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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

북악 산신 찾는 '정도령'! 박근혜는 아니란 말?

특별기획 팩션 소설, ‘운종룡 풍종호(雲從龍 風從虎)’ 중앙 SUNDAY에서 연재를 시작한다. 다음은 중앙SUNDAY 기사 전문.
북악 산신이 찾는 정도령! 메시아 같은 그는 누굴까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①

김종록 작가가 동양고전 

주역을 바탕으로 집필한다.
주역은 우주 변화의 원리와 인간사의 길흉을 담고 있는 신비의 철학서다.
주역으로 풀어보면 지금은 하늘과 태양, 남성, 권위를 상징하는 건(乾)의 시대에서 땅과 달, 여성, 포용을 상징하는 곤(坤)의 시대로 변화하고 있다고 한다. 유력한 여성 대선 주자 박근혜 후보와 여러 남성 대선 주자들 가운데 과연 누가 하늘을 나는 용이 되어 여의주를 쟁취할 것인가.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별
청와대 뒷산 북악은 별 같은 산이다. 해맑은 날, 광화문 광장에서 북악을 우러러 보라. 영험하고 청수한 기운이 뻗친다. 가히 천하제일복지답다. 세계 어느 나라 수도 중심에 이런 명산이 있는가. 경복궁 궐내를 거닐어 북문 신무문(神武門)을 나서면 곧바로 청와대 본관이 보인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이 산업화와 민주화의 기적을 이끌어 냈던 장소다. 나라는 융창했는데 유감스럽게도 대통령들의 말년은 비참했다.
이를 두고 잡술 서적 몇 줄 읽은 속사(俗士)들은 이 복된 터를 탓해 왔다. 북악이 무정하게 동쪽으로 고개를 돌렸느니, 지기가 다했느니, 산신의 영역까지 너무 깊게 파고들어서 노했다느니 온갖 참언으로 쑥덕공론을 즐겼다. 가당찮은 잡설이다. 터가 나쁜 탓에 대통령은 불행하고 나라는 온 세계가 놀랄 정도로 눈부시게 발전했더란 말인가. 그렇다면 멸사봉공의 터가 되는 거지, 왜 나쁜 터란 말인가.
인왕산 산책로에서 동쪽 청와대 터를 건너다보라. 탄성이 절로 나오는 명당이 틀림없다. 터가 문제가 아니라 공간 구성이 문제고 들어가 사는 사람들의 심보가 문제 아니었을까.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은 저마다 업적도 컸지만 과오도 컸다. 대통령 자신도 그랬지만 친·인척이나 비서진, 측근들의 비리가 끊임없었다. 그렇다면 최고 권력을 쥔 자들이 누린 탐욕의 대가를 응당 치른 것이므로 터를 탓할 일이 아니다. 퇴임 후에도 국부로 존경받는 대통령이 나오게 되면 청와대 터의 오명은 그날로 말끔히 씻길 것이다.
한반도는 終萬物 始萬物의 땅
“그 화상 누군지 입바른 소리 한번 잘한다!”
산책로를 거닐던 백두옹(白頭翁)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걸음을 멈췄다. 이 음성은 분명 속기가 빠진 자의 것이었다. 그는 노안을 조이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무심히 지나가는 등산객들뿐 주인공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공중을 건너가는 바람 소린가. 백두옹은 이내 바위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인구 천만 거대 도시의 빌딩숲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개화기의 초라했던 거리 풍경과 한국전쟁 때의 포연 짙은 폐허를 떠올렸다. 돌아보면 옛 선인들이 일렀던 개벽의 땅이 바로 이곳 서울이다.
“들을지어다. 나는 북악의 진국백(鎭國伯)이니라.”
“아, 국사당 산신님!”
백두옹은 북악을 향해 몸을 곧추세웠다. 120세란 두 갑자의 세월을 떠받쳐 온 등은 다소 굽어 있었지만 귀에 걸칠 정도로 길게 자란 흰 눈썹 밑으로 눈빛이 번뜩였다.
“백두옹 자네. 왜 이제야 왔는고?”
“굳이 제가 나서지 않아도 국운이 좋았는걸요.”
“한데 왜 늙어 꼬부라져서야 나타나 청승을 떠누?”
주역(周易)에서 말한 약속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새로운 문명의 꽃이 한반도에서 피어난다는 그 약속 말입니다.”
“종만물 시만물(終萬物始萬物)의 땅?”
“그렇습니다. 한반도는 인류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의 백화점이자 새로운 사상과 조류를 빚어내는 용광로니까요. 불과 30년 전만 해도 허황하다며 시큰둥하더니 요즘에는 제법 귀를 기울입니다.”
백두옹은 한국전쟁 후 유엔 구호물자와 식량으로 연명하던 나라가 세계 일곱 번째 교역대국으로 발돋움한 현대사를 꿈결처럼 더듬었다. 그리고 이제는 한류가 세계를 휩쓸고 있었다.
“그래서 감격스럽게 서울 도심을 조망한 게야?”
“내심 걱정도 큽니다.”
“내가 걱정이지 이녁이 무슨 걱정? 친형을 감옥에 보낸 청와대 주인장의 깊은 시름이 내 시름일세.”
북악 산신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MB는 마지막 구시대 대통령이 될 겁니다. 머리 밝은 국민들이 다양한 SNS를 통해 뒤틀린 제도권 정치권력을 무력화시키고 있어요. 국민들의 높은 기대치를 효과적으로 수용할 지도자가 필요한데 지금으로선 누가 돼도 걱정이 태산이로군요.”
백두옹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내 고민이 바로 그거야. 나는 정도령을 찾고 있느니. 새 시대, 새 나라를 열어 갈 새로운 국가 리더십 말일세. 입에 참기름 바른 정치 구호가 아니라 진심으로 나라 생각, 국민 생각, 겨레 생각하며 비전을 제시하는 대통령이 청와대 주인으로 들어와 주었으면 좋겠어. 그놈의 터가 나쁘단 소린 다시 듣고 싶지 않아. 그대 말마따나 국가의 명운이 달린 아주 중요한 시기야. 여태까지는 국민총화에 행운까지 더해 이만큼 성장해 왔지만 앞으로는 오리무중이야.”
북악 산신의 목소리는 시름겨웠다.
“그런데 웬 정도령 타령을 하세요? 정감록이니 격암유록이니 하는 예언서들은 진작 용도 폐기된 위서(僞書)들입니다.”
“이런 답답한 화상 같으니. 공부가 깊은 줄 알았더니만…. 역시 인간의 어법과 신의 어법은 다르구나. 너는 정도령의 진짜 의미를 아직도 모르고 있다. 그나마 청와대 터가 천하제일복지라고 인정하고 주역을 좀 읽었다니 함께 대권을 논할 수는 있으려나? 너는 필시 주역으로 이번 대권을 저울질하려고 하렷다!”
“그렇습니다. 주역 그리고 한국 역학인 정역(正易)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가치관의 대전환기가 시작되었어요. 국가권력 주도의 사회, 승자독식 자본주의는 끝났습니다. 남녀 양성평등 사회가 돼가면서 여성 리더들이 급부상하고 있어요. 주역과 정역의 변화원리 그대로입니다. 이번 대선은 주역 철학을 확실한 나침반으로 쓸 수 있습니다.”
12월 19일은 용띠해 호랑이날
백두옹의 머릿속으로 대선 주자들의 면면과 64괘가 오버랩되었다. 박근혜, 안철수, 문재인, 손학규, 김문수, 김두관, 김태호, 정세균….
그들은 모두 중요한 시대에 태어난 인물들이다. 중요한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 얼핏 축복으로 들리지만 지독한 저주다. 인류사를 훑어보면 중요한 시대에 태어난 자, 하나같이 역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영혼의 심지를 바짝바짝 태웠다. 이번 대선은 능력자의 몫이다. 단지 권력욕에 눈멀어 어물쩍 취하면 반드시 대가를 치를 판이다.
18대 대권!
손에 쥐어 줘도 슬그머니 내려놓아야 할 신물(神物) 같은 것. 양극화 해소를 위한 경제민주화, 성장과 복지, 남북화해 그리고 국위선양! 개념은 제대로 잡히는가. 해법은 정말 있는 것인가? 골치가 지끈지끈 아프다.
대저 축복받은 인생이란 임금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국경이 어디까지인지 알 바 없이 그저 한가로이 밭고랑 갈고 흙덩이 깨며 노래 부르던 이들이었다. 날이 저물어 지등(紙燈) 같은 달이 뜨면 베잠방이에 이슬 적시며 집으로 돌아온다.
양친부모 모시고 처자식과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토장국에 보리밥 말아먹던 목가적인 풍경은 그야말로 아주 사소한 시대의 흔해 빠진 풍속도였다. 따지고 보면 그게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었다. 도시 문명의 한복판에서 애면글면 사는 이들은 그 시절로 영영 돌아가지 못하리.
“내가 너에게 큰 붓을 주련다. 맘껏 휘둘러서 청와대 터에 맞는 주인공을 가려라. 그리하여 오는 12월 19일 호랑이날, 국민과 함께 신명이 내린 자의 입에 여의주를 물려라. 춤추는 그 용이 동방의 하늘을 날면 온 천하가 떨쳐 일어나 호응하리라. 그가 바로 반만 년을 기다려온 정도령이니라.”
그때 먹장구름이 삽시에 몰려들면서 번개가 하늘을 갈가리 찢었다. 그 모습이 흡사 성난 독룡의 혓바닥과 같았다. 귀청을 때리는 천둥이 몇 차례 울더니 후두두 장대비가 쏟아졌다. 백두옹은 태백산 오래된 주목(朱木)처럼 서서 그 비를 흠뻑 맞았다.
“한 가지 명심할 지어다! 지금까진 내가 꾹꾹 참아왔다만 또다시 함량미달인 자, 탐욕스러운 자가 청와대 주인 행세하겠다고 들어올 것 같으면 이번엔 가차 없이 불을 뿜어 주살(誅殺)하리라!”
건괘 다섯 번째 지위가 飛龍在天
요란한 장대비 소리와 뒤섞인 그 음성은 소름이 끼쳤다. 앞을 분간조차 할 수 없는 폭우를 맞고 서서 백두옹은 불현듯 용을 떠올렸다.
용은 상상의 동물이다.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코는 돼지, 귀는 소, 몸통은 뱀,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한데 변신의 귀재였다. 마음대로 변하지 못하면 용이 아니었다. 때로는 산, 때로는 물, 때로는 불이 되었다가 사람의 형상을 취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아까 나에게 말한 북악 산신 또한 용일 수도 있었다.
동양문화에서 용은 상서로운 영물이자 왕을 뜻한다. 목 아래에 거꾸로 박힌 비늘, 역린(逆鱗)이 있는데 이것을 건드리면 누가 됐건 사정없이 물어 죽여 버린다. 왕조시절, 제왕의 심기를 건드린 자 또한 목숨을 보전키 어려웠다.
우리는 대선 후보를 잠룡(潛龍)이라고 부른다. 잠룡은 주역 건(乾)괘 여섯 개의 효(爻:가로 그은 획) 중 맨 아래 지위다. 출마 선언을 하면 어느 정도 실체가 드러났으므로 두 번째 지위인 현룡(見龍)이 된다. 대통령 하겠다고 나선대서 아무나 불러다 쓸 수는 없다.
리더십을 검증받고 지위를 얻은 다음에야 비로소 쓸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을 뜻하는 건괘 다섯 번째 지위는 비룡재천(飛龍在天)이다. 하늘을 나는 용이니 대권을 거머쥔 대인을 뜻한다. 맨 위까지 올라가 권력을 다하게 되면 항룡(亢龍)으로 후회할 일만 남게 된다. MB의 친형 이상득 전 의원은 일찍부터 항간에 만사형통(萬事兄通:모든 일은 형과 통한다)이라는 백만 달러짜리 신조어를 낳았는데 그 말로(末路)는 1.9평짜리 감옥행이었다.
북악 산신이 찾는다는 정도령! 메시아 같은 그는 누굴까? 여야의 잠룡, 현룡들 가운데 정씨가 하나 있긴 하지만 너무 까마득하여 족탈불급이다. 현재 가장 유력한 대선 주자는 누가 뭐래도 박근혜 후보인데 엉뚱한 도령이라니? 도령은 총각을 대접하는 말, 그렇다면 박근혜 후보는 아니라는 말인가?

문둥이 다음에 거지가 왔고, 그 다음엔 중이 온다!

폭우가 그치면서 이글거리는 태양이 나왔다. 백두옹은 바위 그루터기 위에 엉거주춤 서서 젖은 모시 두루마기를 벗어 짜기 시작했다. 그때 적삼 주머니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②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좇고
-할아버지! 지금 어디 계세요?
“은강이로구나. 인왕산 산책로란다. 비를 흠뻑 맞았어.”
은강이는 백두옹의 고손녀다. 뉴욕에서 대학을 다니다 방학이 되어 서울에 와 있었다.
-감기 걸리면 어쩌시려고. 모시러 갈게요. 기다리세요.
할아버지를 끔찍이 위하는 은강이는 마지막 조선왕조 인물이 폐렴이라도 걸릴까봐 안달이다. 그는 고스란히 20세기를 관통해왔고 눈과 귀가 흐리긴 하지만 사지가 멀쩡하게 활동하고 있다. 신문도 보수와 진보를 아울러서 보고 컴퓨터도 하며 스마트폰도 쓴다. 나이 먹었다고 못 따라갈 백두옹이 아니다.
털어 입은 옷이 절반쯤 말랐을까. 고손녀가 장밋빛 오픈카를 타고 왔다.

“강남쪽은 비 한 방울도 안 왔어요.”

“그래서 여름 소나기는 소 등에서도 갈린다고 하는 게야. 청와대 앞으로 해서 가자꾸나.”
차에 탄 백두옹은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행인들의 이목을 끌며 산길을 내려간 그들은 청와대와 경복궁 사이를 천천히 달렸다.
고려 문종 21년(1067), 이곳에 이궁(離宮)이 설치되었다. 이궁은 임금이 도성 밖에 세운 별궁이다. 조선 태조 4년(1395),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그 후원이 되었다. 흥선 대원군은 의욕적으로 경복궁을 재건하지만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1939년 총독 관저가 세워지고 7~9대 총독이 해방 직전까지 사용했다. 1945년 12월, 이곳은 미국 극동군사령부 하지 중장의 관저로 바뀌게 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들어오면서 경무대(景武臺)로 이름을 바꾼다. 경무대는 경복궁의 ‘경’자와 궁의 북문인 신무문의 ‘무’자를 따온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4·19혁명으로 하야할 때까지 12년간 경무대의 주인 노릇을 했다. 제2공화국의 윤보선 대통령은 청와대(靑瓦臺)로 명칭을 바꾼다. 말도 많은 5·16 군사정변(혁명)으로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들어오지만 차례로 횡액을 당하여 18년간의 영욕의 세월을 마감한다. 이후 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대통령으로 이어진다.

