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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와 공정성

능력주의와 공정성

능력주의란 무엇인가

에디터의 노트

능력주의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습니다. 포인트는 능력주의가 사회적으로 공정하며 정의로운지입니다. 언뜻 왜 논쟁이 되는지 아리송합니다. 능력 또는 능력에 따른 보상의 추구는 당연하고 마땅해 보이니까요. 똑똑 리포트 '능력주의와 공정성' 첫 화는 능력주의에 대해 살펴봅니다.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며, 당연하고 마땅히 여겨진다면 어떤 사회적 측면 때문인지 짚어봅니다. 더불어 능력주의 담론에 '공정성'이 소환되는 이유와 정의와의 관계를 드러냅니다.

대상

능력주의란?

능력주의란 개인의 능력(실력) 또는 업적에 따른 사회적 재화의 배분을 긍정하는 이념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능력주의'(Meritocracy)를 정확히 표현하는 우리말은 없습니다. '능력'(Merit)의 해석에 따라 능력주의는 업적주의, 실력주의 등으로 번역되곤 합니다.

능력주의의 원어에 해당하는 'Meritocracy'는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1958년 낸 저서 <능력주의의 부상(The Rise of the Meritocracy)>에서 처음 사용한 신조어입니다. 가치, 공헌 등을 가리키는 라틴어 'Meritum'에서 유래한 'Merit'에 체제, 이념 등을 가리키는 접미사 '-cracy'를 붙여 만든 말이죠. 이 책이 일본에 출판될 때 능력주의(能力主義)로 번역됐고, 이후 국내에 그대로 사용됐습니다.

옳은 번역이냐에 관해서는 다소 이견이 있습니다. 원어 'Merit'의 뜻에 비춰볼 때 사회적 공헌의 대가로 보상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업적주의 또는 공적주의가 더 나은 번역이라는 거죠. 또한 사전적으로 능력(能力)은 어떤 일을 감당해 내는 잠재적 가능성을 가리키니, 실제로 갖추고 있는 힘을 뜻하는 실력(實力)이 성과나 업적을 드러내기에 알맞은 표현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능력은 단지 잠재적 가능성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능력 있다'는 말은 어떤 자리나 대접에 걸맞은 실적과 능력을 두루 갖추고 있다는 의미로 쓰이죠. 오늘날 능력주의에 따라 사회적 재화를 배분하는 양상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이미 거둔 실적뿐 아니라 역량이나 재능 역시 사회적인 기회 배분에 준거가 됩니다. 결국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능력주의는 실적과 능력을 두루 긍정하고 추구하는 이념입니다. 능력주의의 산실인 취업경쟁이나 입시가 실적만 검증하지 않는 것처럼요.

내용

사회와 정의의 관계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왜 능력에 따른 사회적 재화의 배분을 긍정할까요? 왜 다른 무엇이 아닌 개인의 능력이 최우선으로 고려되길 바랄까요? 그것이 공정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합당한 능력 없이 사회적 지위나 재화를 차지하는 일이 빈번한 사회를 두고 우리는 말합니다. 정의롭지 못하다고요.

능력주의는 사회의 정의를 위해 필요합니다. 그럼 '정의'란 무엇일까요.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정의의 수호자로서 용납할 수 없다!"와 같이 클리셰적인 대사를 줄줄 읊을 수 있을 정도로 친숙한 정의. 이들은 무슨 이름으로 뭘 수호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일까요.

정의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 전통적으로 유학 사상이 뿌리내린 동양에서 정의는 의로움, 즉 옳음(義)으로 이해합니다. 서양에서는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필두로 '각자에게 각자의 몫이 돌아가는 것'을 정의로 여겼습니다. 즉 정의가 수호하고자 하는 가치는 두 가지입니다. 올바름과 공정성이죠.

사회에 올바름과 공정성이라는 정의가 요청되는 이유도 크게 두 가지입니다. 올바름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권과 존엄성을 보장받기 위해 필요합니다. 약자에 대한 보호와 배려는 그 과정에서 공정이 요청될지언정 공정성을 위해 수행되는 가치는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의롭고 옳은 일이기에 정의롭죠.

공정성은 공동체를 구성하고 잘 이끌어가기 위해 필요합니다. 사회적 재화의 배분과 질서 유지를 위해 필요하죠. 오늘날 사회 정의에 있어 더욱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사회가 커지고 고도화될수록 필요가 커지기 때문인데요. 혼자 살면 질서도 분배도 필요 없으니 공정을 따질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회 구조가 복잡해지고 분배가 필요한 가치도 다양해짐에 따라 공정에 대한 요구는 커집니다.

만약 범죄나 편법 등으로 사회적 가치가 공정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구성원 누구도 정당한 노동과 노력으로 공동체에 기여하려 들지 않을 겁니다. 개인이 서로 신뢰하고 협력하며 사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건 공동체가 보장하는 공정성을 담보로 한 행위입니다. 사회에 있어 정의는 필요조건이죠.

핵심

정의와 능력주의의 관계

사회의 공정성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정의의 한 축이 사회적 재화의 공정한 배분을 요구하듯, 이들의 분배 양상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재화는 개인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요소이자 자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 명예, 권력의 양태는 사회의 정의 수준을 나타내는 바로미터입니다. 이들이 공정하게 분배된다면 적어도 공정성에 있어 정의로운 사회로 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해결이 필요한 물음은 여기서부터 발생합니다. 능력주의가 발동하는 지점도 여기입니다. '어떤 분배가 공정한가? 능력에 따른 분배는 공정한가?'

능력주의를 둘러싼 논쟁은 결국 능력주의가 분배적 정의를 실현하는 이념이자 틀로써 적합하냐는 물음입니다. 능력주의에 대한 긍정은 더욱 정교한 능력주의가 사회적 불평등과 기회 불균등, 폐쇄된 계층 사다리를 타파하는 공정한 틀이자 도구가 되리라는 인식입니다. 반대로 능력주의에 대한 우려는 상기한 사회적 문제의 지분을 능력주의가 안고 있으며, 이를 해결할 공정성도 담보하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사회적 맥락을 함께 돌이킬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자유 자본주의 국가입니다. 자유 자본주의 국가에서 '공정한 분배=평등한 분배'가 아닙니다. 오히려 차등 분배를 긍정하고 사회적·경제적 불평등도 허용합니다. 기회의 균등과 절차의 공정성 아래 자유로이 능력이 발휘된 결과라면요.

국가 전체 소득과 직업 자체가 늘어나던 고성장 시대는 옛날옛적에 지나왔습니다. 취업문은 사상 최악으로 좁아졌고 부동산 문제로 인한 주거불안도 심합니다. 그러나 현재 MZ세대로 대표되는 공정성 요구의 핵심은 사회 불평등을 뒤집자는 게 아닙니다. 이미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을 깊숙이 체화한 상태이기에 불평등 자체는 인정합니다. 불가피한 불평등이라면 공정하기라도 바라는 겁니다. 물음은 그 공정한 방법이 능력주의냐는 겁니다.

키워드

분배적 정의

사회적 재화는 구성원 모두가 필요로 하지만 모두에게 돌아갈 만큼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구성원 간 갈등을 방지하고 신뢰와 협력을 위해 분배에 공정성이 요구됩니다. 바로 분배적 정의입니다. 분배적 정의를 실현하는 대표 기준은 업적, 능력, 필요입니다. 어느 하나의 기준만 적용하기보다 사회적 합의와 상황에 따라 적합한 기준을 만드는 일이 요청되는데요. 이 중 능력주의와 맞닿아 있는 업적, 능력에 따른 분배를 살펴봅니다.

1️⃣ 업적에 따른 분배

요점: 성취하고 기여한 정도에 따라 분배한다. 물리적 근거에 기반해 평가하기에 비교적 수월하게 분배할 수 있다. 생산성을 높이는 유인으로도 작용한다.

한계: 서로 다른 종류의 업적의 경우 성취와 기여 정도를 비교하기 어렵다. 경쟁이 과열돼 업적만 중시되고 다른 가치는 소외될 수 있다.

2️⃣ 능력에 따른 분배

요점: 신체 능력, 지능과 같이 육체적·정신적 능력에 따라 분배한다. 자격증과 같이 시험이나 검증을 근거 삼을 수도 있다.

한계: 분배와 밀접한 상관성을 지니는 능력에 대한 객관적 기준을 마련하기 어렵다. 능력에는 개인 노력뿐 아니라 부모가 제공하는 유전적 요인, 사회·경제적 지원 등도 영향을 미친다.

� 다음은 능력주의의 기원과 탄생 배경을 짚어 본 '능력주의의 출현'이 이어집니다.

능력주의의 출현

에디터의 노트

공정성을 중심으로 한 능력주의 논쟁은 근래 달아오른 이슈입니다. 그러나 능력이 사회적 인정과 보상의 주요 기준으로 자리 잡은 것은 훨씬 이전의 일입니다. '능력'은 역사적으로 인류가 추구해 온 가치기도 합니다. 적극적인 능력의 발현은 인간의 사명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능력주의'라는 이념의 정당성과 당위를 보증하는 한 축으로도 존재하죠. 사회적 이념으로써 능력주의는 어떤 모습으로 등장했는지, 그리고 인류사 속에서 '능력'은 어떤 가치였는지 살펴봅니다.

