보 유출... 우연이라기엔 지나친걸.
그로자
이 습격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
지휘관
틀림없어. 이 주변 환경 정보, 누구한테 얻은 거야?
그로자
구매 기록에 따르면 인근 B.R.I.E.F. 지부야. 태그는 일반 정보. 정보 제공자한테 딱히 특이사항도 없고.
지휘관
임무 의뢰인은?
그로자
수주할 때부터 익명 의뢰였어. B.R.I.E.F. 본부에서 주선한 건이고, 그 이상의 정보는 없어.
그로자
보수가 높아서 많은 현상금 사냥꾼들이 쟁탈전을 벌였지만, 결국 우리가 따냈지.
나레이션
(그로자는 일하던 손을 멈추고 몸을 살짝 기울여 나를 바라봤다.)
그로자
...아직 네트워크에 접속 불가능이라 정보 갱신이 안 돼. 하지만 지금 파악한 정황으로 본다면, 보수가 이상하게 높은 것만 빼면 일반적인 의뢰와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아.
지휘관
......
지휘관
우선 통신부터 복구해. 네트워크에 접속이 돼야 물자를 조달해서 기지차량을 수리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빨리 소체를 구해서 캐롤릭을 재기동해야 해, 네메시스의 묘한 직감이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
네메시스
...밤 안개 속을 배회하는 그림자... 뾰족한 모서리...
지휘관
어... 아, 알았어.
네메시스
......
그로자
시생물 무리 접근 중, 위협 수준 II~III.
지휘관
해치워.
그로자
차량 자가 진단 완료, 차체 손상도 49%.
네메시스가 메이링을 도와서 응급 처치 중이야. 부품이 심각하게 부족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어.
그로자
지금 행동 가능한 전술인형은 나와 네메시스뿐이야. 더 위협적인 시생물이 나타나거나 바랴그단이 쫓아온다면 대처하기 힘들 거야.
지휘관
뭐가 됐든 기지차량부터 움직여야지.
그로자
목적지는?
지휘관
계속해서 ZJKK32E-U8PB4Q로 나아가고는 싶지만, 지금 상태로는 역시...
그로자
후훗...
그로자
왠지 예전하고 비슷한 느낌이네.
지휘관
......?
그로자
지휘관이 막 현상금 사냥꾼이 돼서, 오염지대에서 의뢰를 처리하던 때 말이야.
곧잘 이렇게 어쩔 줄 몰라하곤 했는데.
지휘관
그때인가... 하하.
그로자
그 시절의 당신은 지금이랑 아주 딴판이었어.
지휘관
그 시절의 너도 지금이랑 아주 딴판이었지.
...아니, 지금이 "예전"의 너 같다고 해야 하나.
그로자
......
지휘관
오염지대로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적응도 제대로 못하고 연달아 손해를 본 뒤에야 내가 더는 예전의 "지휘관"이 아니란 걸 깨달았지.
그로자
...당신은 당신이야.
지휘관
가장 기본적인 B.R.I.E.F. 시스템도 제대로 못 썼는데?
나레이션
(그리 말하면서, 정말 힘겨웠던 그 몇 년을 떠올렸다.)
나레이션
(처음에는 나 혼자뿐이었거니와 당시엔 현상금 사냥꾼이 제대로 된 직업도 아니었기에, 나는 사소한 개인 의뢰나 맡으면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나날을 보냈다.)
나레이션
(그러다 그로자를 "주워" 다시 함께하게 되었고, 그 후엔 둘이서 함께 메이링을 구조하게 되었다.)
나레이션
(그러고 얼마 안 있어 B.R.I.E.F.가 설립되었다. 마침내 공식적인 현상금 사냥꾼 업무 루틴과 행정 시스템이 구축됐고, 그제서야 엘모호도 제대로 굴러갈 수 있게 되었다.)
나레이션
(그로자는 나의 몹쓸 꼴을 수도 없이 보면서도, 언제나 내 곁을 지켜 주었다.)
그로자
암상인의 사설 네트워크랑 루련의 공공 네트워크조차 구분 못해서, 의뢰 물품 정보를 루련 관공서에 보내버렸지. 게다가 정보 내역에 금지 품목도 있어서 한 달 정도 수배당했을 뿐이야.
지휘관
...오염지대에선 신호가 워낙 나쁘다 보니까, 네트워크를 왔다갔다하다가 실수한 거야. 그럴 수도 있지.
지휘관
하지만 지금은 B.R.I.E.F.가 중간에서 조율해 주고, 암시장 네트워크와 루련 네트워크의 통신 코드도 확실하게 구분할 줄 아니까, 메시지를 잘못 보내는 일은 아마 없을...!
그로자
지휘관, 루련 네트워크!
지휘관
그렇지, 비콘! 장성열차 주둔군이 오염지대에 설치한 신호탑!
그로자
드론을 타고 올 때 장성열차가 있었어, 분명 비콘도 근처에 있을 거야.
지휘관
좋아, 비콘으로 가자!
지휘관
설비 하나를 "빌려서" 통신을 복구하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길 거야.