정도령은 正道 걷는 대통령
“은강아, 넌 정도령이 청와대 새 주인이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해?”
백두옹이 큼지막한 선글라스를 낀 은강이에게 묻는다.

“촌스러워요. 꼼수 안 쓰고 ‘정도를 걷는 대통령’이 ‘정도령’이죠 뭐.”

은강이는 그렇게 내뱉으며 가속기를 밟아 속력을 냈다. 늙은이가 고민하던 걸 한 방에 쿨하게 해결해 버린다.
아, 바로 이거다! 정도(正道)를 실천하는 대통령이 정도령이었다! 정도령은 진인(眞人), 곧 참말을 하는 지도자로 성씨나 성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대통령 후보들 가운데 누가 됐건 심보만 바르면 정도령이 될 수 있는 거다. 이처럼 쉬운 걸 어린 손녀한테서 배운다.

백두옹은 디지털 세대의 순발력에 다시 한 번 혀를 내두른다. 디지털 시대에는 연륜과 경험이 더 이상 노하우가 아니다. 그런 것들은 되레 방해가 되기도 한다. 그 단적인 예가 ‘현대판 신’이라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활용능력이다. 할아버지·할머니들은 어린 손자·손녀들에게 열심히 묻고 배워야 한다. 디지털 기술 활용능력은 정확히 나이에 반비례하니까 말이다.

학문도 그렇다. 물리학이 바뀌면 철학이 바뀌고 신학의 입지가 좁아진다. 철학과 종교는 더 이상 세상을 컨트롤하지 못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차는 남산 제1호 터널을 통과하여 쏜살같이 한남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압구정로를 거쳐 청담동 집까지 순식간에 주파해 버린다. 말을 타고 나룻배로 강을 건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근대 과학문명은 시간을 단축시키고 공간을 살해해 버렸다.

집으로 돌아온 백두옹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외손자 며느리가 구수한 모카커피를 내온다. 아들딸, 며느리들은 이미 죽었거나 병원시설에서 지내고 있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자가 인생의 최종 승자라지만 자식들을 앞세우고 혼자만 오래 사는 건 고독이자 형벌이다. 그렇다고 자살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고종명(考終命)은 오복의 매듭이니까 말이다.

침상에 누워 생각을 달리던 백두옹은 스마트폰을 열어 뉴스를 검색한다. 대선 후보 지지율 여론조사가 뜬다. 안철수의 고공행진이다. 예상했던 바지만 그래도 놀랍다. ‘운종룡풍종호(雲從龍風從虎)’는 그가 올해 정초에 쓴 휘호다. 주역 건괘 문언(文言)에 다섯 번째 효사인 ‘비룡재천(飛龍在天) 이견대인(利見大人)’을 풀이하면서 든 비유다. 구름이 용을 따르고 바람이 범을 좇듯 사람들은 서로 같은 기운과 취향을 따른다. 누가 용이고 누가 호랑이인가. 눈치 빠른 이라면 벌써 알아차렸을 터. 문제는 누가 승자가 되느냐다.

백두옹은 침상에서 일어나 강화반닫이를 열고 오동나무 상자를 꺼냈다. 상자에는 흑단나무로 깎은 6효 막대와 대나무에 옻칠한 서죽 50개가 들어있었다. 벼슬길이 끊이지 않았던 가문 대대로 물려온 보물이었다. 어지럽던 시절, 선조들은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날 때면 반드시 주역을 활용했다.
백두옹은 지금껏 좀처럼 점을 치지 않았다. 작년에는 단 한 차례도 치지 않았다. 굳이 점을 치지 않아도 기미만 보고 알 수 있는 직관력이 중요하다. 하지만 올해는 한 차례 쳐볼 참이다. 여야 대선 후보가 정해지면 진중하게 물어 보리라. 그리고 은강이 말마따나 정도를 실천하는 대통령이 되도록 도울 참이다.
자본주의시대에 돈이 되지 않는 건 모두 천덕꾸러기이자 거지발싸개다. 주역 철학은 곧잘 미신 취급당한다. 동양문화를 이끌었던 철학서가 무지한 점쟁이들의 오남용으로 불명예를 떠안았다. 세종대왕이 아시면 여주 영릉에서 벌떡 일어나실 노릇이다. 대왕은 주역철학을 바탕으로 바른 소리글자인 한글을 만들고 갖가지 제도를 정비했다. 문자가 권력이던 시대에 오직 백성들의 편안한 삶을 생각해서였다. 태극(太極:)이 낳은 양의(兩儀:ㅡ,ㅣ)는 함께 모여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가 된다. 여기에 주역 하도(河圖)의 원리를 곁들여 ㅗ, ㅏ, ㅜ, ㅓ, ㅛ, ㅑ, ㅠ, ㅕ 모음을 얻었다. 자음은 하늘(ㅇ)과 땅(ㅁ)과 사람(ㅅ)의 형상에 구강 구조를 더해 얻었다. 과학적인 문자의 원리에 주역철학이 있었다.

동서양 고전 가운데 주역은 유일하게 디지털 코드로 된 철학서다. 이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바코드가 어떻게 고대 사회에서 출현할 수 있었는지 신비하기만 하다. 주역은 디지털 혁명의 선구자다. 온줄(■)과 도막줄(■■)을 여섯 층으로 겹쳐서 64괘를 만들고 그것을 범주로 하여 가치를 모색한다. 2진법을 발명한 독일의 수학자 라이프니츠, 양자역학의 창시자 닐스 보어, 정신분석학자 카를 융이 주역을 열독하고 거기서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건 상식이다.

한마디로 주역은 에너지의 흐름을 패턴화한 책이다. 은비학(隱秘學)이라며 신비화시킬 것만도 아니다. 흐름을 알면 예측이 가능하다. 사리사욕 없이 보면 일마다 해법이 있다.

주역에 날개를 단 공자가 일렀던가. “가히 더불어 말할 만한데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고, 가히 더불어 말할 만하지 못한데 말을 하면 말을 잃는다. 지혜로운 이는 사람도 말도 잃지 않는다”고.

대권 거머쥘 중은 박근혜인가 안철수인가
바야흐로 지금은 백가쟁명이 아니라 천가쟁명, 만가쟁명의 시대다. 말이 홍수처럼 넘쳐난다. 자칫 거기에 휩쓸려 파묻혀버릴 염려가 있지만 이제 나, 백두옹은 말한다. 때가 됐음에 하는 말이니 이는 피할 수 없는 시명(時命)이기도 하다.
꼭 10년 전, “문둥이 뒤에 거지 온다”는 참언(讖言)이 있었다. 나는 같은 문법으로 천명한다. 청와대 주인으로 문둥이 다음에 거지 왔고, 거지 다음에 중이 온다!”

문둥이와 거지가 누구였는지는 천하가 다 안다. 거기 까진 적중했다. 그렇다면 다음에 올 중은 누구인가?

박근혜는 일찌감치 대권 선두주자 자리를 확보한 불세출의 여성 리더다. 그는 중처럼 독신이다. 남녀불문하고 당대 어느 정객이 있어 박근혜의 우아한 풍모에서 뿜어 나오는 아우라에 필적하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이다. 그렇다고 보는 사람의 기세를 꺾어버리는 압인지기(壓人之氣)가 아니다. 부드럽고 조용한 카리스마다. 그는 확고한 국가관과 소신 있는 언행으로 국민적 신뢰를 얻고 있다. 가는 곳마다 지지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든다. 그의 정치적 고향, 영남이나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고향 충청도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적 타관, 호남에서조차 예외가 아닌 듯하다.

이런 박근혜에 맞서는 민주통합당의 문재인·손학규·김두관 후보의 지지율은 미미하다. 현재로선 셋 모두를 합쳐도 박근혜를 이기지 못한다. 그런데 무소속 안

철수 교수의 경우는 다르다. 공식 출마선언을 한 것도 아니고 생각을 정리한 책을 낸 것뿐인데 시민들은 열광한다. TV 예능프로에 출연한 이후 안철수의 지율은 급격히 상승해 박근혜를 앞서는 것으로 나왔다. 문약한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 왔던 그는 민심을 정확히 짚어내고 그 중심으로 파고들었다. 당도 없는 그가 창호지에 물 스미듯 그렇게 시나브로 세를 얻으며 ‘득중(得中)’, 곧 중을 얻었다.

누가 대권을 거머쥘 진짜 중인가? 박근혜인가? 안철수인가? 전환시대의 역사는 결코 수월한 길로만 가지 않는다. 민주통합당의 문재인·손학규·김두관 등의 후보군이 경선 레이스를 펼치며 바람몰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승자가 안철수를 등에 업고 가려 할 것이다. 안철수에게는 없는 게 그들에게는 있다. 바로 정당 정치라는 구조다. 개인은 구조를 깰 수 없다. 안철수를 야권 단일후보로 명예롭게 추대할 수도 있겠는데 아전인수식 탐욕의 정치판에서 그걸 기대하기란 너무 이상적이지 않는가. 진짜 중 가리기,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박근혜 안의 안철수, 안철수 안의 박근혜 찾기

불볕더위가 이어졌다. 말복으로 치달으면서 밤중까지 푹푹 쪄대는 통에 여름 나기가 하루하루 고역이었다. 아스팔트는 이글거리고 시민들은 녹초가 된다. 하필이면 이런 때, 여야 대선주자들이 경선을 치르고 있어 흥행과는 거리가 멀다. 런던 올림픽 기간이어서 더 그랬다. 올림픽이 끝나더라도 ‘주연만 있는 새누리 드라마’ ‘조연만 있는 통합민주 드라마’라서 시청률(?)이 잘 나오기란 애당초 글렀다고도 한다. 박근혜 대세론과 안철수 신드롬이 여야의 당내 경선을 맥 빠지게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꼭 그 둘 중 하나가 청와대 새 주인이 되라는 법은 없다. ‘거지 다음에 올 중’은 아직 가변적이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③
“할아버님! 듣다 보니 그 중, 개념 한번 알쏭달쏭하네요. 승려도 됐다가 민심을 파고든 후보도 됐다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요.”
외손자며느리가 얼음 띄운 오미자 화채를 내오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대선후보들이 낸 책들을 훑어보던 백두옹은 큼지막한 돋보기를 내려놓고 마른세수를 한다. 안철수의 생각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 사람이 먼저다 저녁이 있는 삶 아래에서부터 김문수는 말한다 같은 책들이 책상에 쌓여 있다.
“그 중이 그 중인 게야. 음(音)이 같으면 뜻도 같은 거니까.”

백두옹은 오미자 화채로 목을 축였다.

“어째서 그런 거죠?”
사십 대 후반 외손자며느리는 똑똑한 체는 다 하면서도 동양고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백두옹은 붓펜을 들어 이면지 위에 또박또박 적었다. 나이 탓에 손이 떨렸으므로 글씨는 꿈틀거렸다.

출가중(出家衆)
득중(得中)

“‘중’은 ‘출가중’의 준말이란다. 불도를 닦기 위해 집 떠난 무리, 대중을 뜻하지. 불교의 키워드가 중도(中道) 아닌가. ‘중’은 중도를 행하는 수행자들이란 말씀이야. 주역에서 말하는 득중은 여섯 개의 효 가운데서 2·5효로 각각 하괘, 상괘의 중심자리! 무리의 중심이지. 이때 1·3·5효는 양(陽)의 지위, 2·4·6효는 음(陰)의 지위인데 득중도 하고 지위도 음양에 걸맞으면 ‘중정(中正)’이라고 하거든. 대중(大中), 대정(大正)이라 중도로써 올바로 행하게 되는 게야. 아 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름도 바로 주역에서 따온 거야. 아, 그렇다고 정치적으로 중립이어야 한다는 건 아냐. 단테가 신곡에서 말했던가? 정치적 격변기에 중립을 지킨 자에게는 지옥에서 제일 뜨거운 자리가 배정된다고. 주역에서 말하는 득중은 비겁하게 중간에서 서성대는 게 아니거든.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필요한 곳을 정확히 찾아가는 거지. 때에 적합한 도리, 시중(時中)이라는 건데 그거 아주 어려워. 그거 잘하면 맹자처럼 준성인이야.”

“김대중 이름에 그런 뜻이 있었군요.”

외손자며느리는 중도나 시중이라는 철학용어보다 김대중의 이름이 주역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말에 더 흥미로워하는 눈치였다.

여성 대통령은 시기상조인가
“그런데 할아버님! 은강이 아빠는 우리나라가 아직 여성 대통령을 뽑기에 시기상조래요. 남북이 대치하고 있다고요.”
“허허허, 그 애가 정말 그랬다고? 이재오 의원이 그 말을 했다가 박근혜 후보에게 ‘21세기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분이 있느냐’고 한 방 얻어맞았지 아마?”

백두옹은 짓궂게 웃으며 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은강이 아빠 은근히 마초적인 데가 있어요.”
“넌 그걸 멋지다고 생각하는 눈치던데?”
“사실 요즘 세상에 남자다운 남자 드물잖아요.”
“그래서 넌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게로구나. 특전사 출신이라고?”
“게다가 슈트가 잘 어울리는 남자거든요.”

외손자며느리의 눈가로 화사한 미소가 번졌다. 눈가의 미소는 억지로 꾸밀 수가 없다. 감정을 속이고 조작 가능한 입가 미소근육과는 전연 다르다. 그래서 입이 아니라 눈으로 말할 때 진실에 더 가까운 거다. 아무튼 좌파 문재인이 강남 중년여성에게 이렇게도 어필할 수 있다는 게 새롭다.
“은강이 아빠는 김문수 지사 열성팬이지 않니? 대학 선후배지간이기도 하고.”

“우리 부부는 정치적으로 완전 상호 불간섭이에요, 할아버님. 선택 기준이 보수, 진보도 아니고 학연, 지연이라니. 그건 아니라고 봐요. 슈트가 잘 어울리는 남자! 얼마나 세련된 가치판단 기준이에요?”

그러면서 짐짓 우아한 몸짓을 해 보인다.
“아귀다툼 정치판에 너무 세련된 기준 같구나.”
백두옹은 진영논리로부터 자유로운 외손자며느리가 보기 좋았다.

“할아버님, 정치는 본래 갈등을 기반으로 먹고사는 거잖아요. 적대세력이 사라지면 그 순간, 정치인은 실업자로 전락해버리겠죠.”

“그래서?”
“여야가 드잡이하며 다투지만 사실은 서로 단짝이라고요. 상대와 대립각을 세우며 화려한 언변으로 실현 불가능한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죠. 결과는 피장파장! 국가와 국민을 생각하는 정치인이 몇이나 있겠어요. 국가와 국민을 생각한다고 자기최면 걸고는 뒤에서 도적질하더라고요. 비리의원 보호막 수단으로 써먹는
국회의원 불체포특권! 그거 코미디잖아요.”