현상

이데올로기의 변화

능력주의의 공정성과 정당성을 이야기할 때 비교군으로 쉽게 떠올리는 것은 과거 봉건 사회입니다. 신분제, 귀족정에 따라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대단한 노력을 기울여도 태생이 정해준 계급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신분, 배경 상관없이 누구나 능력 있고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적 가치관이 도덕적으로 정당하게 여겨지는 이유입니다.

능력과 노력에 따라 성공할 수 있다는 건 사회적 계층 이동성이 열려 있음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능력주의를 핵심 이념으로 삼고 있는 자유 자본주의 사회를 긍정합니다. 능력주의의 역사적 의미는 세습적이고 폐쇄적으로 사회적 자원을 분배했던 신분제라는 구습을 타파했다는 데 있습니다. 능력주의는 혁신의 이데올로기죠.

그러나 능력주의에 여전히 동일한 이미지가 씌어 있는지는 생각해 볼 일입니다.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능력주의 논쟁의 중심에 있는 것은 혁신이 아닙니다. 오늘날 '능력주의'가 떠올리는 이미지는 경쟁과 공정성, 나아가 엘리트리즘이죠.

과거 "능력주의"라는 말이 전달했을 뉘앙스는 굉장히 급진적이었을 겁니다. 혹여 입에 담았다간 "이보게, 큰일 날 소리 말게!"라며 주변의 뭇매를 맞았겠죠. 실제로 중국 후한 말 재상이자 왕이었던 조조는 출신을 막론하고 재능 있는 사람이면 인재로 등용하는 구현령(求賢令, 210년)을 편 바 있습니다. 그 결과 유학자들의 집단 반발과 연이은 상소로 골머리를 앓았죠.

시대 및 체제, 사회 구조가 변하며 능력주의에 담긴 이념적 색채도 변하는 셈입니다. 과거 신분제 봉건 사회에선 폐쇄적인 지배구조와 가치 세습을 비판하는 진보적 이념이었다면, 오늘날 자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능력주의를 토대로 한 분배가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기득권을 대변하거나 양극화를 조장하지 않는지 그 공정성을 검토하게 됐습니다.

배경

능력주의의 뿌리고대 그리스, 정치의 근간은 합당한 몫

능력에 따라 보상받는 사회를 지향하는 능력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능력주의의 이념적 기원으로 '재능에 따른 출세'(career open to talents)를 내세운 프랑스 혁명(1789~1799)이 거론되곤 하는데요. 이전에도 능력주의에 대한 추구는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Suum cuique)

그리스 극작가 호머가 기원전 700년경 쓴 서사시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좀 더 정확히는 '각자가 각각 소유해야 할 것을' '각자 적격인 것을'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능력에 따른 공정한 분배를 추구하는 표현이죠.

지난 화에서 언급하기도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배적 정의론은 이와 같은 명제를 이론으로 발전시킨 움직임입니다. 각자에게 각자 어울리는 몫이 돌아가야 공정하며 정의롭다는 내용인데요. 기준이 되는 것은 물론 개인의 능력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플라톤은 절대적인 선과 진리를 추구하는 능력 있는 개인인 '철인왕'(Philosopher king)에 의한 통치를 주장한 바 있죠.

미국, 능력주의 아래 작동하는 아메리칸 드림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1743~1826)은 능력주의를 국가 이념으로 정립했습니다. 그는 재능 있는 이라면 누구나 사회의 엘리트층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아 독립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했죠. 귀족정이 사회를 좌지우지했던 구 유럽 대륙과 다른 미국을 꿈꾼 겁니다. 그러나 그가 인권을 보장한 '누구나'는 백인과 중산층 이상 남성이라는 결정적 한계가 있습니다.

 미국 100달러 지폐의 주인공이기도 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 of the United States)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

제퍼슨의 독립 선언서는 미국의 건국 이념과 민주주의의 토대로서 '아메리칸 드림'의 역사적·철학적 기원으로 꼽힙니다. 이외에도 양초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독립선언문 작성에 참여하고 미국 헌법의 뼈대를 만든 벤저민 프랭클린, 시골 태생 불후의 록스타 엘비스 프레슬리, 아칸소라는 변두리에서 태어나 대통령이 됐던 빌 클린턴 등이 미국의 능력주의 신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아이콘으로 불립니다.

내용

우리나라와 능력주의국가고시를 통한 등용문, 과거제

우리나라에서 능력주의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을까요? 먼저 조선 시대(1392~1897) 과거제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과거 시험을 통해 관리를 임용했습니다. 서양에 비교하면 대단히 빠른 시기에 능력주의를 활용한 선진적 시도를 보여준 셈입니다.

그러나 모든 신분이 응시할 수 있던 것은 아니었으며, 교육이나 심사도 양반층에 집중된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중신과 양반의 인척을 천거해 임용했던 기존 음서제도보다야 훨씬 공정한 제도죠. 그러나 지나치게 오랜 시간 그리고 과도하게 과거제에 의존했다는 폐단이 있습니다. 이는 사대부들이 엘리트리즘에 젖어 부패하는 근거로 작용하고, 과거제의 평가 항목인 성리학에 지나치게 심취해 국가 발전에 걸림돌이 됐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압축 성장의 동력이자 원리

능력주의는 해방 후 전근대 발전을 이끄는 성장 동력으로도 작용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한강의 기적'으로 불릴 정도로 압축적으로 단기간에 이뤄졌습니다. 유럽의 산업혁명과 일본의 근대화를 롤모델 삼아 국가 주도 아래 진행됐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대한민국은 매장된 자원이 풍부한 국가도 아니고 당시 제대로 산업 인프라를 갖춘 것도 아니었습니다. 믿을 것은 국가 주도 아래 선택과 집중의 경제 전략, 그리고 이념으로 국민을 한데 묶어 성장 동력으로 삼는 것이었죠. 재벌 기업이 주류인 대기업 중심으로 육성하고 가공무역을 핵심으로 한 수출을 통한 성장을 꾀합니다.

극도로 효율을 추구하는 산업화 과정에서 자연히 더 나은 능력이나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는 개인에게 더 많은 보상이 주어지고, '하면 된다' 식의 능력주의와 물신주의가 각광받게 됩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정치 체제와 경제 체제가 점진적으로 발전한 서양과 달리 우리나라는 이를 거의 동시대에 겪어 정·재계 여러 곳을 채울 인력이 대규모로 필요해집니다. 그 결과 대학을 통한 엘리트 영입 움직임이 활발해 대학이 계층 상승의 수단으로 여겨지는 현상으로 이어지죠.

위기에 대응하는 신자유주의적 생존법

능력주의에는 분명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이끄는 힘이 있는 듯 보입니다. 과거 그리스에선 정치철학의 발판이 됐으며, 미국에는 짧은 역사에도 눈부신 성장을 가져다준 핵심 이념으로 작용했습니다. 조선 시대 과거제 역시 이전 사회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시행한 혁신이었죠. 짧은 시간에 이룩한 한국의 근대화는 분명 명과 암이 존재하지만, 능력주의가 성장을 견인한 측면이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후 '노오력'으로 상징되는 오늘날 능력주의 서사의 근원이 되는 것은 또 하나의 역사적 위기입니다. 바로 1997년 외환 위기, IMF 사태죠. '국가부도의 날'로 불릴 만큼 유례없는 경기침체 속에서 개인의 생존 활로는 다시금 능력주의 문법으로 향합니다. 적자생존의 냉혹한 시장경쟁에서 살아남고 성공하려면 스스로 발전해야 한다는 자립과 자조의 도덕이 강화되죠. 믿을 것은 자기계발입니다. 그간 기업이나 세일즈맨을 대상으로 유통되던 자기계발서가 일반 대중을 상대로 퍼져나간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키워드

인간성과 능력주의

능력주의를 근대적 이념이나 사회적 생존 방식으로만 이해하기에는 아쉬운 측면이 있습니다. 능력에 대한 긍정은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해석과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신분제나 귀족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지배층에 국한된 개념이었습니다. 법 또는 권리 주체인 시민은 지배계급에 한정됐습니다. 권리 보장은커녕 사유재산으로 거래되던 노예는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죠. 중세의 신 중심 사회에서 인간은 신이라는 절대자 앞에 평등해졌습니다. 인간의 기준은 신을 믿는가, 신앙심으로 갈렸습니다.

근대에 들어 비로소 이성과 능력을 인간의 중심 가치로 파악하고 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14~16세기에 걸친 르네상스 시대에 발현된 인간성의 추구, 인간주의(Humanism)입니다. 인간주의의 발흥은 교회의 권위 아래 억눌린 인간성을 해방하고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눈을 뜨게 해 인류 발전을 가속했죠. 물론 식민지 개척이나 노예무역, 그 과정에서의 인권 탄압 등도 인간의 능력과 가능성을 정력적으로 긍정하며 수행한 행위입니다. '미개한' 원주민이나 흑인, 노예 등은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았으니까요.

수도사와 승려의 일이 들판에서 노동하는 농부의 일이나 집에서 집안일을 하는 여인의 일보다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우월하지 않다. —마르틴 루터

인간이 적극적으로 능력을 발휘하는 행위인 노동에 있어서도 비슷한 흐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특정 계급이 담당하는 고난으로 인식됐던 노동의 위상이 떠오르는 것은 중세 종교개혁 이후입니다. 마르틴 루터에 의해 노동이야말로 일상 속에서 신을 따르는 도덕적 행위라는 '천직' 개념이 대두된 겁니다. 이는 오늘날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말의 기원이기도 하죠.