그로자
이 일대의 비콘은 많이 낡았어, 지금 사용 가능한 건 이 두 개뿐이야.
메이링
으음... 이 모델, 너무 구닥다리라서 엘모호의 통신 모듈이랑 호환이 잘 안 될 거 같아요.
그로자
이 부근의 정화구역, 코드 번호가 여전히 W_2069네.
지휘관
2069? 정화 효율 한 번 끝내주는구만...
통신 설비는 쓸 수 있겠어?
메이링
호환은 잘 안 되긴 해도 어떻게든 쓸 수는 있겠어요. 중거리 통신이라면 문제 없을 거예요.
지휘관
중거리라... 메이링, 신호에 잡히는 모든 채널에 "화창한 날씨, 사막에 울리는 세이렌의 노래"라고 송신해.
메이링
아, 네!
나레이션
(메시지를 보내고 얼마 안 가 답신이 왔다.)
메이링
메시지를 받았어요. "샤드를 준비해라, 아르파공이 기다리고 있으마." 그리고... 이건 통신 코드일까요?
지휘관
이 녀석... 통신 코드 맞아, 그걸로 호출해.
나레이션
(통신은 곧바로 연결되었다.)
??
아아니, 이 늦은 시간에 뉘신가 했더니만.
지휘관
...폴루드니차.
폴루드니차
아이고~ 우리 지휘관님 아니신가~?
지휘관
이 암구호를 나 말고 또 누가 쓰는데.
폴루드니차
호오? 그래서, 아르파공의 세례를 받으실 준비가 되었나 봐?
지휘관
아니, 그냥 마침 이 근처에서 거래할 수 있는 유일한 암상인이 너였을 뿐이야.
폴루드니차
에이, 팍 식네.
나 삐졌어, 가격 비싸게 받는다?
지휘관
그건 좀 봐줘라...
지금 기지차량용 각종 모듈 부품이랑 인형 소체가 잔뜩 필요해.
폴루드니차
새로 사업이라도 하나 벌일 셈이야? 아니면...
지휘관
...그래, 습격당했어.
폴루드니차
캬~ 이제야 좀 우주의 균형이 맞는 거 같네! 그 동안 여기저기 일만 벌리고 다니더니 웬일로 된통 당했대?
지휘관
된통까진 아니고, 아직 평범하게 의뢰 진행 중이야.
지휘관
뭐, 약간 수상한 의뢰인데다 여러모로 우연이 겹치긴 했지만, 일단 화물은 우리 수중에 있어.
의뢰 마치고 보수 받으면, 엘모호의 전면 개수를 너한테 맡길게.
폴루드니차
엘모호의 전면 개수...? 설마 그 비싼 의뢰를 네가...?
지휘관
어느 걸 말하는진 모르겠다만 일단 아주 비싼 의뢰인 건 맞지.
폴루드니차
오오--
폴루드니차
근데, 그 의뢰 말이야...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더라?
지휘관
뭐라고?
폴루드니차
아직은 비~밀~
주문품 가지러 오는 김에 이쪽 골칫거리 좀 해결해 주면, 내가 살짝쿵 가격 할인에다 공짜 정보도 제공할게.
지휘관
...지금 난 드론도 인형도 거의 전멸한데다 쓸 수 있는 지프도 한 대밖에 없는데.
폴루드니차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지금 특수한 시기라 배달은 못 해줘. 그리고 이 공짜 정보는 비매품이라서~
지휘관
하아... 뭐가 말썽인데?
폴루드니차
아니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고, 최근에 들여놓은 물품이 좀 있는데 똥개들이 냄새 맡고 몰려왔거든.
지휘관
딱 들어도 대단한 말썽인 것 같다만.
폴루드니차
누가 우리의 웬수 놈들이랑 내통이라도 했나 봐.
지휘관
우리의 웬수라니, 그런 게 있었나?
폴루드니차
지금 여기 있지! 그나저나 그쪽 상황이 어떻길래 통신이 자꾸 치지직거려?
지휘관
기지차량의 통신 설비가 박살나서 지금 다른 거 빌려 쓰느라 그래.
폴루드니차
그래? 아무리 그래도 노이즈가 심상치 않은데...
아무튼, 좌표는 TY3IU-8SSZ90이야. 잘 부탁해~
지휘관
...메이링, 물자 리스트 작성해서 이 통신 코드로 보내.
메이링
네. 어... 지휘관님? "폴루드니차"란 분은 그...?
지휘관
그래, 그 머리에 나사 빠진 친구. 비싸게 받아먹긴 해도 있을 건 다 있는데다 그만한 값어치를 하지.
메이링
그, 그럼요... 거기에 혹시...
지휘관
쌀술도 추가해, 10병.
메이링
와아!
메이링
정말 고마워요 지휘관님!
지휘관
그리고, 통신 장치 조정해서 통화 채널 고정하고 암호화해.
그로자, 네메시스, 심부름 부탁한다. 캐롤릭의 마인드맵 백업도 챙겨서 가.
그로자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