낭만파라고 여겼더니 이런 정치혐오증이 있었다. 강남아줌마, 역시 녹록지 않다.

한반도, 공명정대 원리로 전환하는 시기
“얘야, 이번 대선을 계기로 정치풍토가 사뭇 달라질 게다. 머리 밝은 국민이 정도를 걷는 대통령을 뽑고 만들어갈 테니까 너무 냉소적으로 보진 마라.”
백두옹은 붓펜으로 쓱쓱 지도를 그렸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과 러시아, 일본열도, 호주, 태평양 건너 아메리카 대륙이 펼쳐졌다.
“봐라. 우리 한반도는 태평양으로 뻗어나가는 한 그루 생명나무야. 뿌리박고 있는 아시아 대륙은 흙이자 물이고 남극 쪽이 하늘이 되지. 사람으로 치면 우리 한반도는 소년(少年)이고 미국은 소녀(少女)거든. 꽃다운 소년 소녀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으니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음양 충화로 이른바 동양과 서양, 간태(艮兌)의 합덕(合德)이라. 꽃다운 남녀 무리는 그 옛날 화랑도를 떠올리게 하지. 이들이 주축이 되어 바야흐로 새로운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이 싹틀 거라는 얘기야. 동서양 문화의 꽃과 열매지.”

백두옹은 대륙을 유기체와 사람으로 비유했다.

“탄허 스님 예언과 똑같네요.”
“네가 탄허를 어찌 아는고? 그 스님 날 여러 차례 찾아왔었지. 예전에 있었던 역우회(易友會)로 말야.”
“정말요?”
“이 나라 걸출한 인물들 가운데 나 모르고 간 이들 몇 안 돼.”

백두옹은 눈을 감고 왼손으로 알 듯 모를 듯한 수인(手印)을 지었다.
“하긴 할아버님께서는 우리 근현대사의 산증인이시니까요. 1910년 일제의 국권피탈부터 해방, 한국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을 고스란히 목격하셨죠.”
외손자며느리는 앙모하는 눈빛으로 백두옹을 우러렀다.
“목격만 한 건 아니지. 필요할 때마다 적임자를 만나 사명감을 불어넣어 줘왔거든. 대부분 사이비 교주 취급했다만 들을 건 다 듣더구나. 그게 어디 내 얘긴가? 탄허 스님 얘기도 아니고.”

“그럼 누구 말씀이라는 거예요?”
“대경대법(大經大法)이야.”
“네?”

“공명정대한 원리와 법칙이라고. 역리(易理)랄까, 역도(易道)랄까. 주역철학에 근거한 정역에 다 써놨어. 19세기 중반 때 이미 정리해 놓았다고. 뭐, 요샛말로 한반도 메시아 사상쯤으로 이해해도 될 거야. 너무 알려고 들지 마. 이상한 사람 취급 받으니까.”

“언제 그런 세상이 열린다는 거죠?”
“글쎄다. 혹자는 1984년 하원갑자(下元甲子)를 들던데 콕 짚어낼 수야 없지. 요즘 세월이 그 길목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1984년? 섬뜩해요. 조지 오웰의 소설에 등장하는 독재자 빅 브러더가 떠올라요. 요즘 세상에 메시아가 어디 있겠어요? 저는 박근혜와 안철수에게서 독선과 위선의 냄새를 맡거든요. 막연하고 공허한 희망보다 절망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편이 차라리 더 희망적이지 않을까요?”

외손자며느리는 여운이 미묘한 말을 남기고 방에서 나갔다. 백두옹은 물끄러미 뒤태를 응시했다. 인류가 걸어온 길, 희망보다 절망으로 난 길에 가까운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위대함은 절망 속에서도 끊임없이 새 역사를 써나가는 데 있다.

온갖 핍박과 고난의 연대를 건너온 땅, 한반도! 남의 나라 식민지 노예가 되고 동족끼리 피 흘리는 전쟁을 치르고 아직도 여전히 분단된 나라는 상처가 깊다.
그 상처들을 어루만질 리더십은 어머니의 품 같은 것이다. 분노와 질시가 아니라 포옹과 보살핌이다.

차기 대통령, 어머니 미덕 지녀야
백두옹은 역사의 이름으로 말한다. 다음 대통령은 분명 대지의 어머니, 곤(坤:
)의 미덕을 지닌 지도자 몫이다. 강건한 남성보다는 온유한 여성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뜸 박근혜 후보를 떠올릴 게다. 충분히 그럴 만하다. 그는 유력한 여성리더니까.

하지만 주역철학은 그렇게 표피적이거나 단순하지가 않다. 이 늙은이가 보기에 박근혜 의원은 음중양(陰中陽)이다. 겉모습은 여성이지만 내면에 누구보다도 강건한 남성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반대로 안철수 교수는 양중음(陽中陰)이다. 겉모습은 남성이지만 내면에 유순한 여성성을 품고 있다. 말소리며 머리 스타일, 행동양식이 모두 다소곳한 여인 같기만 하다. 요즘 사람들에게 씨알이 먹히는 서양학자의 이론으로 바꿔 말하자면, 남자 안에 있는 여성적 요소 양중음은 아니마(Anima)이고 여자 안에 있는 남성적 요소 음중양은 아니무스(Animus)인 셈인데 안철수와 박근혜는 그 이론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절묘한 역리요, 기가 막히게 부응하는 후보들 아닌가. 이것이 어찌 우연일꼬. 박근혜 안의 안철수, 안철수 안의 박근혜 찾기에 정치적 상상력을 발동해보자.

“대선 주자들, 문무대왕부터 만나봐야 해”

여름은 잔인했다. 찜통더위 속에서 시민들은 에어컨에 생명줄을 대고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사이 예비 전력은 블랙아웃 언저리에서 간당간당 적신호를 보냈고 가뭄까지 더해진 한강과 낙동강에는 녹조류가 번졌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④
백두옹의 여름 나기 비법은 방 안에서의 독서다. 그는 지나온 삶을 회상하고 복기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는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글쓰기만 한 것이 없다지만 좀처럼 글을 쓰지 않는 그로서는 독서가 차선책이다. 얼마 전까지 대선 후보들이 낸 책들을 밑줄 쳐가며 꼼꼼히 본 백두옹은 적이 실망을 금치 못했다. 쓸 만한 참말은 적고 화려한 수사와 그럴듯한 거짓말들이 곧잘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책만으로는 검증하기 어렵다. 조만간 유력한 주자들을 만나봐야 할 것 같았다. 맹자가 옳았다. 눈빛을 마주 대하고 말을 섞어봐야 그 사람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는 법이다.

이른 아침부터 초인종이 울린다.


“할아버님! 누가 찾아왔는데요.”

은강이가 방문을 열고서 이른다.

“이 시간에 날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왜 유명한 논객 있잖아요. 진보·보수를 싸잡아 공격하는 분!”

뉴욕에서 살다 보니 은강이는 한국 사정에 대해 그리 밝지 못했다.

“강권 교수님예요, 할아버님!”

은강이 엄마가 현관문을 열어주며 말한다.

“바쁜 사람이 어인 일인가?”

백두옹이 거실로 나오자 현관문 앞에 서 있던 강 교수가 허리를 숙였다. 군더더기 없는 얼굴 윤곽, 예리한 눈빛이 빈틈없는 당대의 논객답다.

“하도 답답해 어르신 모시고 바람이나 쐬려고요. 기력은 여전하시네요.”

강 교수는 백두옹의 붉은 안색을 보며 감탄했다. 그는 백두옹이 아끼던 제자의 아들이었다. 제자는 이미 고인이 됐고 그의 아들이 이렇게 장성해 이따금 찾아오곤 했다.

“그 성격에 요즘 정국, 참 답답하겠지. 그나저나 안으로 들어오시게.”

“밖에 택시가 대기 중입니다. 나들이 옷으로 갈아입으시죠?”

다짜고짜 강권이다.

“어딜 가려고?”

“저와 함께 바람 쐬시고 이따 저녁 무렵에 돌아오시죠.”

“그 사람 참!”

“할아버님, 어디든 함께 다녀오세요. 요즘 실내에만 계셨잖아요. 강 교수님이 오죽 알아서 잘 모시겠어요?”

외손자 며느리는 곧 옷가지와 모자를 꺼내놓는다. 집에서 나온 백두옹은 강 교수와 함께 서울역으로 달렸다.

“어딜 가는데 이러는가?”

“경주요.”

“그 먼데까지 왜?”

백두옹 같은 상노인에게 장거리 여행은 무리였다. 그래서 강권 교수는 자동차 대신에 KTX 편을 택했다. 워낙 치밀한 그라서 매사가 똑똑 떨어졌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열차에 오른 둘은 특실에 마주 앉았다.

“피곤하시면 편하게 눈을 붙이세요.”

“나 아직 팽팽하다네. 그런데 경주에 누가 있나?”

백두옹은 손가락으로 두피를 두드려 마사지하며 묻는다. 정수리 부분의 모발이 약간 빠졌지만 여전히 빼곡한 백발이었다.

“대왕이 기다리고 계시지요.”

깐깐한 강 교수가 해설피 웃는다.

“생뚱맞게 대왕이라니?”

“동해 바다용이 되신 문무대왕요.”

“옳거니! 대왕암이 보이는 이견대 가는 게로구나.”

백두옹이 손으로 탁자를 쳤다. 이런 때는 늙은이가 아니라 꼭 소년 같다.

경주 감포 바닷가에서 본 한민족의 꿈

역시 촉이 빠른 노익장이라고 생각한 강 교수는 백두옹의 깊은 주름살 너머 형형한 눈빛을 응시한다. 지혜가 담긴 귀한 눈이다. 귀인이란 나이가 들어 꼬부라져도 추한 구석이 없어야 한다. 어차피 몸뚱이는 무너져 내리게끔 돼 있다. 인간의 고귀성은 불멸의 정신과 그 실천에 있는 것이다. 그게 빈약하니까 돈에 집착하게 된다. 돈마저 없으면 사람 대접 못 받으니까. 슬픈 일이다.

“이건 정말 궁금해 여쭙는 건데요. 세계 최고의 자살률, 만연한 성범죄와 정치 부패, 국가관과 역사의식 부재 상태가 지금 한국의 자화상입니다. 국민이 어디로 가야 할지 그 지향점조차 합의하지 못한 분단국가죠. 그런데 무슨 수로 인류의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을 선도한다는 건가요?”

열차가 한강철교를 건너자 강 교수는 푸르죽죽한 강물을 바라보며 조목조목 따지고 나왔다.

“늙은이가 입바른 소리 몇 마디 했다고 나도 공격하는 겐가?”

백두옹이 웃으며 강 교수를 건너다본다.

“공격이라뇨. 정말 궁금해서….”

“강 교수! 난 구한말부터 그 험한 꼴 다 보고 겪으며 살아왔어. IMF 경제위기 때 모두가 고생했고 내년에 퍼펙트 스톰이 온다고 야단이지만 이 나라 근현대사 100년의 역사를 돌이켜보게. IMF 구제금융 시절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어. 그런데도 오늘날 세계가 놀라는 비약을 했단 말일세. 잠재력이 폭발하면 위기 속에서도 기적을 낳는 걸세. 산술적인 논리로는 내 말 이해 못해.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일정하게 자라는 건 아냐. 극적으로 점프하는 대목이 있단 말씀이지. 지나봐야 비로소 알아.”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더 따져 물을 수가 없잖습니까?”

강 교수는 마뜩찮은 표정을 지었다.

“철부지들 천지에 내가 뭔 얘기를 해.”

백두옹은 등받이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아버린다.

주역에서 말하는 시중은 때를 알고 그때마다 필요한 일을 행하는 것이다. 때를 모르면 헛수고일 뿐이다. 때를 모르고 나대면 철부지가 된다. 철부지(<5C6E>不
知)는 순우리말 같지만 한자어다. 철(<5C6E>)은 싹이 돋아나는 모양을 나타내는 상형문자다. 싹이 트는 때도 모르고 나대는 어린 것이나 어리석은 이를 가리켜 철부지라고 한다. 철부지들이 공개석상에서 국사를 논하고 감히 한 나라를 다스려 보겠다고 설친다. 그들이 열매 맺는 때를 알 리 만무하다. 답답하다.

3시간 뒤 그들은 경주 감포 바닷가 이견대에 도착했다. 언덕배기 정자에 서자 바닷속 문무대왕릉이 한눈에 들어왔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 제30대 문무왕은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돼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왜구들이 수시로 출몰해 노략질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화장한 그의 분골은 바닷속 바위에 안장된다. 오죽 골칫거리였으면 삼한강토를 통일한 대왕이 동해 수중릉에 묻히길 원했을까. 대왕의 아들 신무왕은 감읍해 근처에다 감은사를 세웠다. 그리고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신기한 피리, 만파식적을 얻는다. 이에 대왕암이 보이는 언덕에 이견대를 세웠다. 이견대(利見臺)는 건괘 2효와 5효의 이견대인(利見大人·대인을 만나보면 이롭다)에서 따온 이름이다. 2효는 재상이 될 현자이고 5효는 제왕에 해당한다.

대통합의 국가 리더십 발휘해야
“어르신, 저는 주역의 말씀처럼 대선 후보들이 언제 어떻게 대인을 만나보느냐에 따라 판세가 결정된다고 봅니다. 머잖아 문재인, 손학규, 김두관, 정세균 등 야권 후보와 안철수가 삼고초려 형식으로 만나 대권 드라마를 연출할 것 같지 않습니까? 문왕과 강태공, 유비와 제갈량, 정도전과 이성계처럼요.”

“이곳 이견대에 와서 청와대 새 주인이 될 이가 만나봐야 할 대인을 가늠해본다? 안철수가 대인이라…. 그거 재밌는 걸!”

백두옹은 강 교수가 주선한 이견대 여행이 뜻깊다고 생각했다.

“박근혜는 정해진 거나 다름없고요. 그래서 저는 이번 대선을 ‘남북전쟁과 슬픈 용병들’로 정리합니다.”

“뜬금없이 웬 남북전쟁이누? 선거철 돌아오니 또 그놈의 지긋지긋한 지역감정 타령인가?”

“그게 아니고요. 문재인, 김두관, 김태호, 안철수의 경남과 박근혜의 경북! 경남과 경북의 대권 싸움에 호남인이 앞다퉈 용병으로 나서지만 별로 얻을 건 없다는 것이죠.”

예리한 통찰이라고 여기는 듯한 강 교수를 향해 백두옹은 혀를 끌끌 찬다.