노동의 긍정성은 근대 자본주의를 만나 적극적으로 수행됩니다. 돈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직접적으로 취득하는 임금노동으로서 가치론적 서열에서도 우위를 점하죠. 여기에 가치관적으로 힘을 보탠 것이 이성과 능력에 따른 실존을 중시한 인간주의입니다. 능력을 적극적으로 발휘하는 노동은 인류 발전의 원동력이자 자기실현 수단으로 파악되기 시작한 거죠. 그러나 노동의 위상 상승은 자본주의를 위시한 당대 체제를 옹호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의 목적으로 수행된 측면이 있습니다. 노동은 신성해졌지만 대다수 노동자는 힘든 역사를 견뎠죠.

능력에 대한 긍정은 인간의 중심 가치이자 인간 사회의 변혁을 추동하는 힘입니다. 자본주의나 자유주의와 같이 사회의 발전 양상과 맞물려 능력주의가 발휘된 것은 우연이 아닌 듯 보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능력주의에 집착하거나 그 과정에서 객관과 공정성을 잃어버리면 사회적 부조리를 저질러왔음 또한 발견할 수 있습니다.

� 다음은 자유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현대 사회 속 능력주의 활용을 들여다 본 '능력주의의 쓰임'이 이어집니다.

능력주의의 쓰임

에디터의 노트

우리는 능력주의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능력에 따른 보상과 위계에 대한 긍정은 현대인의 사고를 지배하는 이념입니다. 현대사회를 구성하고 작동하는 체계이기도 합니다. 능력주의가 어떤 식으로 오늘날 개인과 사회를 움직이는지 살펴봅니다.

현상

능력이라는 자격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은 거세졌지만 일상에선 여전히 능력주의를 실천하며 살아갑니다.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지적되는 문제의 타당성과는 별도로 신자유주의라는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받아들여 온 이상 불가피한 생존 양식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회 속 개인 또는 집단 간의 커뮤니케이션 양상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능력주의와 공정성 논쟁에 불을 지핀 마이클 샌델은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이를 정리한 바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현대사회에서 '능력'은 곧 개인의 자격이자 실존의 근거라는 겁니다.

능력주의를 근간으로 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에 따른 재화의 차등 배분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설명하고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둔 이가 누리는 재화는 그 자신의 능력을 기반으로 정당성을 보장받습니다. 여기에는 그 과정에서 기울인 노력 역시 계산에 들어가죠. 성공은 능력과 노력으로 쟁취한 불가침의 보상이 됩니다. 성공하지 못한 이에게도 같은 필터가 적용됩니다. 능력과 노력이 부족했으니 처한 상황이나 결과는 마땅합니다.

성공에 대한 자극이나 동기부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한 이가 그렇지 못한 이를 업신여기는 상황을 낳을 수 있으며,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이가 '누구 탓을 하겠어, 내가 못나서 그런 건데'라는 식으로 자조와 절망을 축적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계급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죠.

미국의 제40대 대통령 고 로널드 레이건(좌). 경제적 자유주의 정책을 통해 침체된 경기를 활성화했지만 사회적 약자층을 소홀히 했다는 비판이 있다. 우측은 1980년 미 대선 당시 레이건 측 캠페인 슬로건.

개인의 능력은 국가 정책적으로 복지의 대상을 구분하는 명제로도 쓰였습니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영국 마거릿 대처 총리와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본격 수용된 신자유주의는 이런 관점을 잘 보여줍니다. 신자유주의는 정부에 대한 불신과 시장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시장경쟁의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사상입니다.

"우리는 그 자신의 실수가 아닌 일로 힘겨워하는 사람을 결코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 레이건 미국 전 대통령

당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상적인 복지국가에 대한 논쟁이 활발했습니다. 요지는 '국가의 사회적 책임은 어디까지인가'입니다. 레이건을 비롯해 신자유주의가 채택한 복지의 대상은 '그 자신의 실수가 아닌' 사람입니다. 자기 책임이라 할 수 없는 불운에 대해선 도움을 줘야 하지만, 책임이 있다면 복지로 구제할 수 없다는 거죠. 기회와 책임을 동시에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은 이후에도 거의 유사하게 강조됩니다.

의미

체제 정당성과 자발적 수용의 헤게모니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 사회는 매우 독특한 체제입니다. 능력주의가 지배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면서 대중의 공정성 요구에도 소환됩니다. 능력에 따른 것이라면 상위층의 세습이나 지위도 긍정합니다. 기회의 평등을 약속한다면 현실의 불평등도 옹호합니다. 사회 주요 계층과 대중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이례적입니다.

과거 귀족정이나 신분제 사회에서 사회적 재화, 기회, 통치이념 등은 모두 신분이나 혈연으로 결정됐습니다. 그들이 국가 살림을 이끈다는 사회적 책임 아래 수행됐지만 불공평은 드러나 있었습니다. 지배층과 대중의 이해관계는 달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능력주의 아래 주요 계층은 정당성을 인정받고 대중은 양극화를 받아들입니다.

과거와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가 운영되는 겁니다. 이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사용해 주목받은 '헤게모니' 개념입니다.

헤게모니(Hegemony): 사회 주요 집단의 적극적인 합의와 동의를 통해 얻어진 도덕적이고 철학적인 지도력. 또는 사회의 지배적인 사고에 의한 주도권.

신자유주의 이전 시점이긴 하지만, 그람시(1891~1937)는 자본주의 국가의 운영 방정식에 이제까지와 다른 요소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전까지 지배와 피지배의 공식은 지배자의 일방적 억압이었습니다. 그러나 서구 자본주의 국가에서 피지배계층의 반발은 한정적인 수준에 그쳤죠.

그람시는 더 이상 지배 집단이 강압적인 수단으로 체제를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가끔 호혜적으로 '당근'도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체제의 정당성을 피지배자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거죠. 헤게모니는 구성원의 동의에 의한 지배체제입니다. 문화적 틀인 아비투스(Habitus)와 교육 체계가 이를 뒷받침하는 대표 요소죠.

핵심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의 관계

현대사회 속 능력주의의 쓰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자본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능력주의는 자본주의가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예일대 석좌교수를 지냈던 고 이매뉴얼 월러스틴(1930~2019)은 세계를 단일한 자본주의 체제로 파악했던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입니다. 그는 능력주의 신화가 역사적 자본주의와 함께 탄생했다고 말합니다. 그의 저서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 속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하며 능력주의가 수행한 기능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먼저 능력주의는 노동력을 동원하는 기준이 됐습니다. 자본주의는 자본의 축적을 목표로 하는 사회입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선 인간의 노동이 사고팔 수 있는 상품이 돼야 하죠. 능력주의는 노동력의 적절한 배치를 결정하는 데 필요한 객관·보편한 기준을 제공했습니다.

두 번째로 사회적 계층 이동성을 열었습니다. 능력주의를 통해 신분제는 폐지됐습니다. 이전에도 '개천용' 신화가 없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월러스틴은 두 사회적 상승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능력주의는 이제 예외적 신화가 아닌 공식 덕목이 됐고, 이것이 가능한 인구의 비율도 늘어났다는 겁니다.

'기회'는 사실 보편적으로 주어지지 않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에 따른 계층 상승은 기회라기보다 경쟁에 가까워졌죠. 제도화된 능력주의는 결국 다시 소수의 사람에게 계층 상승을 허용하고, 다수의 사람에게 지위의 세습을 허용합니다. 또한 세계 경제의 양극화 추세 때문에 개인 및 집단의 지위 이동이 일부 발생할지언정 근본적 변화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월러스틴은 지적합니다.

재밌는 것은 불평등 구조는 여전하며 그럼에도 '합리성'을 해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능력주의를 통해 구성원이 납득할 만한 불평등을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노동에 자리 잡은 능력주의적 기준은 노동을 거래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여전히 줄세우기식 평가와 서열적 구조를 해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자본주의가 구축한 개인의 계층 이동성 역시 이러한 계급서열제적 노동배치를 위협하지 않으면서 만들어낸 틀입니다. 구조의 불평등성이나 경쟁에 있어 자본 축적 및 세습의 불합리성은 능력주의의 '합리성' 아래 보호받는 셈입니다.

비교

소설 속 능력주의 사회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1958년 출간한 사회풍자 소설 <The Rise of The Meritocracy>(좌)와 국내 번역본 <능력주의>(우).

'능력주의'(Meritocracy)는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의 <능력주의의 부상(The Rise of The Meritocracy)>에서 처음 쓴 말입니다. 언뜻 논문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 <1984>처럼 사회 풍자소설이죠.

세습주의를 혁파하고 생산 효율성과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구현된 이 능력주의 사회에는 공식이 있습니다. 바로 '지능(IQ) + 노력(Effort) = 능력(Merit)'이라는 겁니다. '노력'이 함께 언급되긴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지능이 능력의 기준이 됩니다. '능력주의'를 '지능주의'로 번역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 이유입니다.

마이클 영의 능력주의 사회에서 능력 있는 사람은 IQ 테스트를 통해 선발됩니다. 오늘날 시험의 전형으로 볼 수 있는데요. 지능에 따라 우수한 아이를 골라 차등 교육을 시행하고 사회 주요 계층으로 육성합니다. 신분은 학교와 직장에 따라 철저히 계층화되고 빈부격차는 심해집니다. 그 결과 IQ 125를 넘긴 상위 5%만이 엘리트 계급으로 인정받습니다. 노동자는 엘리트의 하인으로 전락하기에 이릅니다.