“이 사람아, 어느 때보다 통합의 리더십이 필요한 때에 남북전쟁이니 슬픈 용병이니 하는 표현들은 옳지 않아. 독도가 바로 저 바다 너머지? 엊그제 이명박 대통령이 헌정사상 처음으로 독도 방문을 결행했는데 그거 어떻게 생각해?”

“주도면밀한 일본이 분쟁지역화할까 걱정이네요. 외교적으로도 득보다 실이 클 거 같고요.”

“그런가? 문무대왕은 뭐라 하실까? 아마 백 번 잘한 일이라고 하실 거네. 대통령이 우리 영토에 갔는데 그게 왜 문제가 돼? 대왕께서는 더 당당해지라고 주문할 거네.”

백두옹은 단호했다.

“결정적일 때 써야 할 마지막 카드를 국면전환용 이벤트로 써먹어버렸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이 사람아, 이해(利害)가 걸린 문제는 시비(是非)부터 따지는 게 원칙이야. 옳으면 취하고 그르면 버리는 게 군자고 신사야.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해온 역사가 어언 1500년이네. 임진왜란과 한·일강제병합이 대표적이지. 그래 놓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인의 역사 접근 태도가 문제야. 우리야 힘이 약했던 죄밖에 더 있어? 저들은 기회만 있으면 우리 한반도를 집어삼키려 들 거야. 두고 보게. 우리가 약해지면 반드시 준동할 거네. 치욕스러운 식민지 백성으로 살았던 적이 있는 이 늙은이 말 허투루 듣지 말게. 나는 그만그만한 대선 후보들이 맨 먼저 만나봐야 할 대인은 문무대왕이라고 보네. 후보들이 여기 와서 문무대왕께 맹세했으면 좋겠어. 이제부터는 혈연·지연·학연·정파 다 떠난 대통합의 국가 리더십을 발휘하겠노라고. 그리하여 남북을 통일하고 일본을 능가하는 문화강국의 초석을 다지겠노라고 말이야. 그게 독도 문제의 해법이야!”

목에 핏대를 올린 백두옹은 연방 마른기침을 해댔다. 그러다 손으로 입을 훔쳤는데 붉은 피가 묻어 나왔다.

“아, 어르신!”

소스라치게 놀란 강 교수가 백두옹을 부축했다.

안철수는 척목 없어 이대론 하늘을 날 수 없지

“괜찮네. 물이나 좀 주게.”
강권 교수가 병원에 가보자고 했지만 백두옹은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한 세기를 넘게 살아, 진작부터 날 받아놓은 덤 인생인데 목에서 피 몇 방울 나왔다고 웬 호들갑이냐는 핀잔이었다. 배낭에서 생수를 꺼내 건네자,백두옹은 입을 헹군 다음 밭은 목을 축였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⑤

“이 무더위에 괜한 나들이를 했네요, 어르신. 좀 쉬셨다가 그만 서울로 돌아가시죠.”

물 적신 휴지로 손을 닦아주면서 강 교수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백세가 넘은 상노인이라서 무슨 일이 닥칠지 알 수 없었다.
진짜 철부지들은 일본의 우익 단체들과 그들을 설득시키지 못하는 일본 지도자들이야! 난 양식 있는 일본의 시민사회힘을 믿는다네.”

정말 못 말리는 노익장이었다. 강 교수는 백두옹을 청담동 댁에 모셔다 드리고 꼭 병원에 가보시라고 일렀다. 노인의 각혈은 폐렴이나 폐암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온 강 교수는 며칠 동안 답답한 나날을 보냈다. 백두옹의 말처럼 세계는 지금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로 ‘세력 전이(power shift)’가 일어났다. 그런데 일본은 한국과 중국, 러시아와 동시다발적으로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었다. 역사 청산은 고사하고 군국주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일본은 껍데기만 의회민주주의 체제이지 국민의식 수준은 신격화한 천황 중심 봉건사회다. 재정위기에 빠진 유럽, 피로가 누적된 미국과 달리 동아시아는 급부상하고 있다. 남미와 아프리카의 주요 국가들은 동아시아를 주목한다. 한·중·일 삼국이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잘 살려야 하는데 배타적인 민족감정과 영토분쟁으로 세계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블랙코미디가 따로 없다. 이러다가 산통 다 깨지지 않을까 염려된다.

안철수 업으면 누구라도 飛龍在天

내남없이 큰 지도자, 큰 리더십이 절실하다. 사소한 이익보다 인류가 지켜야 할 가치들을 앞세울 때, 세계는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난다. 참 지도자, 큰 지도자라면 대중이 듣기 좋은 말만 할 게 아니라 과감하게 ‘노(No)!’라고 외칠 수도 있어야 한다. 인기에 영합하는 모호한 말잔치가 세상을 자꾸 혼란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신문사에 보낼 칼럼을 정리하다가 속이 답답해졌다. 아직 대낮인데 냉장고 에서 캔 맥주를 꺼내 마셨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글을 쓰면서 무음 모드로 해놓았던거 같은데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다.

“강권 교수님이시죠?”

또랑또랑한 아가씨 목소리다.

“그렇소만.”

“청담동이에요. 할아버지께서 못다 한 말씀이 있다며 뵙고 싶어 하세요.”

“은강이?” “네. 오시기 힘들면 그쪽으로 가시겠답니다.”

“무슨 말씀을! 곧장 건너가지.”

나들이를 하겠다는 건 건강에 이상이 없다는 뜻이기도 해서 반가웠다. 아직 여쭙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글도 잘 써지지 않는데 차라리 잘됐다 싶어 강 교수는 택시를 탔다. 백두옹은 거실 소파에서 강아지를 안고 있었다. 뜻밖이었다. 강아지를 어린애 어르듯 하는 노인은 휴지 가져오라는 잔심부름까지 시키면서 대견해 했다. 그런 노인의 얼굴은 천진스러웠다. 누가 저 노인네를 주역의 대가이자 당대의 예언자라고 하겠는가.

“어르신, 강아지를 그렇게 애지중지하실줄 몰랐습니다.”

강 교수는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래도 이 녀석이 날 제일 좋아한다네. 나 죽어 납골당 가면 이 녀석 사진 놓아 달라 했는걸.”

백두옹이 파안대소한다.

“설마요.”

“정말일세. 아무래도 인간은 인간과 소통하는 거보다 이런 반려동물이나 화초들과 소통하는 편이 훨씬 더 쉬운 것 같아. 집집마다 반려동물과 화초 안 키우는 집 없거든. 따지고 보면 사람만큼 말 안 듣고 말 안 통하는
대상도 드물어. 제 얘기만 해대거든. 모두가 정치인들 욕하지만 그래도 신통한 사람들이야. 반려동물이나 화초 대신 사람을 대화 상대로 선택한 용기가 있잖아. 이 지상에 어디 사람만큼 까다롭고 피곤한 생명체가 또 있
던가?”

백두옹의 말을 듣고 있자니 강 교수는 청부살인업자 레옹이 떠올랐다. 언제 벌어질지 모를 살인극 속에서도 그는 화분 하나를 들고 다니며 정성껏 돌봤다. 사람은 무참히 죽여도 화초는 절대 죽일 수 없다는 듯이.

“진영논리에 갇히면 반대 진영을 개만도 못하게 여길 걸요. 정치인들의 집념은 어떻게 해서든 정권 잡는 거거든요.”

“순 날것들 같으니! 강 교수, 저번에 경주 이견대에서 안철수 원장이 대인이라고 했었지? 야권 후보들이 삼고초려로 만나봐야 할 대인!”

백두옹이 강 교수를 자신의 방으로 이끌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김문수와 안철수, 박근혜와 안철수 그림은 왜 못 그리는 건가?”

“에이, 그건 아니죠! 전에 한나라당이 집권하는 걸 막겠다고 확실히 선언했었답니다.”

“허허허, 과연 그럴까? 정치는 생물이라면서.”

백두옹은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더니 붓펜을 들어서 편안할 안(安)자를 써보였다.

“지금으로선 갓(宀) 쓴 여인(女) 안철수(安哲秀)를 잘 업기만 하면 여야 어느 후보라도 비룡재천일세. 경상도 말고도 호남 출신이건 경기도 출신이건 얼마든지 대권을 쟁취할 수 있단 얘기야.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이변이 일어나거나,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뜻밖의 난기류를 만나거나, 안철수 자신에게 결정적인 변수가 생긴다면 어떻게 되겠나?”

“갓 쓴 여인 안철수 업기! 재미있는 파자(破字)와 비유네요. 예언자를 자처하신 어르신 말씀대로 안철수는 양중음이라니까 그럴듯해요. 하지만 그 여인은 아주 값비쌉니다. 여야 모든 후보가 안철수를 등에 업고 달리려 하지만 도리어 업히게 되지 않을까요? 저는 몽상가가 아니라 냉정한 현실주의잡니다. 따라서 안철수 야권 최종 단일후보론에 한 표!”

강 교수가 단언했다.

“예언자라고? 난 예언자가 못 되네. 하여간 자넨 언제나 결단이 빠르고 명쾌하구먼. 중도는 못 잡더라도 광견은 되겠어.”

“광견이라고요!”

강 교수는 백두옹이 좀 전까지도 강아지를 안고 있던 광경이 생각나서 내심 언짢았다.

“그 광견(狂犬)이 아니라 공자가 이르신 광견(狂狷)을 말하네. 광자(狂者)는 진취적이고, 견자(狷者)는 차마 하지 않는 바가 있거든. 진보적이지만 막말 같은 건 절대 안하지.”

듣고 보니 칭찬이어서 머쓱해졌다. 강 교수는 백두옹의 붓펜 글씨들을 보면서 주역은너무 어려우니 그만두고라도 논어(論語)는 시간 내서 정독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논어를 봐야 주역도 읽을 수 있다던가.

‘안철수 현상’ 타산지석 때 정치 발전

“부끄럽습니다, 어르신.”

“안 원장만 대인은 아닐세. 안 원장 입장에서는 다른 후보들이 대인이 되거든. 안 원장이 출마 선언을 하기 전에 용단을 내려 그 대인을 선택할 수도 있어.”

“성격상 어려울 겁니다.”

강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역사에 대한 소명의식이 분명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네. 나는 안 원장의 등장이 한국 정치사에서 아주 값진 일대 사건이라고 보네. 그를 흠집 낼 생각만 할 게 아니라 여야 모든 정치인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해. 그러면 한국 정치가 한 단계 발전하는 거니까.”

“놀랍습니다. 저는 어르신께서 안 원장을 탐탁잖게 여기시는 줄 알았습니다. 나이 어린 학생들을 몰고 다니면서 파랑새 타령이나 한다고요.”

강 교수는 책상 위에 쌓여있는 책들 가운데서 안철수 원장 관련 책들이 몇 권이나 되는 걸 눈여겨보았다.

“날 수구꼴통 취급하지 말게나. 니체는 졸가리 없이 타인들과 똑같은 걸 추구하며 사는 인간을 ‘말종 인간’이라고 했어. 그와 반대로 자기만의 가치기준을 정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이를 ‘초인’이라고 했지. 난 초인도, 예언자도, 자네처럼 학자도 못 되지만 부화뇌동하는 인간은 아닐세.”

백두옹은 음유시인처럼 이육사의 시(詩)를 낭송하는 것이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설마 안 원장이 그 초인이라는 건 아니시죠?”

“…….”

강 교수가 놀라서 묻자, 백두옹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아직 여야가 경선을 치르고 있네. 새누리당 최종 후보는 박근혜가 되겠지만 민주통합
당은 아직 누가 될지 몰라. 그리고 안 원장에게는 척목(尺木)이 없다네.”

“척목이라뇨?”

“척목은 용머리에 달린 돌기로, 하늘을 날때 날개로 쓰이는 신물이네. 어느 날 ‘대중이 주는 선물인 우리 시대의 리더십’을 엉겁결에 부여받은 그에게는 아직 그 척목이 없어. 이대론 절대 하늘을 날 수 없지.”

백두옹 특유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다른 후보들은 다 있는데 유독 안철수에게만 없는 것, 그 척목이 뭘까? 강 교수의 두뇌 회전이 빨라졌다.

진짜 대인은 아래를 끌어올려 융평 도모해야

일러스트 박용석
“안철수에게 필요한 척목이라면 역시 의회민주주의의 기본인 정당이겠군요. 문제는 급조하듯 창당해 될 일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강권 교수가 핵심을 정확히 짚었다. 아무리 시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해도 조직 없이는 치를 수 없는 게 선거다. 조직 없이 용케 당선됐다고 하더라도 의회의 도움 없이는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⑥

“그렇다고 민주당에 입당하는 건 대다수 지지자에 대한 배반이란 말이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까 그러고 있을 수밖에.”

백두옹이 안철수의 딜레마를 지적한다.

“그래서 안 원장은 민주통합당의 최종 후보가 가려질 때까지는 잠행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면서 시간을 벌어야 하니까 여간 고역이 아닐 겁니다. 지지율이 떨어지면 대선 출마를 접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고요. 본인의 권력의지보다 대중이 선물로 준 리더십의 한계지요. 범야권 최악의 시나리오입니다.”

“안 원장이 중도 하차하면 야권의 타격이 너무 커. 박근혜 후보가 무난하게 낙승하겠지. 그런 낙승은 결과적으로 박 후보를 독선과 오만에 빠지게 만들어 정도령(정도 걷는 대통령) 출현을 어둡게 한다고 봐. 승패를 떠나 안 원장이 완주해야 한국 정치가 거듭나게 돼 있어. 사실 우려는 또 있다네. 안 원장이 잘 버텨 내더라도 민주통합당 후보가 안 원장에게 양보하려 할까?”

“안 원장의 지지율이 떨어지거나 한창 진행 중인 오픈 프라이머리가 흥행하면 양보할 이유가 없겠죠. 민주통합당은 안 원장의 지지를 받아 내려고 할 겁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경우처럼요.”

“만지면 자꾸 더 커진다는 안철수 현상은 반새누리당뿐만 아니라 반민주당 정서에서도 기인한 거네. 기성 정치인들로는 안 되겠다는 시민들의 분노가 만들어 낸 대안이란 말이지. 안 원장이 아니면 막강한 박근혜 후보를 상대하지 못할 것이네.”

“그건 저도 동감입니다. 민주통합당 후보가 개인적인 욕심을 부리거나 캠프 안팎 측근들의 부추김에 넘어가 시민들의 열망에 거스른다면 독박을 쓰게 될 겁니다. 부담이 너무 크죠. 1987년 대선 때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분열보다 더 가혹한 책임론이 따를 겁니다.”
냉정한 현실주의자 강 교수의 경고였다. 어쨌든 백두옹이나 강 교수도 모두 박근혜와 안철수의 대결구도를 점치고 있었다.

후보들의 경제민주화 합창 실현될까
“강 교수!”