사회가 부패하고 제 기능을 잃었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능력주의 사회는 소기의 목적처럼 높은 생산성과 안정을 가져옵니다. 모든 시민에게는 '균등급'이라는 기본소득이 지급되고, 일자리가 없으면 가내 하인 자리일지언정 고용을 보장합니다. 재테크의 개념이 없어 엘리트들이 자산 투기에 매몰되는 일도 없습니다.

다만 대다수 하층 계급의 의식은 쇠퇴합니다. 능력에 따른 인생의 차등적 지위를 인정하고 자신의 위치가 부족한 능력 때문이라는 걸 받아들입니다. 더 이상 자신들의 지위 하락에 반발하지 못합니다. 노동조합의 간부 역시 좋은 대학에서 졸업장을 딴 젊은 엘리트가 맡습니다. 기존 노동조합은 "노동을 거쳐, 어려운 길을 헤치고" 지도자가 됐으나, "그래머 스쿨만큼 어려운 과정을 헤치고 올라가는 길은 없기 때문"(137쪽)이라는 것이 소설 속 근거입니다.

능력주의 사회에 저항하는 이들의 모습도 미약하나마 끝까지 그려집니다. 평등주의자나 노동자의 지위를 염려하는 '포퓰리스트', 그리고 능력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배제된 '머리 좋은 여성'이 그들입니다. 흡사 공산당 선언을 떠올리게 하는 '첼시 선언'을 외치며 저항을 계속하지만, 소설은 태아의 지능을 평가하고 급기야 인간 개량에 손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지능과 교육, 직업과 권력만이 아니라 친절함과 용기, 상상력과 감수성, 공감과 아량에 따라서도 평가한다면, 계급이 존재할 수 없으리라. ... 계급 없는 사회는 또한 개인적 차이를 수동적으로 관용할 뿐 아니라 능동적으로 장려하며, 인간의 존엄성이 마침내 그 온전한 의미를 찾게 되는 관용적인 사회가 되리라. 모든 인간은 어떤 수치적 잣대로 비춰 봐 세상에서 출세할 기회가 아니라 풍요로운 삶을 이끌기 위해 자기만의 특별한 역량을 발전시킬 기회를 균등하게 누리게 되리라. —<능력주의> 268쪽, '첼시 선언' 일부

� 다음은 오늘날 능력주의의 공정성을 점검해보는 '능력주의는 공정한가?'가 이어집니다.

능력주의는 공정한가?

에디터의 노트

능력주의는 공정에 대한 시대적 요청으로 화두가 됐습니다. 우리나라가 능력주의 아래 움직인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간 우리 사회의 능력주의와 공정성을 돌아보는 흐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면 공정한 사회를 위해 더 엄밀히 능력주의를 적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존재하는데요. 능력주의와 공정성을 두고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를 모아봤습니다.

배경

능력주의와 공정성의 소환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

 

—2014년 정유라 페이스북 글 일부

오늘날 능력주의를 두고 공정이 소환되는 데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먼저 정당한 자신의 능력이 아닌 부모의 특권에 기대 저지른 부정에 대한 비판입니다. 정유라 사건, 숙명여고 쌍둥이 사건, 조국 사태, 나경원 자식 사건 등이 이에 해당하죠. 일부 명백히 밝혀지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기득권을 이용해 사회적 지위 획득에 개입했다는 논란은 현 사회 능력주의의 공정성에 물음을 던졌습니다.

능력주의를 근거로 공정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인천국제공항 정규직 전환 논란, 일명 '인국공' 사태인데요. 지난해 6월 인천국제공항공사에서 비정규직 일부에 대해 정규직 고용 전환 의사를 밝혔다가 정규직 노조 및 취준생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산 사건입니다.

반발의 요점은 시험을 통해 능력을 검증받아야 정규직이라는 안정적 노동 조건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겁니다. 애써 시험 치르고 들어오는 정규직에겐 불공정한 처사라는 거죠. 그러나 그간 현장에서 일한 경험 역시 마땅히 인정받을 노력이고 능력이라는 의견이 맞섰습니다. 지금도 갈등은 완전히 봉합되지 못한 상태인데요. 이처럼 능력을 둘러싼 공정성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 중요히 떠오르는 동시에 합의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대상

능력주의가 공정하려면

능력주의는 분배적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 중 하나입니다. 재화가 한정적인 사회적 가치를 두루 배분하는 일이기에 능력주의는 공정성을 전제로 합니다.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의 추천 글을 쓴 문용린 서울대 명예교수는 능력주의 신화가 다음 세 가지 명제로 이뤄진다고 말합니다.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하고,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며, 능력에 따라 성과를 배분한다.

<능력주의는 허구다>의 저자인 스티븐 J. 맥나미와 로버트 K. 밀러 주니어는 능력주의의 논리에 대해 이렇게 정리합니다.

누구에게도 차별적 특혜를 주지 않고,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며, 타고난 계층 배경이나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상관없이 오로지 개인의 능력에 따라 보상을 제공해야 한다.

결국 능력주의가 공정하게 작동하기 위한 핵심은 기회의 공평한 제공과 '능력'에 따른 보상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렇담 과연 기회는 공평히 제공되는지, 능력에 따른 보상의 형평성은 어떤지 살펴볼까요.

내용

능력이라는 필터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지나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진다는 건 같은 조건에서 경쟁함을 의미합니다. '스타트 라인'이 같냐는 거죠.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자본은 각자 축적한 부에 따라 다릅니다. 가정환경이나 재정에 따라 좋은 학군에서 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 살 수도 있습니다. 공부에 전념할 수도 있고 일과 병행해야 할 수도 있죠. 결국 같은 능력(노력)을 기울여도 성취는 차이를 보입니다.

과거 신분제 사회와 달리 계층 이동성은 열려 있지만, 부모의 사회경제적 계층과 지위가 세습되는 점은 유사합니다. 인생의 출발점이 달라지는 셈입니다. 그만큼 개인의 능력이 이를 상회하기란 쉽지 않죠. 실제로 지난해 서울대 입학 신입생의 62.9%는 소득분위 9분위 이상 고소득 가정이 차지한 바 있습니다. 개인의 능력보다는 환경이 큰 영향을 끼치고 있죠.

성공은 (개인) 능력만으로 이뤄지나

명문대에 입학할 정도로 뛰어난 학업 성취를 이루려면 분명 본인의 노력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사례처럼 사교육의 기회나 물질적 뒷받침 등 역시 큰 영향을 미칩니다. 유전적으로 타고난 지능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명문대에 입학하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그 결과를 오롯이 개인의 노력 결과로 환원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꼭 학업뿐만은 아닙니다.

능력 외 요인들, 타고나거나 우연적이거나

성공은 능력만이 아니라 우연한 요소, '운'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 있습니다. 누가 최종적으로 무얼 갖느냐의 문제에서 능력은 수많은 영향 요인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능력과는 상관없는 '비능력적' 요인들이 더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능력적 요인(merit factor): 타고난 재능, 성실함, 올바른 태도, 자질 등

비능력적 요인(nonmerit factor): 부모의 재화,사회·문화적 배경 및 자본, 우수한 교육의 제공 여부, 갖가지 운, 사회적 제도, 태어난 시기 등

개인이 어찌할 수 없거나

이들은 능력과 공존하면서 능력이 미치는 영향력을 약화시키거나 아예 억압하기도 합니다. 부모로부터 지원받는 부나 교육, 문화적 환경 등이 개인 능력의 영향력을 줄인다면, 당대 사회가 지닌 구조나 특징에 따라 능력의 평가나 발휘도 달라지죠. 능력 역시 사회적 뒷받침 아래 발현되고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마치 비인기 종목 선수가 인기 종목 선수 이상으로 노력해도 사회적 보상이 적은 것처럼요. 또한 대기업 중심 경제 시스템에서 자영업자가 자수성가하기 힘든 것처럼 개인을 압도하는 비능력적 요인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능력에서 배제되거나

차별의 문제도 있습니다. 차별은 위에서 언급한 비능력적 요인, 대개 태생적으로 주어지는 속성을 근거로 교육이나 일자리와 같은 사회적 기회에 접근하지 못하게 합니다. 성별, 계급, 인종, 국적, 나이, 장애, 질병 등에 따라 '능력 있음'과 '능력 없음'을 규정하고 개인의 권리와 실존을 제약하기도 하죠.

무서운 것은 차별의 반복이 가져오는 효과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차별이 고착화될수록 그 정도는 심해지고 불평등은 심해집니다. 차별 때문에 능력을 발현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이들은 결국 정말로 능력이 저해되고 사회적 보상에서 멀어지기에 이릅니다.

똑똑! 비능력적 요인이 개인에 미치는 영향과 사회 속 모습에 관해 쉬운 이해를 돕는 이 만화를 추천해요.

예시

빈곤가정 아동일수록 인지 손상 나타난다

도서 <불평등 트라우마>(2019)에는 빈곤가정 아동들의 낮은 능력 수준이 가정환경의 영향임을 드러낸 연구가 소개됩니다. 생후 5개월부터 4살까지 고소득, 중간소득, 저소득 가정 아동들의 뇌를 MRI 스캐너를 이용해 일곱 차례에 걸쳐 촬영한 것인데요. 처음 생후 5개월에는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4살에 이르자 인지 및 정보 처리 및 행동 조절에 관여하는 회백질의 부피가 빈곤가정 아동에게서 약 10% 줄어들었음이 발견됩니다. 스트레스와 정신적 자극의 결여가 인지발달에 악영향을 준 것이죠.