백두옹이 짐짓 엄숙하게 강 교수를 불렀다. 강 교수는 대답 대신 백두옹의 눈을 똑바로 주시했다.
“강 교수는 여야 후보들이 입을 맞춰 경제민주화를 하겠다고 나선 걸 어떻게 보셔?”

“후훗! 사회 분위기에 편승한 정치적 레토릭이죠, 뭐.”

강 교수는 코웃음을 날렸다.
“선거용 낱말 장사라는 말이지?”

“물론입니다.”

“시대적 요청이잖은가?”

“개념부터가 제대로 안 잡힌 용어입니다. 도나캐나 민주화만 갖다 붙이면 다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아마 실현 불가능할 겁니다.”

강 교수는 부정적이었다.
“헌법 조항에도 있는걸? 제119조 2항에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말일세. 민주통합당 정세균 후보는 경제민주화 개념을 헌법에 도입하자고 개헌 제안도 했고.”

백두옹은 책상에 놓여 있던, 해당 헌법 조항이 복사된 종이를 들이밀었다.
“‘경제의 민주화’는 87년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돌연 헌법을 고치면서 엉겁결에 들어가 사문화되다시피 한 용어입니다. 이후로 자그마치 25년 동안 경제민주화 하겠다고 나선 정부는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심지어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조차요. 그때도 국회에는 억울한 중소기업가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지만 집권당인 민주당은 외면했어요. 대기업들의 로비에 놀아난 거죠. 경제민주화 할 생각이 있었다면 그때 했어야지 왜 이제야 하겠다는 거지요? 그때 했더라면 정권을 빼앗기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물며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경제민주화를 하겠다니요? 김종인 선대위원장과 이한구 원내대표의 의견 차부터 좁힐 일입니다. 쉽지 않을걸요.”

강 교수의 예단이었다.
“강 교수도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꽤 깊군 그래. 이거 드시게.”

백두옹은 은강이가 소반에 담아 막 들여온 수박을 강 교수에게 내민다.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라기보다 국민이 기본에 충실하지 못한 것 같아 그럽니다. 한국전쟁으로 100만 명 이상이 희생됐지만 그래도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정립된 건 큰 자산입니다. 그런데 법이 있어도 잘 안 지켜지고 강자는 편법, 약자는 떼법을 쓰다 보니 빈부 격차가 심화되고 혼란스러운 세상이 된 거죠. 저는 그게 유감입니다.”

이로움은 대중이 다 같이 원하는 것
강 교수의 소론에 백두옹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 교수가 수박을 집어 든 사이, 백두옹은 반닫이에서 흑단나무로 깎은 6효 막대를 꺼냈다. 강 교수가 바투 다가와 각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백두옹은 6효 막대를 책상에 올려놓고 손(損:)의 괘상을 만들어 보였다. 레고놀이와 흡사했다.
“위는 산(山:), 아래는 못(澤:)! 아래에서 덜어 위에 보태니 손해라는 뜻을 지닌 괘라네. 기본이 되는 민중의 것을 박탈해 특권층을 살찌게 하면 결과적으로 사회적 손실이라는 얘기야. 손 괘상을 180도 돌리면 반대의 경우가 되겠지.”
이번에는 익(益:)의 괘상이 됐다.
“위는 바람(風:), 아래는 우레(震:)!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태니 이익이라는 뜻을 지닌 괘가 돼. 많이 가진 쪽에서 덜어 적게 가진 쪽에 보태니 백성의 기쁨이 한이 없는걸세. 대중의 경제적 공익성과 사회적 평등을 나타내는 괘상이야.”
“이거 사회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손익계산서네요!”

강 교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면서도 '주역' 41번째의 손괘, 42번째의 익괘를 붙여 손익계산서를 이끌어 내는 순발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주자학은 양반이라는 특권층의 지배체제를 옹호하는 논리라고 믿어 왔던 그였다. 근대화 시기 유교 망국론이 나왔던 것도 바로 그래서가 아니던가.“부당함을 바람처럼, 혹은 번개처럼 빨리 바로잡으면 천하를 유익하게 하는 도가 되지만 박탈이 심해지면 민란이 일어나는 것이네. 주역 철학은 그걸 엄중히 경고하고 있어. 사자성어 개과천선(改過遷善)의 출전이 이 대목이야.”

백두옹은 무섭다는 표정을 지으며 돋보기를 썼다. 그러더니 곧 한적(漢籍)으로 된 경전을 펼쳐 보였다. 그는 강 교수에게 익괘 효사와 주석을 꼼꼼히 해석해 줬다. 봉건시대 대표적인 보수파 정자와 주자의 견해는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이로움은 대중이 다 같이 원하는 바이니 특권층이 사사로운 이익에 눈멀어 대중에게 손해를 끼치면 공격할 거라는 주장이었다.
“주역이 이렇게 무서운 철학이로군요. 뉴욕 월가의 점령시위가 떠올라요.”

강 교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벌써 그렇게 놀라서 어떡하누? 주역은 언제나 특권층이 아니라 소수자·약자 중심이야.”

서민의 눈물과 땀 닦아주는 이가 대인
안경 너머로 강 교수의 낯빛을 살핀 백두옹은 서가에서 다른 책을 찾아왔다. 율곡 이이의 만언봉사(萬言封事)였다. 봉사란 상소문을 가리켰다. 백두옹은 1574년 율곡이 선조에게 올린 1만2000여 자의 상소문 한 부분을 읽고 해석했다.기묘사화보다 참혹한 을사의 화가 계속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사림(士林)은 숨을 죽이고 눈치나 보면서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어 감히 국사를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권세 높은 간신의 무리가 마음 놓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구법(舊法)이라 하여 준수하고 자기에게 해로운 것은 신법(新法)이라 하여 혁파하였으니, 그 결과는 백성을 수탈하여 자기를 살찌게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나라의 형세가 날로 기울고 나라의 근본이 날로 손상되어 가는 일에 대해서 그 누가 털끝만큼이라도 생각했겠습니까.

백두옹은 붓펜으로, 백성을 수탈하여 자기를 살찌운다는 뜻의 ‘박민자비(剝民自肥)’를 썼다. 율곡은 주역 손괘의 상황을 바탕으로 깔고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는 이런 부당함을 바로잡아 안정되고 평화로운 대동(大同)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되면 민중의 불만은 적어지겠지만 하향 평준화가 되는 거잖습니까? 재벌들이 망하면 좋아할 사람들 많을 겁니다. 나라도 같이 어려워지는 건 생각지도 않고요.”
강 교수가 군중심리의 본질을 지적했다.

“그걸 누가 못해? 위를 끌어내릴 게 아니라 아래를 끌어올려 높은 단계의 평준화, 곧 융평(隆平)을 도모하는 게 어렵지. 그래서 북악 산신이 나한테 단단히 이른 거네. 다음 대통령은 함량 미달인 자, 개인적인 탐욕을 가진 자가 되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 그렇고 그런 소인배가 아니라 대인이 뽑혀야 정도령이 되지.”
백두옹은 얼마 전, 인왕산 산책로에서 겪었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어르신께서는 속된 정치인들을 대인으로 보세요?”
강 교수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물론 세종대왕쯤은 돼야 대인이지. 박근혜·안철수·문재인·손학규·김두관·정세균 후보 모두 품성은 두루 좋은 사람들 같아. 적어도 꼼수 쓰는 소인배는 아니란 말일세.”
“저는 고달픈 세상살이에서 서민들이 흘린 눈물과 땀을 닦아 주는 이가 대인이라고 봐요. 가령 남수단의 이태석 신부나 전주 노송동의 얼굴 없는 기부천사, 두 평짜리 쪽방 셋집에 살면서 5년간 40t의 쌀을 이웃에게 기부한 경기도 양주의 50대 아저씨 같은 분들이 진정한 대인이 아닐까요?”
정치는 성자가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도 강 교수는 딴죽을 걸었다. 백두옹은 경전을 다시 펼쳤다. 혁명(革命)을 뜻하는 괘가 나왔다.

국민은 산성·중성·알칼리성 가려내는 리트머스 시험지

일러스트 박용석
혁(革:). 위는 못(澤:) 아래는 불(火:)로 가죽을 벗겨내듯 구태를 벗는 변혁의 시대를 뜻한다. 우물의 도인 정(井:) 괘 다음에 온다.
“제아무리 청량한 우물물도 세월이 지나면 때가 끼기 마련이지. 바닥에 진흙이 쌓이고 불순물이 섞이면 마실 수가 없는 것! 그대로 두면 썩어버리므로 깨끗이 쳐내야 해. 정치권에 경제민주화 열풍이 분 지금이야말로 변혁의 시대가 아니겠는가. 정말 변혁해야 할 곳은 정치권인데 정치인들은 말로만 변하지 자신들은 변할 줄 모르는 것 같네. 어떤가?”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⑦
백두옹이 흑단나무 6효 막대를 짚으며 강권 교수에게 묻는다.
“문재인 후보도 ‘국민이 혁명적 변화를 바라고 있다’고 했지요.”
강권 교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무음 모드로 해놓았던 휴대전화를 꺼냈다.
“아이쿠! 이건 큰일 났네요.”

“왜 그러는가?”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났나요? 신문사에 보낼 칼럼!”
강 교수는 용수철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그때 외손자 며느리가 저녁상 차려놨다고 알려왔다.
“아무리 급해도 어디서든 밥은 먹어야 할 것 아닌가. 한술 뜨고 가게.”
백두옹이 강 교수를 붙들었다.
“아닙니다. 원고 쓸 때는 공복 상태가 좋습니다. 곧 다시 찾아뵙죠.”
강 교수는 눈썹이 타 들어가는 사람 행색으로 모습을 감췄다.
대한민국은 지금은 革 괘 상태
두 차례의 태풍이 잇따라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갔다. 큰 바람의 위력은 가공할 만한 것이어서 인간의 오만을 조롱하듯 천지를 할퀴었다. 정치판에도 큰 바람이 불고 있었다.
큰 바람 일어나니 구름이 높이 날리고 위엄을 온 세상에 떨치고는 고향으로 돌아온다.어디서 용맹한 장수를 얻어서 천하태평을 도모할 수 있으리오.한 고조 유방(劉邦)이 반란을 평정하고 고향 패현을 지나다 연회를 베풀며 읊은 대풍가(大風歌)다. 지금 어느 대권 후보가 대풍가를 부르고 있는가. 새누리당에서는 박근혜 최종 후보가 거칠 것 없는 광폭 행보를 하고 있다. 지위로 보면 건(乾:) 괘의 4효쯤 오른 상태다. 막 하늘을 날기 직전, 연못에서 뛰어오르는 광경이다. 연못 위로 구름이 지나간다. 그 구름을 타고 오르면 그야말로 비룡재천이다. 박근혜 후보는 애초 바람과 거리가 멀다. 처음부터 용의 자식으로 자란 그는 구름을 몰고 다녔다.

선거판에서 바람은 역시 야권의 몫이다. 일찌감치 불어온 돌풍을 탄 안철수. 그리고 오픈프라이머리의 최후 승자가 그 주인공이다. 문재인 캠프에서는 사실상 승리를 예상해 안철수와의 단일화 방식을 두고 전략 논의에 들어갔다지만 아직 바람몰이의 진원지, 호남이 남아 있다. 정세균의 홈 그라운드인 데다 손학규도 반전을 꾀하고 있어 속단할 수 없다. 어쨌든 먼저 4효의 지위인 연못에 안착해 때를 점치고 있는 안철수와 민주통합당 최종 후보의 만남이 기다려진다. 국민의 주목을 받는 ‘역사적 만남’이니까. 쌍방이 이견대인이다. 두 사람이 뜻을 잘 합치면 천하를 도모할 가능성이 있다. 아니, 그 길만이 막강한 박근혜와 어떻게 겨뤄볼 깜냥이 된다.

자연인 문재인은 평판이 좋다. 경선 과정에서도 고운 심성이 잘 드러난다. 하지만 정치인 문재인을 보는 관점은 인격 문제가 아니다. 일찍이 정치로부터 도덕성을 분리해낸 마키아벨리식으로 말하자면 문재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계승한 포르투나(Fortuna:운명이자 행운)를 지녔다. 하지만 시민들의 높은 요구를 정치적으로 풀어낼 비르투(Virtu:탁월한 능력)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문재인, 안철수 넘고 박근혜 이길 수 있을까
백두옹은 한밤중에 외손자 부부를 불렀다. 평택에 공장을 둔 중소기업가 외손자는 정치에 별 관심이 없었다.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박근혜 후보를 사정없이 몰아붙이던 때만 해도 속 시원해하며 관심을 좀 보이더니 박 후보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버리자 손을 털어버렸다.
“문재인 후보가 뽑히면 안철수를 넘고 박근혜를 이길 수 있을까?”
백두옹은 세련된 외손자 며느리에게 물었다. 슈트가 잘 어울리는 남자라고 치켜세웠던 말이 떠올랐다.
“할아버님, 그는 아주 맑은 영혼의 소유자예요. 사람들이 자꾸 정치적인 능력을 주문하는데 안철수는 뭐 정치력이 있나요? 오히려 더러운 기존 정치 때가 안 묻었으니까 추대한 거라고요. 탐욕스러운 권력의지가 없는 문재인이 안철수와 서로 멋진 양보의 미덕을 발휘할 거라고 봐요.”
외손자 며느리는 낙관적이다.
“자기 돈 써가면서 고생 고생한 캠프 사람들은? 죽 쒀서 × 주겠냐고? 다 한자리 해보겠다고 모여든 사람들인데.”
외손자가 냉소적으로 뇌까렸다.
“엊그제 강 교수님 칼럼 안 읽었어요? 안철수가 제 3지대 정당을 창당하고 합당 수순을 밟을 수도 있다지 않아요. 제가 정치는 잘 모르지만 적당한 지분을 준다면 양보 못할 이유가 없죠. 문재인의 부족한 점은 안철수가 채워주고 안철수의 부족한 점은 문재인이 채워주면 박근혜 충분히 상대한다고 봐요, 전. 당신도 중소기업 하니까 경제민주화 제대로 할 가능성이 높은 후보를 지지해줘요.”
외손자 며느리는 샐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난 손학규 후보가 맘에 들어. 내 표는 내 의지에 따라 소중히 행사할 거니까 한 침대에서 잔다고 같이 찍자 강요 마!”
“강요가 아니라 제안이에요.”
“알았다. 이러다 싸우겠구나. 그만들 자자꾸나.”