키워드

매슬로의 욕구 이론

그런가 하면 도서 <능력주의는 허구다>에선 환경과 태도 간의 상관성을 상황 중심적으로 바라본 시각이 눈에 띕니다. 성공에는 흔히 지능과 같은 인지적 요인 외에도 개인의 태도나 행동 특성 역시 관련 깊다고 여겨지는데요. 이 때문에 과거 태도와 성취 가능성을 엮어 빈곤 문화(culture of poverty)가 연구되기도 했습니다. 요점은 '빈곤이 문제적 태도를 만드는가, 문제적 태도가 빈곤을 만드는가'인데요.

오늘날에는 그들이 처한 비능력적 요인이 능력을 구현하는 태도를 가로막는 것으로 보고 빈곤 문화 이론은 맹비난을 받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야망을 갖지 못하는 것은 동기가 없어서라기보다 제한적인 기회 안에서 삶을 현실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거죠.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과 사고는 빈곤의 원인이 아니라 빈곤의 결과라는 겁니다.

이는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그 유명한 욕구 이론과도 일치합니다. 그의 이론은 인간의 욕구가 단계별로 발전함을 나타내는데요. 음식, 옷, 주거 등 기본적 욕구에서 시작해 점점 상위 단계로 발전합니다. 즉 하위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자아실현과 같은 상위 단계에 대한 욕망은 갖기 힘들다는 거죠. 능력이 발현되는 상황도 조건별로 차등이 있을 수 있음을 인간의 본성과 함께 파악한 시도입니다.

� 다음은 교육 문제를 중심으로 능력주의의 제도적 현주소를 짚은 '능력주의는 올바른가?'가 이어집니다.

능력주의는 올바른가?

에디터의 노트

능력주의를 두고 제기되는 이야기에는 꼭 공정성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능력주의가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분야는 교육과 직업인데요. 그중 교육은 대학 입시와 맞물려 인생에 있어 처음 맞닥뜨리면서도 이후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능력주의적 무대입니다. '기회의 평등'이라고 할 수 있을 교육적 환경이 개인 가정마다 다르기에 능력 검증에 있어 공정성 시비가 있음은 지난 화에서 살펴보았는데요. 교육의 가치는 꼭 인재 선별과 가치 배분에 있는 걸까요?

배경

분배 도구로서의 교육

대학은 현대사회에서 사회적 기회의 배분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좋은 대학은 곧 좋은 직장과 더 많은 기회를 의미할 때가 많죠. 이와 같은 흐름에는 어떤 배경이 있을까요? 세계적으로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이 고등교육을 대폭 확대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입니다. 자본주의 체제는 단순 노동자만으로 굴러가지 않습니다. 산업이 발달하고 경제가 팽창하자 관료나 전문직 등 중간 관리자 및 엘리트도 필요해진 겁니다.

이에 따라 고등 학습은 물론 선발과 배치를 위한 평가 체제도 발달합니다. 개인의 능력을 측정하고 차등 배치하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에 교육은 시험이나 평가와 함께 자리 잡죠. 기회의 평등과 사회적 계층 이동을 내세우는 능력주의의 평등하고 공정한 수단으로 추앙받습니다. 그 결과 교육을 통해 거둔 성적과 시험 결과는 개인의 능력이 되고, 이를 이용해 획득한 학력과 직업 선택의 기회는 능력에 대한 보상이 되죠.

대상

능력주의의 꽃, 시험

자본주의 교육에서 시험문화가 활성화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배경이 있습니다. 먼저 국가가 교육을 통제하고 관리하기 쉽습니다. 미국의 경우 공식적인 제도로써 시험은 19세기 중반 교육 개혁의 일환으로 진행됐습니다. 이전까지는 일선 교사들의 교육과 평가에 맡겼으나 주관적이며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표준화 시험을 도입합니다. 실질적인 이유는 효율성이었습니다. 일괄적인 시험 및 평가는 많은 인원을 상대로도 값싼 비용과 짧은 시간을 자랑하니까요.

두 번째는 노동력을 서열화하기 위함입니다. 이 역시 효율성과 맞닿아 있는데요. 학생을 이후 노동시장에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위해선 능력에 따른 지표의 비교가 필요합니다. 이를 비교 가능한 형태로 구현한 것이 바로 시험 점수인 셈이죠. 점점 많은 사람이 교육을 받게 되고 직업도 다양해지자 교육 체제 및 시험은 인간의 능력을 측정하는 과학적 도구로서 발전합니다.

객관적이고 공정한 기회라는 믿음

시험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계층이동 수단이라는 믿음은 학습의 결과기도 합니다. 오늘날 치열해진 경쟁이나 복잡해진 공정성을 떠나, 예전 한국 경제의 급성장기에 목격한 '개천용' 신화의 향수가 있는 거죠. 그러나 여기에는 사실 1970~80년대 굉장히 호조를 보였던 경제 상황이 배경으로 존재합니다. 당시에는 실제로 노동계급이나 농촌 집안에서 교육을 통해 성공한 이들이 중간계급이나 화이트칼라 노동자로 진출하기도 했죠.

오늘날의 시험문화

오늘날 시험문화는 평가주의(Testocracy)로 불릴 만큼 결과와 평가에 치중돼 있습니다. 하루의 시험으로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대입 시험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죠. 시험 성적이 곧 나은 미래로의 '티켓'으로 여겨집니다. 그렇기에 교육적 목적이나 학습의 과정보다 더 나은 시험 성적을 받는 일이 교육 활동 전반을 지배합니다. 시험을 통한 교육 평가 결과는 자본주의 사회질서에 편입하는 수단이 되고, 능력(성적)의 부족을 이유로 차별받는 근거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의 수험은 가족 프로젝트로 확대되기도 하죠.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면서도 그 결과 학벌이라는 무시 못 할 사회적 자원을 가져다주는 분배 도구로 기능해 사회적 영향력이 크기 때문입니다. 교육과 시험은 곧 사회적 계층 이동성과 사회적 재화를 얻기 위한 기회의 평등으로 인식되죠. 배경과 자원을 동원해 자녀의 교육을 뒷바라지하는 게 '부모 노릇'과 같고 자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제어하는 '헬리콥터맘'이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개인의 능력이 발현되는 능력주의를 저해합니다. 나아가 다른 가족, 집단에 배타적인 가족 이기주의를 낳기도 하죠.

요약하자면 단기간에 근대화를 이룩하는 과정에서 국가는 집중적 투자 전략과 엘리트 교육을 선택했고, 그 과정에서 계층 이동 수단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입시 경쟁에 너도나도 뛰어들고 있는 것이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우리나라 교육 및 시험 문화의 단상입니다. 봉건사회의 신분제가 해체된 자리는 시험을 통한 능력주의적 평등이 대체하며 그 직접적 수단인 시험문화는 강력해졌습니다.

내용

학력과 학벌을 얻기 위해

요즘도 "대학 가면 놀아라, 대학 가서 연애해라" 이런 소리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과거 농담 반, 진담 반 부모님 세대가 자녀에게 했던 이 표현이 환기하는 것은 그만큼 대한민국 사회에서 학벌과 학력이 중요하며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오히려 대학 가는 일 자체는 쉬워졌습니다. 그러나 경쟁과 갈등은 더 치열해졌는데요.

대학 진학률이 오른 건 앞서 이야기한 고등교육의 확대와 이로 인한 계층이동 요구로 교육열이 오르고 실제 대학도 늘었기 때문입니다. 1996년 최소 요건만 갖추면 대학 설립을 인가해 주는 '대학설립 준칙주의' 제도로 일반대학의 수는 1996년 134개교에서 2014년 189개교로 55곳이나 늘었습니다. 지금은 학령인구 감소로 폐지된 제도지만 대학의 숫자는 여전히 많은 상태죠. 2021년 대학 진학률은 79.4%에 이릅니다. 과거와 같은 '대졸 프리미엄'은 옛말이죠.

대학은 웬만해선 가다 보니 '대졸 프리미엄'은 옛말입니다. '간판'이 중요해지죠. 상위권 대학에 대한 열망이 커지다 보니 대학의 서열화 및 학력, 학벌 문제는 심해집니다. 게다가 성장은 둔화되고 경기는 좋지 않으며 취업난은 최악이니 경쟁은 심해지고 교육 비용은 늘어납니다. 스펙업을 위한 비용은 물론이고 학자금 대출금과 같이 취업 후에도 발목 잡히는 경우가 많죠.

모두가 대학에 입학에 학력을 얻을 것이 권장되지만 정작 대학에 들어가더라도 경쟁은 심화되며 더욱 촘촘한 학벌 서열과 차별을 마주하게 됩니다. 오늘날 능력주의와 공정성에 대한 요구에서도 '학력 취득을 위한 노력에 대한 보상'이 자주 소환되는 이유기도 합니다. 그만큼 어렵고 치열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능력주의에 따라 단지 사회적 기회를 취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학력이 강요된다면 이에 대한 보상 역시 공허한 요구입니다. 결국 교육과 시험의 평가 기능을 강화하고 학벌을 더욱 촘촘하게 서열화하는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지난 화에서 학벌 취득에 오늘날 가정의 부가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 역시 짚은 바 있죠. 이는 곧 사회적·경제적 지위의 대물림과 다름없기에 능력주의로서도 공정하지 못합니다.