백두옹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방으로 돌아왔다. 종교와 정치문제는 깊이 대화할 거리가 못 된다. 편이 갈리고 곧잘 논쟁이 벌어지니까.
침상에 누운 백두옹은 좀처럼 눈을 붙일 수 없었다. 대선이 100여 일밖에 안 남았는데 모두 무엇을 하겠노라고만 외쳐대지, 그 어려운 일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였다. 서로 외치는 구호가 유사할 때는 ‘무엇’보다 ‘어떻게’가 중요하다. 그것이 없으면 검증 포인트는 후보가 살아온 역정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함께하는 국회의원들이나 캠프 사람들의 면면도 검증 포인트다. 산성인지 중성인지 알칼리성인지를 가려내는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은 국민이 한다. 리트머스는 이끼다. 이끼는 미미한 존재지만 우습게 봤다가는 여지없이 큰코다친다.

한동안 세상은 태평했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처럼 고요하기조차 하다. 대선 후보들 검증할 시간이 없어 걱정이라며 언론만 요란 떨었지 사람들은 무덤덤하다. 이 싱겁고 차분한 나날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결전의 날은 12월 19일로 이미 정해져 있고 하루하루 임박해 왔다.
일마다 기미(幾微)가 있다. 낌새라는 거다. 지혜로운 자는 작은 기미를 알아채고 거기서 천하가 돌아갈 방향을 읽어낸다. 역(易)을 공부하는 자는 이 고요가 태풍의 눈임을 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편히 잠자기 틀렸나 보다. 백두옹은 침상에서 일어나 불을 켜고 책상에 앉았다. 강일(剛日:뒤숭숭한 날)에는 독경(讀經)하고 유일(柔日:편안한 날)에는 독사(讀史)하라고 했던가. 이런 밤은 경전보다 역사가 맞춤하다. 백두옹은 서가에서 홍재전서(弘齋全書)를 꺼냈다. 조선후기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던 개혁군주 정조의 문집이었다. 홍재는 조선왕조 제 22대 임금 정조의 호다.
훌륭하도다. 주역 혁 괘의 상육(上六:여섯째 효)이여. 정자가 이르기를 “소인(小人)은 비록 마음속으로 감화되지는 못하나 또한 그 낯빛만은 바꾸어 윗사람의 명령에 따른다”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지극히 어리석은 자는 비록 성인(聖人)이라 할지라도 변화시킬 수 없는 법이니, 요(堯)와 순(舜) 같은 임금에게 묘(苗)와 상(象)이 있었던 것은 대체로 외면만을 바꾸어서이다” 하였도다.

정조는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조선의 대표적인 정치가였다. 소론과 노론의 권력싸움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왕위에 오른 영조의 손자다. 영조는 노론이 집권하게 하면서도 소론 또한 등용했으니 그 유명한 탕평책이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금난전권(상권 독점)을 폐지하는 경제 개혁, 화성 천도를 통한 정치 개혁, 노예제 혁파 등 전반적인 개혁 정치를 펼쳤다. 하지만 노론의 저항에 부닥쳤고 의문의 죽음(1800년)을 맞는다. 만일 그의 개혁 정치가 성공했다면 훗날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불행한 역사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정조 이후 조선의 역사는 개기일식과도 같은 나날이었다.

귀하들은 털갈이 제대로 하셨소이까?
모름지기 지금 대한민국도 혁 괘 상태다. 대저 한 나라의 최고통수권자 된 이라면 누구라도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멋지게 개혁하고, 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한다. 개혁하고 싶어도 세상 사람들이 따라주지 않으면 끝내 실패하고야 만다. 혁 괘에서 득중한 5효는 ‘대인은 호변(虎變)한다’고 말한다. 호랑이는 용과 더불어 대인을 상징한다. 호랑이의 털갈이는 백수의 왕답게 말끔하여 문채가 난다. 하지만 참모나 고관들은 그처럼 문채 나지 못한다. 표범의 털갈이 정도이고 소인배는 기껏 얼굴빛 정도만 바꾸려 든다. 그랬다가 아니다 싶으면 불평을 쏟아내고 곧바로 돌아서버린다. 그게 민심의 본색이다. 하여, 개혁정치가 성공하기란 정말 어렵다.

혁 괘 3·4·5효는 한결같이 믿음을 쌓으라(有孚)고 말한다. 무엇보다 개혁 주체가 진실해야 한다. 호랑이 털갈이처럼 자신부터 전혀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 호응을 얻어 성공한다. 엉겁결에 호랑이 등에 타고 달리게 된 안철수·문재인 후보, 실현 불가능한 ‘100% 대한민국 ’을 선언하고 종횡무진하는 박근혜 후보에게 백두옹은 묻는다. 귀하들은 털갈이 제대로 하셨소이까? 혹시, 그들 자신이 개혁 대상인 얼치기, 아첨꾼들에게 둘러싸여 감히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말로만 외치는 건 아니오?

남북통일 물꼬 트는 자에게 ‘금척’을 주리니

지난번 백두옹의 직언은 신랄했다. 대선 후보들이 개혁 정치를 말하기 전, 그들 자신부터 호랑이처럼 말끔히 털갈이하라고 호령했었다. 백두옹인지 한라봉인지 참 대차다고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그전에 백두옹은 강권 교수와 함께 경주 이견대를 찾아가 문무대왕의 수중릉을 참배한 적이 있다. 신문왕은 100년간 이어진 통일신라 전성기의 토대를 닦았는데 여기에 대학자 설총(薛聰)의 간언이 주효했다. 삼국사기에는 설총이 꽃을 의인화하여 신문왕을 경계한 설화 ‘화왕계(花王戒)’가 전한다.
꽃의 왕, 모란이 피어나자, 그 화왕을 뵈려고 갖가지 꽃들이 멀고 가까운 데서 다투어 왔다. 문득 붉은 얼굴에 옥같이 흰 치아를 지닌 한 가인이 곱게 단장하고 와서 읊조렸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⑧
“첩은 눈처럼 흰 모래를 밟고 거울처럼 맑은 바다를 대하면서 봄비에 목욕하고 맑은 바람을 쏘이는 장미입니다. 왕의 아름다운 덕을 듣고 향기로운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실까 하오니 왕께서는 저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그때 베옷 입은 늙은 장부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며 와 아뢴다.
“저는 성 밖 큰길가에 사는 백두옹(白頭翁:할미꽃)이라 하옵니다. 비록 풍족하여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하고, 옷장에 옷을 가득 채우고 있더라도 반드시 좋은 약으로 기운을 북돋우고, 아픈 침으로 독을 없애야 합니다. 왕께서도 그럴 뜻이 있으신지요?”
곁에 있던 어떤 이가 나섰다.

“두 사람이 왔는데 왕께서는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버리겠습니까?”
“장부의 말에도 합당한 것이 있으나 가인은 얻기 어려운 것이니 이를 어찌해야 할꼬?”
화왕은 장미와 백두옹을 두고서 고민에 빠졌다.
“저는 왕께서 총명하셔서 이치와 옳은 것을 알 것으로 여겨 왔건만 이제 보니 그게 아닙니다. 무릇 임금은 사특하고 아첨하는 자를 친근히 하고 정직한 이를 멀리하기 마련입니다. 예로부터 이러하니 저인들 어찌하리오.”
백두옹이 탄식했다. 이에 화왕이 크게 깨우쳤다.“내가 잘못하였구나! 내가 잘못하였구나!”

한반도가 세상의 중심 되는 그 날은...
‘화왕계’에 등장하는 바로 그 백두옹이라면 매섭게 호통 쳐도 뭐랄 사람 없다. 그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한강 둔치공원을 산책한다. 얼굴을 스쳐가는 바람결에 서늘한 가을이 묻어난다. 그 기세등등하던 폭염의 여름날도 바야흐로 꼬리를 드러냈다. 천기는 이렇게 삽시에 뒤바뀌는 법이다.흐르는 강물을 보며 역사를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이 땅의 역사는 시대에 따라 혹은 지도자에 따라 꼭 그만큼의 성취를 하며 달려왔다. 따라서 섣불리 너무 큰 기대도 실망도 할 필요가 없다. 어젯밤 늦게 강권 교수가 전화로 물어왔다.
“문명의 서진(西進) 현상에 따라 동아시아로 세력 전이가 일어나고 있고 한반도가 세상의 중심이 되는 날이 온다면서요. 그날이 가까워 옴을 아는 걸까요? 국민은 혁명적 변
화를 바라고 있는데 왜 백두옹께서는 개혁만을 말씀하시는 거죠?”


-지금 대한민국이 혁 괘 상태라 해도 개혁의 시대인지, 혁명의 시대인지 구분할 필요가 있다네. 나라의 지도자와 국민의 면면을 보면 그 속에 답이 있지. 시대적 요청은 혁명이지만 그 적임자가 없으면 개혁으로 만족해야 한다네. 개혁만 잘해도 훌륭한 지도자야. 아직 해방(解放)도 안 했으니 혁명은 멀어.
“해방된 지가 언젠데요?”

-1945년 8·15 해방을 말하는가? 아쉽게도 그건 미완의 해방일세. 남북이 통일되고 중국·일본·미국과 대등한 나라가 될 때 비로소 완전한 해방이야. 다음 대통령은 마땅히 통일을 염두에 두고 모든 정책을 펼쳐야만 한다네. 제 6공화국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씨를 뿌린 공산권과의 북방 외교는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의 북한 끌어안기로 이어졌지. 그러다 MB 정부에 와서 남북관계가 경색되었어. 그 5년 동안 남북은 서로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걸 깨달았지. 남북통일 없이 우리 한반도가 인류의 물질문명과 정신문화를 선도할 수 없다네. 일찍이 초인은 노래했던가.

밤이구나. 샘솟는 샘물은 소리가 더욱 커지네. 내 영혼도 샘솟는 샘물 같아서. 밤이구나. 사랑하는 연인들 노래 소리만 깨어 있네. 내 영혼도 사랑하는 연인의 노래. 가시지 않은 목마름 같은, 가실 수 없는 목마름 같은 것이 내 속에 있어 말하고 싶어 하지. 사랑에 대한 갈구가 내 속에 있어 사랑의 언어로 이야기하지.
“백두옹이시여, 그 사랑의 언어로 이야기해주세요.”

-사랑? 진영 논리에 갇힌 너희가 진정 사랑의 의미를 아느뇨? 집권하면 끼리끼리만 해먹을 속셈뿐인 너희가 아낌없이 줘야 비로소 다시 채워지는 사랑의 본질을 아느뇨? 혹시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면서 가슴으로는 증오의 부름켜를 치떨고 있지 않더냐? 이웃을 원수로 여기고 분노의 화살을 당기고 있지는 않더냐? 들을지어다. 이 백두옹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로다. 이 나라 근·현대사의 아이콘이니 부디 나를 역사의 소리로 여기라. 누가 시대적 사명인 남북통일의 물꼬를 트겠는가. 그에게 황금의 자, 금척(金尺)을 주리니. 용의 척목보다 더 보배로운 그 금척으로 남북을 재고 온 세상을 재고 마름질하여 새 시대를 열어라. 그것이 이른바 팍스 코리아나, 얼마나 가슴 떨리는 세상인가.

공자는 진리, 예수는 사랑의 화살 쏘다
그쯤에서 강권 교수는 만나기를 청했다. 백두옹은 사직공원 옆 활터 황학정에서 보자고 했다. 지금은 그만두었지만 백두옹이 오랫동안 활시위를 당겨온 곳이었다. 한강변 산책에서 돌아온 백두옹은 아침을 먹고 늘 해오던 것처럼 독서하고 명상했다.
약속한 시간에 활터에 다다르자 활터를 관리하는 사두(射頭)가 깜짝 반가워하며 백두옹을 맞았다.
“어르신, 어인 걸음이십니까? 깜박 잊고 있었는데 여전히 정정하십니다.”
백두옹은 막 도착한 강 교수를 사두에게 소개했다.
“자네 활 좀 잠깐 빌리세.”
“활을 쏘기에는 힘이 부치실 텐데요.”
사두가 늙어 꼬부라진 백두옹을 생각해서 주저했다.
“걱정 말고 갖다 주게.”
사두가 내어주는 활을 들고 백두옹과 강 교수는 정자 앞에 섰다. 뒤따라온 사두는 백두옹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멀리 세 개의 과녁이 보였다. 백두옹은 깍지도 끼지 않고서 활시위에 활을 먹였다. 그리고 공중을 향해 겨눴다.
“정말 쏘시려고요?”

“그 사람 참! 천하의 백두옹이 불과 이백 보 앞에 놓인 저 과녁을 맞히고자 여기 온 줄 아는가? 주역에 날개를 달았던 공자는 그 혼란스럽던 춘추시대에 세상을 향해 진리의 활을 쏘았네. 그때는 모두가 비웃었지만 성인이 쏜 화살은 그 후로 자그마치 2500년을 날아서 지금도 우리 가슴에 꽂히고 있지. 중국은 공자 다시 보기를 하고 있고 세계의 지성들이 '논어' 읽기에 빠졌네. 예수는 로마의 식민지 치하에서 사랑의 화살을 쏘았고 그 화살 또한 2000년을 날아오고 있질 않은가. 강 교수! 모름지기 대통령이라면 100년 앞은 내다보며 정책을 써야지 않겠나? 고작 임기 5년의 성과에 안달해서야 어찌 나라 꼴이 제대로 돌아가겠어? 겨우 밥숟갈 뜨게 됐다지만 지금 이 나라를 어디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는가! 공동의 가치도 지향점도 없이 제각각 흩어져서 돈벌이에만 눈먼 형국 아닌가! 그 사이 사람의 도리가 땅에 떨어져버리고 있다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것도 문제네. 창피하지도 않은가!”
백두옹이 핏대를 세웠다. 강 교수는 다가가 그만 활을 내려놓게끔 했다. 강 교수는 보았다. 주름 깊은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백두옹의 눈물을.

통일 한국이 열강과 대등해져야 참 해방
“어르신, 몸 상하시겠어요.”
“젊은 날,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우리 궁사들은 활터의 과녁을 일장기로 바꿨다네. 저기 한 가지 동(同) 자 과녁 안의 홍심(紅心)이 그거라네. 저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그려 넣었지. 본래는 맹수의 머리 그림이었거든. 오늘날 이 나라의 분단은 일본에 나라 빼앗긴 데서 연유하네. 어젯밤 전화로 말했지만 진짜 해방은 남북통일 후 열강과 대등해질 때일세. 애오라지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건만 앞날이 캄캄하기만 하니 내 어찌 눈물을 아끼겠는가.”
“맞습니다. 사명감이 너무들 없어요.”
강 교수는 백두옹을 부축하며 마루에 앉혔다. 언론매체에는 폭로 기사가 넘쳐났다. 박근혜 캠프의 공보위원이 뇌물과 여자 문제를 들어 안철수의 대선 불출마를 종용했다는 것이다.
“자넨 대통령 후보들 믿을 만한가?”