의미

학벌에 목맬 수밖에 없는 이유

 대학을 서열에 따라 5분위~1분위로 분류하고 비교한 임금격차. 40~44세의 경우 임금격차는 최고 46.5%에 이른다.

가정의 소득이 학벌에 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학벌은 다시 소득에 영향을 미칩니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생애주기에서 대학서열에 따른 임금격차는 최고 46.5%까지 벌어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4년제 대학을 서열에 따라 분류하고 약 20년 동안의 임금을 비교·분석한 것인데요. 최상위권인 5분위 대학 졸업자들의 평균 연봉과 최하위권인 1분위 대학 졸업자들의 연봉 격차는 시간이 흐를수록 벌어집니다. '대학' 프리미엄은 없지만 '학벌' 프리미엄은 있는 셈이죠.

전망

교육의 과제

공정성 문화를 떠나 "4시간 자면 합격하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4당5락'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쓰이는 우리나라 교육계에서 능력주의 신화의 힘은 막강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기회 배분과 공정성 담론에 지나치게 쏠리는 점이 경계됩니다. 무엇을 위한 교육과 시험이냐는 거죠.

시대는 바야흐로 인공지능과 4차산업혁명, 팬데믹과 기후위기를 이야기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교육은 시험공부와 점수 경쟁에 매달려 막대한 시간과 자원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아실현 역시 '욜로' '워라밸' '부캐'와 같은 표현으로 개인 층위에 맡겨질 뿐 사회적 실천과 연결되기 힘듭니다.

시험을 통해 좋은 학벌을 얻는 것이 능력이기 때문에 이에 맞는 자격과 보상에 대한 요구가 공정성과 정의에 대한 외침이 됐습니다. 좋은 학벌을 얻는 것이 과연 교육을 통해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능력인지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학력과 학벌은 사회적 재화를 배분받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되고 교육은 이를 취득하는 수단으로 왜곡됩니다.

이는 그동안 긴 시야의 교육 정책이 부족했다는 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발전에 따라 인적 자원을 양성하고 엘리트를 길러내 성장에는 기여했으나, 그 외 어떤 교육적 목표를 설정해 수행했는지는 아쉬움으로 꼽힙니다. 반공투사, 산업역군, 자본가, 엘리트를 양성하는 일 외에 어떤 인간적·연대적 가치를 교육했는가 하는 목소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리더나 판·검사, 의사, 정치인과 같은 엘리트들 일부가 대중의 신뢰와 공감을 잃고 능력에 따른 이기주의적 모습도 보인다는 거죠. 교육이 기회 배분과 계층 이동, 공정성 문제에 얽매여 새로운 가치 습득 및 사회 발전, 공동체적 연대를 놓치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 다음은 이제까지 리포트를 바탕으로 능력주의 문제의 핵심을 돌아본 '능력주의 바로 보기'가 이어집니다.

능력주의 바로 보기

에디터의 노트

개인적 층위에서 능력에 따른 평가와 보상의 요구는 합당합니다. 리포트 첫 화에서도 살펴봤듯 '각자에게 각자의 몫이 돌아가는 것'은 전통적으로 수호해 온 정의의 중요한 가치입니다. 공정성이죠. 그렇기에 능력은 공정을 실현하는 분배적 정의의 실질적 기준으로도 언급됩니다. 능력에 따른 평가와 보상은 곧 정의로운 사회의 가치이자 목표입니다. 하지만 그대로 '수단'이 되긴 어렵습니다. 이는 '능력'에 개입하는 수많은 비능력적 요소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능력주의를 사회를 구성하는 단 하나의 '필터'로 삼기엔 한계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분배와 평가를 위한 사회적 척도로서 능력주의의 적정선은 어디인지 생각해 봅니다.

현상

능력주의의 소환

오늘날 팽배한 사회적 불평등과 양극화를 두고 능력주의를 '요구'하는 흐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나 배경 등에 가로막혀 개인의 능력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그로 인해 여러 사회적 재화가 사실상 세습되고 있다는 겁니다. 지적하는 것은 오히려 능력주의의 미작동인 셈입니다.

그러나 불평등을 사회적 문제로 본다면 근본 원인은 자본주의에 있습니다. 또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순수한 능력주의의 구현은 불가능합니다. 출발선이 각자 다르기 때문입니다. 능력만이 발휘되는 환경과 기회의 평등을 가로막는 핵심이 세습이라면, 자본주의의 꽃은 자유로운 재산권의 상징인 상속입니다. 하나를 추구하면 하나는 버려야 하는 제로섬이죠. 공정한 경쟁을 위해 완전히 똑같은 기회를 가져야 하지만 사유 재산의 활용은 개입 없이 자유로워야 한다면, 이는 모순입니다. 순수한 능력주의를 위해선 비능력적 요인이 영향을 끼쳐선 안 됩니다. 부모 역시 어떤 특혜도 물려줄 수 없죠.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환부 도려내듯 깔끔히 정리할 수 있는 이념도 틀도 아닙니다.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와 함께 태어났습니다. 능력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간의 노동력을 배치하고 거래하는 보편한 기준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는 능력주의를 문제 삼는 담론에서 유독 '대안'으로 속 시원한 얘기가 나오지 못하는 이유기도 합니다. 능력주의가 도려내야 할 환부라면 자본주의라는 체제 안에서 사고해야 현실성 있기 때문이죠.

배경

노력하면 성공하는가?

능력에 따른 보상 또는 능력주의의 '정의로움'을 긍정하는 근거 중 하나는 노력입니다. 노력을 기울였으니 보상은 마땅하다는 거죠.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마이클 영의 풍자소설 <능력주의의 부상(The Rise of The Meritocracy)>에서도 노력은 능력주의의 구성 요소로 소개됩니다. 흡사 공식과도 같은 모양새인데요.

'지능(IQ) + 노력(Effort) = 능력(Merit)'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말의 어근을 차지하고 있는 능력(Merit)이 '가치나 공헌에 따른 보상'을 가리킨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노력은 마땅히 보상받아야 할 능력의 요소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의 노력이 사회적으로 평가받는 능력에 실제로 얼마나 지분을 차지하느냐는 차치하더라도요. 노력은 능력의 기준도 아니고 보상의 대상도 아닙니다. 영의 소설 속에서도 노력의 가치는 지능에 따라 선택적으로 판단됩니다.

노력과 능력, 보상의 상관관계

성공비결을 묻는 질문에 많은 사람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노력의 결과라고요. 겸양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운이 좋았다고 하면 노력의 가치를 무시하는 건방진 발언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노력이 꼭 성공을 가져다주진 않습니다.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의 노력은 모두 의심할 여지 없이 훌륭하지만 그렇다고 모두에게 메달이 돌아가진 못합니다. 노력은 필요조건이되 그 자체로 보상을 만족하는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사실 노력 없는 성공도 존재합니다. 보상의 측면에서 중요한 건 '뭘 했느냐'입니다. 똑같이 1만 시간을 투자하더라도 경제적 보상은 직업에 따라 달라집니다. 채용의 대상이 되는 건 가장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지 가장 많이 노력한 사람이 아닙니다.

내용

능력주의의 방법론'가장' 능력 있는 사람을 뽑자

능력주의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제일 뛰어난 인재가 채용돼야 한다는 겁니다. 바꿔 말해 나와 내 가족이 수술대에서 마주할 의사가 가장 실력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며, 내 지역구와 나라를 대표하는 정치인이 가장 유능하길 촉구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여지는 없습니다. 중요한 자리에 능력 있는 사람이 앉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제비뽑기로 의사 자격증을 나눠주거나 대국민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정부 각료를 선발할 순 없으니까요. 그러므로 능력주의를 실현하려면 가장 뛰어난 사람을 고용하기만 하면 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말처럼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일단 과연 모든 채용이 가장 뛰어난 능력으로 결정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능력주의는 허구다>의 저자 스티븐 J. 맥나미와 K. 밀러 주니어는 둘이 합해 60년 이상 교단에 있던 경험을 바탕으로 교수 채용을 예로 듭니다.

대다수의 대학이 신규 채용하는 교수들이 대개 그렇듯 우리도 조교수급의 신입 교수직에 어울리는 사람을 찾는 경우가 많다. 검증된 실력을 갖고 있으며 경험도 풍부한 정교수가 지원을 하더라도 이런 후보를 채용하려면 지나치게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말 그대로 가장 뛰어난 후보는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가장 능력 있는 '교수'를 찾는 것이 아니다. 필요로 하는 특정 영역에서 전문성을 갖고 있으며 학교 측에서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장 능력 있는 '조교수'를 찾는 것이다.
— 도서 <능력주의는 허구다>, 스티븐 J. 맥나미·K. 밀러 주니어, 224쪽.

채용의 후반 과정을 묘사한 부분인데요. 능력은 어느 단계까진 주요 고려 대상이 되지만 결국 비교의 효용 가치가 떨어지는 국면을 맞이한다는 겁니다. 그럴 때 당락을 결정 짓는 것은 엄밀히 능력이 아닌 비능력적 요소라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라도 공정하게 시험 쳐서 등수대로 뽑아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물론 시험 점수는 단일한 척도이기에 결과에 납득하는 일은 비교적 수월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남습니다. 우리는 가장 능력 있는 이를 뽑고 싶은 겁니다. 남은 문제는 그게 가능하냐는 겁니다. 그리고 의미가 있냐는 겁니다.

가장 능력 있는 이를 골라내는 일의 어려움

매년 4만 명 이상의 학생들이 하버드와 스탠포드가 제시하는 신입생 정원 약 2000명 안에 들기 위해 몰려든다. 입학사정관은 지원자들 대다수가 하버드나 스탠포드에서 충분히 수학할 만한 역량의 소유자라고 말한다. ... 예일대에서 오래 근무해온 입학사정관은 이런 말을 남겼다. "때때로 수천 명의 지원자들을 모두 합격시켜 주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나는 그들의 지원서를 계단 아래로 집어 던져 버리고, 아무나 골라 1,000명을 뽑을 수도 있다. 그래도 여전히 훌륭한 학생들을 보유할 수 있을 것이다."
— 도서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288쪽.

국내에서 능력주의와 공정성 담론의 바이블로 꼽히는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 일부입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능력주의가 공정하다는 관념에 대해 논리와 사례를 곁들여 이의를 제기하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능력주의 문제의 대안 역시 언급합니다. 솔직히 말해 문제 제기에 비해 다소 빈약합니다. 그가 소개한 대안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성공과 능력에 깃든 운적 요소를 인지한 겸손, 능력주의적 서열에서 벗어나 일의 존엄성 인식하기, 마지막으로 능력을 배제한 추첨을 통한 선발입니다. 인용한 부분은 이 세 번째 '추첨제'에 대한 논거로 볼 수 있습니다.

앞의 두 가지는 다음 화에서 얘기할 예정입니다. 추첨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4만명의 지원자 중 하버드나 스탠포드에 다니기엔 무리로 판단되는 일부, 학우와 잘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일부만 솎아내고 추첨을 통해 합격자를 뽑습니다. 그중 누구라도 잘 해낼 소양은 충분하며 이들을 두고 힘든 선별 작업을 벌이는 건 소모적이라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샌델의 이 대안은 국내에서 보통 맹비난을 받습니다. 능력주의의 해결책이 '추첨'이라니 황당하다는 건데요.

샌델식 추첨제의 의미

물론 무리가 있습니다. 기본적인 소양을 검증할 최소한의 시험도 배제하는지 명확하지 않을뿐더러 단순히 제비뽑기에 맡길 경우 공정성을 떠나 지원자들의 납득조차 어렵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전제가 더 필요합니다. 어느 수준까지는 기본적인 능력을 검증할 객관적 수단이 필요하며, 이후 이를 배제하더라도 단순히 운에 맡기기보다 그간 능력주의 아래 평가 기준에 오르지 못했던 다른 가치를 고려하려는 대안적 노력이 필요하죠.

이렇게 본다면 샌델의 대안은 받아들일 포인트가 있습니다. 요점은 어느 수준 이상의 우수한 능력은 비교도 힘들고 비교하는 가치도 떨어진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능력주의 논쟁에 불을 지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도 비슷한 언급을 한 적 있습니다. 저서 <공정한 경쟁>을 통해 서울과학고 재학 시절 경쟁이 없어 마음에 여유가 있었다고 회상하며 "구성원 전부의 실력이 다 같이 월등하면 그 집단에서는 경쟁이 무의미"(204쪽)하다고 말합니다. 엘리트리즘을 옹호하는 표현으로도 읽히지만 능력주의적 경쟁의 효용 지점을 바라보는 시각으로는 유사합니다.

핵심

단일 필터로서의 한계

문제의 공통항은 능력주의에 의거한 사회적 필터링에 너무 많은 모호함과 한계가 존재한다는 겁니다. 물론 능력주의와 이를 도구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의 전제는 능력의 일원론입니다. 기준이 많아지면 적용의 효율성과 보편성을 담보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능력주의는 어느 정도까지 유효하고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한계 역시 명확합니다. 정의가 그렇듯 능력주의는 그 자체로 가치도 선도 아닙니다. 그저 분배적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도구에 너무 많은 분야를 깊게 의존하는 점이 문제입니다.

샌델의 대안 역시 능력주의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능력이 선택의 기준에 놓여야 한다는 점은 인정하되 지나치게 '목적'으로 추구될 때 되레 능력주의라는 필터의 객관성 및 효과는 떨어진다는 겁니다. 사회적 불평등을 옹호하고 소수 부유층이나 엘리트의 특권을 옹호하는 쪽으로 '삐딱선'을 타고요.

미국 미시간대 스콧 E. 페이지 교수 역시 능력주의를 거부하는 사회과학계 대표 석학입니다. 그는 20여년 간 사례 연구를 통해 "다양성이 능력을 이긴다"(Diversity trumps ability)는 이론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한 실험에서 참여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 문제해결 역량을 측정했습니다. 한 그룹은 IQ 130이 넘는 박사들로만 구성했고, 다른 한 그룹은 IQ는 낮아도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했죠. 그 결과 개인 역량에선 박사 그룹이 앞섰지만 그룹 전체로서는 다양한 구성원으로 꾸려진 쪽이 더 뛰어난 성과를 거뒀습니다. 물론 여기에도 전제가 있습니다. 다양하다고 해서 아예 상관없는 능력은 문제해결에 기여하지 못했으며, 매우 똑똑하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똑똑해야 한다는 겁니다.

능력주의 자체는 죄가 없습니다. 이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도 상상하기 힘듭니다. 문제는 능력주의를 유일무이한 가치로 지나치게 신봉하는 겁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의 능력 관념과 기준으로 평가하고 재단하는 데서 능력주의의 문제점은 발생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능력'에 대한 다원론을 포용하거나 '능력주의' 외에도 다양한 사회적 필터가 존재한다면 능력주의의 홍역은 소환될 수 없습니다. 마치 과거 조선이 성리학과 과거제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보다 유연한 사고로 다양한 가치를 받아들였다면 국가 발전이 뒤처지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그려지는 것처럼 말이죠.

� 참고한 도서 및 자료에 대해서는 똑똑 홈페이지 본문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 다음은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능력주의의 과제와 미래를 짚어 본 마지막 리포트 '정의로운 능력주의는 가능할까?'가 이어집니다.

정의로운 능력주의는 가능할까

에디터의 노트

능력을 사회적 보상이나 가치 분배 기준으로서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을 순 없습니다. 건강한 공동체 운영을 위한 성장동력을 제공하며 정의의 한 축인 공정성과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능력에는 부나 문화적 배경과 같이 수많은 비능력적 요소가 작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마다 공평한 기회를 담보하기 어려우며 나아가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예 배제할 수도 방관할 수도 없는 능력주의 문제, 해결의 실타래는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까요?

배경

능력주의를 수정하기 위한 방향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와 함께 출현해 근대 사회의 구성원리로 작용했다는 점, 그리고 순수한 능력주의의 구현은 오히려 자본주의와 제로섬 관계에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분배의 공정성을 기회나 과정의 평등으로 구현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현실적으로 '동일한 출발선'을 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과의 보정을 통해 지나친 불평등을 줄이는 일이 필요합니다. 소득에 따라 납부하는 세금액이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죠.

절대적인 결과의 평등을 추구해서야 공산주의 국가와 다를 바 없습니다.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며 공동체의 생산성도 하락합니다. 다만 분배적 정의를 실현하는 데 있어 능력주의라는 단일 필터를 고집하는 일의 불공정성과 문제, 한계를 인식한다면 다양한 분배 원칙과 가치 모델을 구축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못한 때라면 불평등의 해소엔 분배의 보정이 필요합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자유의 보장에도 기여할 수 있습니다.

입시 문제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의 성적은 대학의 서열을 결정하며, 이는 사회에서의 소득에 영향을 미칩니다. 소득의 우위는 다양한 사회적 기회, 정치권력, 명예에 영향을 미칩니다. 나아가 자식 세대로까지 연쇄적으로 이어지죠.

따라서 개인이 이를 거부하고 다른 방식으로 사회적 보상을 노리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합니다. 또 이러한 사고방식은 구성원 전체가 공유하기에 모두들 낙오하지 않기 위해 모든 자원을 동원해 경쟁 상태에 내몰립니다. 결국 능력주의라는 획일화된 보상체계는 헤게모니로 정당화되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셈입니다. 자아실현의 다양성은 '욜로' '워라밸' '부캐'라는 표현처럼 개인 층위에 맡겨지죠.

이는 사회적 안전망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사회가 개인의 삶을 든든히 보장해준다면 과감하게 창의적인 일에 도전하며 실패에 두려워하지 않고 재도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국 레가툼연구소가 발표한 '2020 레가툼 번영지수' 및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의 '사회의 질과 국민통합' 보고서(2015)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사회자본과 사회적 보호 역량은 각각 167개국 중 139위, 36개국 중 32위입니다. 사회자본은 사회적 관계와 제도에 관한 신뢰를 나타내며, 사회적 보호 역량은 복지 수준을 상징합니다. 기댈 곳 없는 각자도생의 환경에서 입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 거죠.

내용

사회적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제도적 접근

개인 차원의 대응은 문제 해결에 소구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정책에 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부와 권력의 집중을 막고 양극화 문제 해결에 기여할 제도적 접근들을 살펴봅니다.

조세를 통한 부와 기회의 순환

OECD 자료를 보면 한 가지 변함없는 원칙이 있다. 세금이 높은 국가일수록 빈부격차가 낮다는 것이다. — 도서 <능력주의는 허구다>, 스티븐 J. 맥나미·K. 밀러 주니어, 337쪽.