“5년마다 반복되는 ‘열광과 환멸의 사이클’입니다. 솔직히 전 누구도 못 믿겠습니다. 국민들의 집단지성도 회의적이고요.”
“큰일 났군. 믿음을 주지 못하면 개혁 정치가 불가능해. 나는 그래도 박근혜, 안철수, 문재인 같은 후보들의 심성을 믿으려네. 그간 정치인들이 곧잘 마음을 비웠다고들 했지만 알고 보면 재물과 권력욕으로 꽉 채워져 있었지.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달라. 어느 때보다 심성이 바른 후보들 아닌가. 믿음을 뜻하는 중부(中孚:
) 괘는 중심이 비어 있는 배의 형상이야. 배는 속이 비어야 물에 잘 뜨고 사람 마음은 속이 비어야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법이지. 믿을 부(孚) 자는 손톱 조(爪)와 아들 자(子)의 합자야. 새는 온 정성을 다해 발로 알을 굴려서 새끼를 까거든. 그래서 어미와 새끼 사이에 돈독한 믿음이 생기는 거야. 신급돈어(信及豚魚)라고 했어. 미련한 돼지나 하잘것없는 물고기에까지도 그 믿음이 미쳐야 큰일이 이뤄지는 거야. 후보들 그런 자세로 국민과 소통해야 해.”
“그런데 통일의 물꼬를 트는 대통령에게 주시겠다는 황금의 자가 뭐죠?”
강 교수가 물었다.

한민족은 바람의 겨레, 大勢가 大過 될 수도 있거늘

“황금의 자? 그것은 주역의 비밀코드일세.”
백두옹은 활터에서 내려와 천천히 거닐었다. 초가을 오후의 햇살에 치렁치렁한 백발이 물살 가르는 은어처럼 빛났다. 흰 두루마기 차림의 노익장은 학 같은 자태로 하늘을 우러렀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⑨

“그 비밀코드가 뭐냐고요?”
강 교수는 더 궁금해졌다.

“허허허, 그걸 함부로 일러줄 수가 있겠나! 강 교수가 유력한 대권 후보도 아니고 말일세. 한국 역학

 

정역(正易)의 문법으로 말해볼까? 이 천지가 해와 달이 아니면 빈 껍질이요, 해와 달도 지인(至人:참사람)이 아니면 헛된 그림자라. 때가 되면 그 후보에게 밀지(密旨)를 보낼 것이네. 그게 어찌 내가 일러주는 것이겠는가. 전에도 말했듯 시명(時命)이니 천공(天工:하늘의 조화)이 마땅한 사람을 기다려 대업을 이룰 줄 그 누가 알리요.”
사회과학자인 강 교수로서는 도무지 모호한 말들이었다. 하지만 백두옹에게는 돌에 새긴 글자처럼 뚜렷한 말씀이었다.
둘은 큰길가로 나왔다. 백두옹이 택시를 잡으려 하자, 강 교수가 팔을 잡아 이끌었다.

“저 아래 통인시장에서 전어구이 한 접시 하시고 가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가을 전어에 막걸리 한 잔? 그거 좋지.”
어두웠던 백두옹의 얼굴이 이내 밝아졌다.

아버지의 잘못까지 계승하면 불효
대선이 100일도 남지 않았다. 민주통합당은 문재인 후보가 경선에서 연승 행진을 달리고 있었고 안철수 원장은 출마 선언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박근혜 후보의 인혁당 발언으로 민심이 요동쳤다. 박 후보의 역사 인식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번에는 심각했다. 견고하던 지지율이 소폭 하락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자 대결이나 양자 대결에선 여전히 선두였다.
“할아버님, 전 정말 이해할 수가 없네요.”
외손자 며느리가 햇사과를 깎아 내오며 특유의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또?”

백두옹은 스마트폰으로 EBS 제작 e채널 동영상을 보다가 묻는다. 인혁당 사건 재심 판결을 다룬 300초짜리 영상물이었다. 백두옹에게 강남스타일의 전형 같은 며느리의 언행은 세상의 어떤 동영상보다 유쾌하다. 뒷방 노인네 취급하지 않고 시시콜콜한 것까지 죄다 이르고 백두옹의 의견을 물었다. 그렇게 늘 친구처럼 대하는 게 고마웠다. 그래서 백두옹도 스스럼없이 대하려고 애쓴다. 효자는 부모가 만든다고 아랫사람보다 윗사람 하기 나름이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자기는 자기지, 왜 박통이 명백하게 잘못한 일까지 미화하려고 들어서 비난을 자초할까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견고한 지지세력은 변함이 없어요. 100% 국민 통합을 내걸고 광폭 행보하면 뭐해요. 새로 생겨난 지지층이 진정성을 의심하고 되돌아서는 걸요.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마음 못 정하던 제 친구들도 솔깃했다가 아무래도 박근혜는 안 되겠다고 하네요.”

“너라면 어떡하겠니?”
“인혁당 사건은 유신정권의 사법 살인이었다는 게 일반 국민의 역사 인식이에요. 그걸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고요? 미래는 내버려두고 왜 과거 얘기만 하느냐고요? 정치 지도자의 역사관은 미래를 여는 키예요. 그래서 중요한 거고 그래서 자꾸 되묻는 거라고요. ‘딸로서 참 어려운 입장이지만 잘못되었다. 유신의 그늘이다. 내가 그 그늘에 묻힌 아픔을 품어주고 달래드리겠다. 우리 대승적으로 손잡고 미래로 가자!’ 이렇게 말하면 국민들이 박수 치고 대세를 몰아줄 건데 참 미련해요.”

솔직한 성격의 외손자 며느리는 거침이 없다.
“영특한 우리 며늘아기, 네가 핵심 측근에게 일러주렴.”
“왜 안 했겠어요?”
“뭐라던?”

“어쨌거나 당선은 무난하다며 귀 기울여 듣지를 않네요.”
“한비자의 개로구나.”
“네?”
“주막에 술이 잘 익었으면 뭐하랴. 사나운 개가 막고 서있어서 손님이 들어갈 수가 없는 걸. 혼자서 다 결정하는 박 후보 스타일도 문제지만 불통의 칸막이를 치는 친박 핵심도 문제다.”
백두옹은 서가에서 소(小) 주역이라고도 불리는 중용을 꺼내 펼쳤다.
“여기 18장에 계지술사(繼志述事)라는 말이 나온단다.”
“계지술사요?”

“그래. 선왕의 뜻을 계승하여 정사를 편다는 뜻이지. 단, 아버지의 옳았던 걸 계승해야지 그른 걸 계승하면 효도가 아니라 불효란다. 군자의 도에 맞는 걸 계승해야 진정한 효도야. 무엇이 군자의 도인가? 하늘에 떳떳하고 세상 사람들한테도 의심받지 않는 도리지. 박 후보가 유신시대를 감싸는 인상을 주면 국민은 자꾸 그 시절의 공포정치를 떠올리게 돼. 박정희 대통령은 산업화에 큰 공적이 있는 대신 민주화에 허물이 있어. 박 후보가 말로 두둔할 게 아니라 올바른 정사를 펼치면 그 허물이 승화되는 거야.”

“나라에 큰 스승이 없는데 우리 할아버님이 스승 노릇 하시네요.”
외손자 며느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찬사를 보낸다.
“늙어 꼬부라진 잔소리꾼이지 스승은 무슨.”

혼자 남은 백두옹은 틀니를 끼우고 사과를 맛보았다. 그 모진 태풍을 견디고 익은 과육은 달콤했다. 단것만 찾아 다니는 정치인들도 그들 자신이 꼭 이 사과만 같았으면 좋겠다.

강대국 쇠망 원인은 교만과 안이
백두옹은 가끔씩 하던 대로 의자에 앉아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주역 <계사전(繫辭傳)>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신세대들에게는 생소한 고저와 청탁에 맞춰서 경전을 읽는 음영법(吟詠法)이었다. 그 소리가 깊고 그윽하다. 깊고 그윽한 소리는 구강과 비강을 울리고 뇌세포를 자극한다. 이른바 소리 선(禪)의 기능을 하게 되고 신묘한 경지에 다다르기도 한다. 머릿속에 괘상이 떠오르고 영상들이 파노라마처럼 돌아간다.

명학재음(鳴鶴在陰)이어늘 기자화지(其子和之)로다. 아유호작(我有好爵)하니 오여이미지(吾與爾靡之)라 하여늘 자왈(子曰), 군자거기실(君子居其室)하여 출기언선(出其言善)이면 즉천리지외응지(則千里之外應之)리니 황기이자호(況其邇者乎)아.

우는 학이 그늘에 있으니 그 새끼가 화답하도다. 내 좋은 벼슬을 가지고 있으니 그대와 함께하리라(중부괘) 했으니 공자가 말씀하셨다. 군자가 집에서 말해도 옳으면 천리 밖에서도 응하니 하물며 가까운 자에 있어서야.

언출기신(言出乎身)하여 가호민(加乎民)하고, 행발호이(行發乎邇)하여 견호원(見乎遠)하나니, 언행(言行)은 군자지추기(君子之樞機)요, 추기지발(樞機之發)은 영욕지주야(榮辱之主也)니라. 언행(言行)은 군자지소이동천지야(君子之所以動天地也)니 가불신호(可不愼乎)아?
말은 몸에서 나와 국민에게 가해지며, 행실은 가까운 곳에서 비롯되어 먼 곳에 나타나니, 언행은 군자의 중추가 되는 기물이라 그 기물의 표출로 영욕이 갈린다. 언행은 군자가 민심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동물은 감각으로 행동을 유발하지만 인간은 언어로 행동을 유발한다. 인간은 언어라는 ‘의미의 장’에 갇힌 존재이기 때문이다. 말은 그래서 중요하다. 말 한마디로 국민을 고무시키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하는 대통령 후보 된 자라면 더 그렇다. 노무현 대통령은 뜻이 좋았지만 막말 때문에 대사를 그르쳤다.

말은 그 사람의 생각을 담고 있다. 말은 신념으로 형성된 기억의 표출이기도 하다. 신념은 흔들림 없는 견해나 사상이다. 사회성을 지닐 때는 힘을 얻지만 주관적이거나 파당적일 때는 독단이 되고 만다.

박근혜·안철수·문재인 후보는 모두 말을 신중하게 하는 편이다. 말수가 적고 말투가 짧다. 그래서 실수가 적은 편이다. 문제는 내용이다. 내용에 결정적인 흠이 있으면 적은 말수와 짧은 말투가 도리어 더 큰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불씨가 되고 증폭된다.

지금 박근혜 후보가 위기다. 그 사달은 어이없게도 말 한마디였다. 말 한마디로 다 쥐었던 천하를 놓치게 생겼다. 한민족은 바람의 겨레다. 11월 말이나 12월 초께, 대선 막판에 야권의 드라마 같은 단일화로 광풍이 불면 대세는 대과(大過)가 될 수 있다. 한 번의 말실수에는 국민이 좀 의아해할 뿐이었지만 두 번째는 지금처럼 민감해지고 이후로는 돌이킬 수 없는 파장을 낳는다. 언어가 갖는 분위기적 속성 때문에 그렇다. 개혁정치 하기 전에 당사자부터 말끔히 털갈이하라고 했다. 지금이야말로 박근혜 후보가 말조심 단계에서 나아가 과감히 털갈이해야 할 때다. 더 고집 피우면 당락을 좌우할 중도층이 야권으로 떠나가 버린다.
비(否:

) 괘 다섯째 효에 기망기망(其亡其亡) 계우포상(繫于苞桑)이라 했다. 망할까, 망할까 우려하여 뽕나무에라도 매달린다는 비유다. 그러면 안 망하고 도리어 흥한다. 아널드 토인비도 같은 말을 했다. 역사적인 성공의 절반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고 로마 제국 같은 강대국들이 망한 원인은 천재지변이나 외부 침략이 아닌 교만과 안이 때문이었다고.

궁(窮)하면 변(變)하게 마련이다. 변하면 통(通)하고 통하면 오래(久)간다. 이것이 주역의 중심을 꿰뚫고 있는 궁변통구의 이치다. 큰일을 도모할 대인이라면 무엇이 됐건 변화를 주저할 필요가 없다. 20년 전, 삼성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 자식 빼놓고 다 바꿔라!’고 했다. 오늘날 삼성이 세계 일류가 된 저력이 그런 경영 혁신에 있다. 누가 뭐래도 지금 대한민국의 무게중심은 경제계의 이건희 회장, 정치계의 박근혜 후보다. 그 둘이 변하면 대한민국이 변한다.

세 나그네 가면 한 사람 잃고, 홀로 가면 벗을 얻느니

일러스트 박용석

안철수 원장이 드디어 공식 출마선언을 했다. 전혀 정치할 것 같지 않은 그가 국민적 열망에 힘입어 대권에 뜻을 둔 지 어언 일 년 만이다. 그에게 기대를 거는 국민이나 그 자신에게나 참으로 오랜 기다림의 세월이었다. 이 초고속 IT 시대에 성질 급한 사람들은 도무지 못할 짓이었다. 장고(長考)의 시간들을 치밀하게 계산하며 달려온 그인들 어찌 편했을꼬? 보통 사람 같으면 피가 말라 진작 때려치웠을 게다. 문제는 아직도 더 기다려야 할 날들이 남았다는 것이다. 대선까지 석 달도 안 남았는데 이제부터는 단일화 시점과 방법을 기다려야 할 판이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⑩

“어차피 야권 후보 단일화는 바람을 몰고 오는 거니까 늦으면 늦을수록 파괴력이 크겠죠. 문재인·안철수 후보는 11월 25일, 후보등록일 직전에 극적으로 단일화할 겁니다. 야권의 입장에서는 누구로 단일화가 되느냐에 따라 어렵게 이기느냐, 아쉽게 질 거냐가 결정될 것 같습니다. 지금 여당의 박근혜 후보가 역사관 때문에 주춤하지만 그 내공과 지지층이 막강합니다. 야권으로서는 어느 때보다 이기기 어려운 판세입니다.”

TV 시사토론 프로에 나간 강권 교수가 그렇게 말했다. 다른 토론자들도 대체로 동의했다. 어차피 여야 간에, 혹은 세 후보 간에 정책 차이도 별반 다른 게 없었다. 진정성과 능력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누가 더 진정성이 있고 실현할 능력이 있는가는 좀처럼 검증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경제민주화나 전면적 복지, 무상교육이 골자인 정책들은 하나같이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경제민주화 같은 건 선심성 공약이라는 비판이 지배적이었다. 대선 후에 그 정신이라도 남는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민주당이 쉽사리 혁신할 수 있겠소?