앞서 언급했듯 세금 제도는 사회적 재분배의 중요한 수단입니다. 세금이 높을수록 재분배율이 높죠. 소득이나 부에 따라 세율이 달라지는 누진세가 대표적입니다. 누진세는 소득이 높은 사람에게 높은 세율을 적용하는 응능과세원칙(ability-topay-principle)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렇기에 부의 배분에 직접 관여할 수 있죠. 특히 상속세의 경우 능력과 무관하게 축적된 부인 상속에 대한 세금인 데다, 세대가 바뀔 때 '판'을 새롭게 짜는 데 기여해 불평등한 출발점을 조정하는 의미가 있죠.

이렇게 징수한 세금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공공 서비스 이용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교육, 의료, 취업 서비스 등을 제공해 부유층과 빈곤층 간 기회의 격차를 줄이고 좀 더 공평한 경쟁의 장을 만들 수 있죠. 출발선뿐 아니라 과정의 공정에도 기여하는 겁니다.

세금은 민감한 문제입니다. 지나칠 경우 사람들의 성공 욕구를 약화시키고 저축이나 투자 의욕도 꺾을 수 있죠. 투자는 낙수 효과를 통해 경기를 활성화하고 일자리를 생성하는 측면이 있고요. "최고의 복지는 일자리"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요. 그러나 비능력적 특혜를 통해 소득과 부를 지속적으로 늘리고 세습할 수 있는 경우 능력과 무관한 이익에 누진세를 적용하는 것은 불평등을 완화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됩니다.

시장으로부터 보호하는 재정 지출 정책

모든 근대 국가들은 혼합 경제(mixed economy) 체제를 취합니다. 시장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정부 결정에 의해 운영되는 부분도 상존하죠. 정부의 재정 지출은 의식적으로 시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떼어놓는 영역에 사용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공교육입니다.

공립학교는 영리를 목적으로 삼지 않으며 정부의 관리 아래 모든 시민에게 동등한 교육 서비스를 제공할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것이 공동체의 이익에 도움 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필수적이기도 합니다. 왜일까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시민이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지적 소양을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시민이 주인이듯 모든 시민이 평등한 결정권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의 엘리트보다 의식 있는 대중이 사회 전체로 볼 때 가장 큰 이익이 됩니다. 민주주의의 발전과도 연결되죠.

게다가 교육은 능력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 되는 지출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사회적 기회에 접근하려면 필요한 교육이 불공평하게 주어진다면 긍정적인 능력주의를 실현하기란 더욱 힘들기 때문이죠. 교육의 평등에 있어 자율형사립고 문제가 계속해서 도마에 오르내리는 이유기도 합니다. 현재로선 그리기 힘든 미래지만 정부가 예산을 지원하는 공립학교가 사립학교만큼 좋아지면 교육이라는 기회의 공평성 문제는 해결될 수 있죠.

교육 외에도 사회 기반 시설 및 의료 서비스 지원 등도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세우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재정 지출입니다. 생존, 안전과 같은 기초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자아실현과 같은 상위 욕구를 발휘할 수 없다는 매슬로 욕구 이론이 나타내듯 저소득층의 가용 자원을 아껴주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잠재력의 발전은커녕 생존을 위해 가뜩이나 부족한 여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죠.

차별을 막기 위한 조처

차별은 성별, 계급, 인종, 국적, 나이, 장애, 질병 등 비능력적 요인에 따라 불평등을 유발합니다. 그러므로 기회의 평등을 위해선 이에 따라 누구도 기회와 평가에 있어 배제 받지 않아야 합니다.

이에 대해선 차별 행위에 대해 법적 제재를 내용으로 하는 차별금지법 제정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사후 제재를 넘어 미래의 차별이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고 차별로부터 보호하는 관행을 도입하는 것이 목표로 꼽힙니다.

이외에도 입학이나 채용 절차를 공개적으로 진행하는 것도 차별을 막는 의미가 있습니다. 선발의 투명성을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공정하게 기회를 부여받지 못해 온 취약 집단에 대해 할당제와 같이 보완적 제도를 마련하는 것 역시 같은 흐름입니다.

할당제라고 해서 능력 없는 사람을 뽑자는 게 아닙니다. 사회적 차별이나 구조 불평등에 의해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능력 있는 사람 뽑자는 것이죠. 이는 집단의 다양성을 키워 더 나은 성과를 내는 데도 기여합니다. 물론 할당제를 포함해 차별을 막기 위한 모든 조처가 필요 없는 사회가 가장 이상적입니다. 언젠가 폐지를 목표로 해야 하지만 사회의 공정성을 실현하는 복지로서 현재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의미

일의 존엄성과 겸손의 필요성

지난 화에서 <공정하다는 착각>을 통해 저자 마이클 샌델이 내세운 능력주의에 대한 대안을 일부 거론한 바 있습니다. 그 중 '능력주의적 서열에서 벗어나 일의 존엄성 인식하기' '성공과 능력에 깃든 운적 요소를 인지한 겸손'을 여기서 이야기하려 합니다. 앞서 간략히 살펴본 정책 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필요한 게 있습니다. 권력자 및 사회 지도층의 의지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일의 존엄성과 능력에 깃든 운(비능력)적 요소를 인지한 겸손이 필요합니다.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위 정책들은 그간 존엄을 인정받지 못했던 계층을 위한 것이거나 특정 성공에 기여했음에도 소외된 주변에 돌아가는 정책이기 때문입니다.

일의 존엄성

언젠가 우리 사회는 청소 노동자들을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회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말이죠. 따져 보면 우리가 버린 쓰레기를 줍는 사람은 의사만큼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가 그 일을 하지 않느다면 질병이 창궐할 테니까요. 모든 노동은 존엄합니다. — 마틴 루터 킹(도서 <공정하다는 착각>, 325쪽.)

일의 존엄성을 환기하는 일은 인간과 일의 가치를 환기하는 일입니다. 능력주의는 분배적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지만, 정의는 분배의 문제만 있지 않습니다. 올바름의 문제도 중요합니다. 오로지 성과와 능력에 따라 일의 가치가 평가된다면 여기에 부합하지 않는 이는 무시받아 마땅한 불행이 정당화됩니다. 이러한 사회는 건강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늙거나 병들고 장애를 얻어 사회적 약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무지의 베일' 상태에서 최소수혜자에게 최대의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롤스의 정의론과도 부합합니다.

급여에 따른 일과 능력의 평가는 사회적 가치를 온전히 드러내주지 못하는 점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과대하게 어떤 경우에는 과소하게 평가됩니다.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부유한 카지노 왕의 사회적 기여가 소아과 의사보다 정말 1천 배나 가치 있는지 묻죠. 시장 사회에서 '능력에 따른 몫을 받는다'는 능력주의적 맹신은 진정한 가치 비교의 눈을 흐리게 합니다.

겸손의 태도

일의 존엄에 임금과 소득만 있는 게 아니듯 성공 역시 스스로의 능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능력과 성공에는 수많은 우연과 비능력적 요소가 작용합니다. 겸손은 이를 인지하는 통찰입니다. '우연성'이나 '비능력적 요소'가 국내에서 주로 '운'으로 통틀어 번역되기에 '겸손'이 다소 도덕적 성찰로 묘사되는 경우가 있지만, 엄밀히 말해선 성공에 깃든 능력 외적 요소를 인지하는 통찰입니다.

능력의 우연성에 대해 인식하고 성공에 있어 수많은 사회·문화적 요소가 작용했음을 인지해야만 스스로의 특권을 과도하게 정당화하는 심리에서 벗어나 공동선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겸손은 연대를 끊는 가혹한 능력주의의 홍역을 극복하고 더 관대한 공적 삶을 실현하는 토대가 됩니다.

키워드

복합 평등(complex equality)으로서의 정의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중대한 문제는 돈의 불평등한 분배만이 아니라 돈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에게 모든 것이 집중되어 다른 것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마이클 왈처, 1999년 10월 내한 당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사회적 분배의 다원론을 실현하는 정의론으로는 마이클 왈처의 복합평등론이 있습니다. 그는 롤스처럼 분배가 사회정의 실현에 중요하다는 점은 동의했지만, 개인들의 고유한 상황을 무시한 가상적 상황에서 평등의 필요성을 역설한 롤스의 정의론을 현실성 없는 추상적 정의라 비판했습니다. 왈처는 사회마다 다양한 가치가 존재하며 그 가치마다 고유한 영역이 있으므로 서로 다른 영역의 가치는 서로 다른 기준에 의해 분배돼야 한다고 봤죠. 이를테면 경제 영역에 속하는 부가 정치 영역에 속하는 권력에 영향을 주면 안 되는 것처럼요.

그는 이를 '독점'과 '지배'의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왈처는 독점은 용인하되 지배는 막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독점이란 한 영역의 가치를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것이며, 지배는 다른 영역의 가치까지 잠식하는 일입니다. 예로 들었던 부의 독점의 경우 자유 교환 능력의 우위를 통한 불평등이기에 인정하지만, 경제적 능력이 공직이나 권력의 획득 등 다른 영역에까지 지배로 나아가면 사회적 불이익을 야기하는 부정의로 판단합니다.

이는 사회적 가치를 절대적으로 평등하게 분배하지 않고 각각 영역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평등주의적 가치를 구현할 기회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죠. 독점과 지배 개념을 통해 정부 개입 적정선에 대해서도 기준을 드러낸 셈이고요. 능력주의의 대안에 있어서도 능력주의가 작동하는 분야를 구분해 정경유착과 같은 폐해를 방지하고, 영역마다 능력이 아닌 다양한 기준을 특수성에 맞게 마련할 사고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해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