낯익은 야당 국회의원 둘이서 소문을 듣고 백두옹을 찾아왔다.
“백두옹 어르신, 또 한 번 정권교체의 기회가 온 것 같습니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중심 단일화 묘책이 있을까요? 심오한 주역 경전으로 속 시원히 풀어주시죠.”
백두옹은 두 의원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마치 그들의 영혼이 얼마나 깊은지 알아보기 위해 추(錐)를 내리는 것 같은 눈길이었다.
“어르신, 섬뜩합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기세 찬 두 의원이 쩔쩔맸다. 그만큼 백두옹의 눈빛은 강렬했다.
“안철수 쪽에서도 와서 똑같이 물을 걸세. 안 후보 중심의 단일화 묘책이 없느냐고? 그럼 내가 뭐라고 해야겠소?”
백두옹이 반문했다.
“우리 쪽엔 우리에게 맞는 답이, 그쪽엔 그쪽에 맞는 답이 있겠지요.”
“허허허, 그런가?”

백두옹은 책상 서랍에서 두 개의 봉투를 꺼냈다. 그중 하나를 건넸다. 전에 경제민주화 얘기하면서 뽑았던 적이 있는 손(損:)의 괘상 그림이 나왔다. 그 아래로 붓펜 글씨 몇 줄이 적혀 있었다.삼인행즉(三人行則) 손일인(損一人)하고, 일인행즉(一人行則) 득기우(得其友)라. 세 사람의 나그네가 길을 가면 한 사람을 잃고, 한 사람이 길을 가면 벗을 얻는다.
“지금 대선 선거판 이야기네요.”
“그런데 대권으로 가는 나그네 길에서 낙오자가 누굴까요? 안철수입니까, 문재인입니까?”
두 국회의원이 자기들끼리 신기해하면서 풀이하고 물었다.
“눈치 9단이라는 정치인들이 이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먼.”
백두옹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럼 박근혜 후보가 낙오자라는 겁니까?”
그중 하나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백두옹은 눈을 감았다. 노익장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문재인과 안철수, 둘 중 하나가 대통령이 된다는 말씀이로군요!”
두 의원은 잔뜩 고무되어 자기들끼리 손을 맞잡았다. 그러다가,
“그래도 문재인이 되는 방도를 일러주십시오.”

정권교체도 중요하지만 자기 당 사람이 돼야 한다는 뜻이었다. 정치인들로서는 당연한 욕심이었다.
“바로 말하면 낙오가 아니라 당장 짝을 못 짓는 것뿐이오. 뒤 구절을 잘 보시오. 혼자 길을 가다 보면 벗을 얻는다고 했질 않았던가? 홀로 된 나그네, 박근혜 후보가 만나는 벗이 국민이면 어떡할 거요?”
“당장 짝을 못 짓고 외톨이가 돼도 불리할 건 없다는 말씀이로군요.”
그제야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고 이해하는 눈치였다.
“짝을 짓게 되더라도 이른바 궁합이 맞아야지. 주도권을 잡기 위해 티격태격하여 구태의연한 모습을 노출하면 국민은 바로 돌아설 거요. 안철수 후보 측이 후보 단일화 조건으로 정치혁신과 민주당 내 패권주의 청산을 주문한 이유요. 국민은, 문제를 풀어야 할 정치가 자꾸 문제를 만들고 있어서 걱정이지. 새누리당뿐만 아니라 민주당의 행태가 꼴 보기 싫어서 안철수 후보에게 ‘선물로서의 국가 리더십’을 안긴 거란 말이오. 그런데 그대들 민주당이 쉽사리 혁신할 수 있겠소? 국민이 바라는 만큼으로. 난 어렵다고 봅니다.”

백두옹은 부정적이었다.
“문재인 후보 중심으로 확 뜯어고칠 겁니다.”
두 의원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확 뜯어고치시겠다니 듣기 좋구려. 혁신하면 해답이 그 속에 있소.”
백두옹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신통한 점괘를 속 시원히 뽑으려고 왔는데….”
둘은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고 미적거렸다.
“나는 점치는 사람이 아니오. 설사 점을 친다 해도 제 욕심뿐인 그런 마음 가지고 와서는 어림도 없소.”
백두옹은 그렇게 두 의원을 물리쳤다.

때가 사나웠다. 세계적인 경제 불황이 밀어닥치고 있었다. 한·중·일 삼국에서는 영토 분쟁으로 인한 외교 문제가 발발했다. 세계는 지금 때 아닌 민족주의가 부활하고 자국 산업 보호주의가 나타났다. 삼성과 애플 간 특허소송, 코오롱과 듀폰 간 분쟁이 그 예다. 국내적으로도 늘어나는 가계부채와 부동산 문제가 골칫거리였다. 소득의 양극화 현상도 여간해서 풀기 어려운 과제였다. 그런데 기성 정치권을 불신하는 국민들은 이처럼 산적한 경제 문제를 정치인도 경제인도 아닌 제3의 인물을 추대하며 해결해 주기를 원했다. 안철수나 문재인은 그래서 대권 후보가 되었다. 어느 때보다 강력한 정부가 필요한 때에 참으로 짓궂은 노릇이다.

백두옹은 한 술 더 떴다. 다음 번 대통령이 남북통일의 물꼬를 트고 세계를 선도하는 초석을 다져야 한다는 주문까지 보탰다. 너무 거창한 주문이라서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그렇다고 코앞에 닥친 문제 때문에 근시안으로만 살 것인가. 힘겨울 때일수록 가야 할 좌표를 멀리 보고 설정할 필요가 있다.
이런 때일수록 집단지성이 필요하다. 언제까지나 편을 갈라 샅바싸움을 할 것인가. 지금은 상대를 때려눕히고 전리품을 챙기며 좋아할 때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국민소득 2만 달러에서 10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3만 달러 시대로 바삐 가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간 돌보지 못했던 사회적 약자, 성장의 그늘을 챙기면서도 1만 달러 시대로는 퇴보하지 말아야 할 게 아닌가. 그러려면 여야, 진보 보수, 대기업 중소기업을 가리지 않고 지혜를 한데 모아야 한다.

백두옹은 문득 떠오르는 기물이 있어서 외손자며느리를 찾았다. 나머지 봉투 하나는 주머니에 넣은 채로였다.
“우리 바람 좀 쐬러 갔다 오련? 속리산 법주사에.”
“가을 절집 나들이네요. 좋아요. 마침 은강이 아빠도 저녁 약속이 있다고 하니 더덕구이에 도토리묵밥이나 먹고 오죠 뭐.”
세 후보 한데 넣고 크게 삶을 성인은

 


외손자며느리는 흔쾌히 운전대를 잡았다. 가을 속으로 떠난 그들은 신라 고찰 법주사 뒷마당의 커다란 쇠솥 앞에 섰다. 높이 1.2m, 둘레 10.8m나 되는 천 년 묵은 쇠솥이었다.
“얘야, 밥이건 국이건 이 정도는 되는 솥에다 한가득 해서 수천 명을 거둬 먹이고 싶지 않니?”
백두옹이 똑 부러진 외손자며느리에게 눙친다.
“에고, 전 달랑 식구 서넛 밥하는 것도 힘겨운 걸요.”
“이 솥은 너무 작다.”
“이보다 커서 어따 쓰게요?”
“천하를 삶으려면 이 정도 가지고 되겠어? 솥은 세상만물을 변혁하는 기물이란다. 날고기를 익게 하고 단단한 걸 부드럽게 만들지.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솥을 뜻하는 정(鼎:
) 괘가 혁명을 뜻하는 혁(革:
) 괘 다음에 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 혁 괘를 180도 뒤집어놓으면 그 모양이 바로 정 괘란다. 삶으려면 솥에 무엇을 부어야지?”
“당연히 물이지요.”
외손자며느리가 두툼한 솥을 만지며 대답한다.
“그럼 이 밑에는?”
“불을 때야겠죠.”

“물과 불은 상극(相剋)이야. 여야나 보수 진보 이상 가는 정반대적인 성향을 가졌지. 물은 불을 꺼버리고 불은 물을 말려버리거든. 그런데 그 가운데에 솥이라는 매개체가 있으면 만물을 삶아내서 천하 사람들이 먹기 좋게 한단 말이다. 주부나 셰프는 작게 삶아 요리를 하지만 성인(聖人)은 대팽(大烹:크게 삶아)하여 시대를 이끌 대인들을 만들어내지. 지금 이 땅에 어느 성인이 있어서 여야의 세 대권 후보들을 한데 넣고 크게 삶겠느냐.”
“요즘 시대에 성인이 어딨어요? 국민이 삶으면 되는 거죠.”
“어느 국민? 홍군, 황군, 백군으로 갈라진 국민?”
백두옹은 고개를 흔들었다. 시대적 소명이라는 게 있다. 미국의 제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매킨리 대통령이 암살되자 뜻하지 않게 대통령이 된다. 혁신의 시대를 열면서 그는 천명한다.

‘연방정부는 어느 특정 세력의 대변자가 아니다. 바로 공익의 조정자가 되어야만 한다. 또한 대통령은 바로 이런 조정자의 중심인물이 되어야 마땅하다.’
지금 대한민국의 국가 리더십은 ‘공익의 조정’이다. 세 대선 후보가 누구와 짝을 잘 지어야 성공할 수 있을까. 백두옹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봉투를 꺼냈다.

중심이 의심스럽고 지킬 걸 못 지킨다면…

동인(同人:) 괘. 위는 하늘(), 아래는 불()을 뜻하는 괘상이 나왔다.
하늘은 위에 있다. 아래의 불이 타올라서 위 하늘과 함께하고자 한다. 득중, 곧 중심자리를 얻은 두 번째 음효(--)와 다섯 번째 양효(ㅡ)가 주체가 되어 서로 응한다. 그래서 한 뜻을 지닌 동인이 된다. 사상·취미·목적 따위가 같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발행하는 잡지를 동인지(同人誌)라고 하는데 그 이름의 출전이 주역이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⑪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좇고


“얘야, 네 여고 동창생끼리 만든 모임 이름이 뭐라 했지?”
백두옹이 외손자며느리에게 괘상과 풀이가 적힌 종이를 건네며 묻는다.
“금란회(金蘭會)요.”

 

외손자며느리가 글귀를 살피며 대답했다.

“그랬지. 어렵지 않은 한자이니 읽어보렴.”
“이인동심(二人同心)이면 기리단금(其利斷金)이며 동심지언(同心之言)은 기취여란(其臭如蘭)이라. 두 사람이 한 마음이면 단단한 쇠도 자를 수 있고, 뜻을 같이하는 말은 난초의 향기와도 같다. 참 좋은 글귀네요.”
외손자며느리는 난초의 꽃향기를 피워내듯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다.

“단금의 ‘금’자, 여란의 ‘란’자를 따서 금란회라고 지었겠지? 쇠처럼 단단하고 난초처럼 향기로운 사귐, 금란지교(金蘭之交)의 뜻으로 말이야.”
“금란지교는 알았지만 주역에 근거한 건 전혀 몰랐네요. 주역의 명구가 우리 생활 속에 의외로 깊게 뿌리내렸네요.”
“태극과 건·곤·감·리 네 괘로 된 태극기를 표상으로 하는 대한민국이 아니더냐. 한국인들의 집단 무의식 속에 주역 철학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지.”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외손자며느리는

 

주역 <계사전>의 그 구절을 소리 내 읊조렸다. 의미를 새기면서 읊으니 시를 낭송하는 느낌이었다.
“안철수·문재인 후보의 단일화를 말씀하시려고 동인 괘를 뽑으셨군요.”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무소속 안철수 후보와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의 단일화는 분명 대선 판도를 결정짓는 일이겠지.”
“안철수면 낙승, 문재인이면 석패요?”

외손자며느리가 특유의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심성이 바르고 슈트가 잘 어울리는 남자’라며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정치는 복잡한 함수가 아니라 산수
“얘야, 정치는 복잡한 함수가 아니라 단순한 산수란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하나도 없어. 문 후보는 처음부터 태생적 한계를 안고서 여기까지 달려왔단다. 안철수 후보 지지 세력 가운데 상당수가 민주통합당과 ‘친노’에 비호감이라는 거 알잖아. 상대적으로, 문 후보 지지 세력은 안 후보를 지지하는 데 별 주저함이 없지.”
“할아버님, 그렇다고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로 당당히 선출된 문재인 후보가 무소속 안철수 후보에게 양보할 수 있나요?”
“그들로서는 어떡해서든 정권교체만하면 되는 거 아닌감? 문제는 국민 다수도 그렇겠냐는 거다. 정치 혁신을 바라는 국민은 정권교체에 별 매력을 못 느끼는 듯해. 새누리당이나 민주통합당이나 거기서 거기라는 걸 너무 잘 알아버린 거지. 그래서 안철수 바람이 부는 거고.”
“안철수 후보도 정권교체 주장하잖아요.”
“출마 선언문과 기자회견 내용을 잘 봐라. 단일화의 조건이 정치혁신과 국민의 동의야. 정권교체라고 안 했단 말이다. 안철수 후보가 민주통합당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아.”

백두옹은 법주사 초대형 쇠솥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주역에서 말하는 솥에는 다리가 셋이다. 그중 하나라도 부러지면 솥이 기울어져 귀한 음식을 쏟아버린다. 백두옹은 모처럼 진정성이 있는 박근혜·문재인·안철수 세 후보가 귀한 솥의 세 다리 같게만 여겨졌다. 장점이 많은 세 후보를 모두 쓸 방도를 생각한다면 몽상일까?

“설마 안철수가 새누리당과의 연대를 생각하겠어요?”
뒤따라 돌던 외손자며느리가 놀라며 묻는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대선까지는 아직 세 달 가까이 남았단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니?”
사람들은 자꾸 정치개혁을 말한다. 세상이 다 변했는데 정치인들만 구태의연하다고 침을 튀긴다. 하지만 잘 따져보자. 정치인들만큼 수시로 검증 받고 투표로 심판 받아온 부류가 이 나라 어느 분야에 또 있는가. 정치인이 털갈이할 때 낯빛만 바꾸는 게 대중이다. 대중 가운데 나라 걱정하고 이웃 걱정하고 세계 시민정신에 부합하는 당당한 이가 얼마나 될까.

백두옹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시절운(時節運)이라는 걸 떠올렸다. 개인이나 국가에도 운이 있지만 시절에도 운이 있다. 한 시대의 운명은 그 시대 지성의 총화요, 그 결과다. 제각기 흩어져 그야말로 콩가루 형국이 되느냐, 단단히 뭉쳐 보루가 되느냐는 역시 시절운이 따라야 한다.

세계적 불황기다. 한반도 주변 정세도 험하다. 고난의 연대를 겪으며 누적돼온 뒤틀린 욕망이 사회 구석구석에 만연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 있다. 지금 이 나라에 서광이 뻗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산하에 불멸의 혼들이 잠 깨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각지도 않았던 기적 같은 일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게 된다. 그것이 오래전, 한국 역학의 약속이다. 바라옵건대 프레임에 갇히지 않은 큰 정치인들이 툭 나서서 큰일을 벌여주기 바란다. 요란하게 우짖는 대중의 소리에 너무 안달하지 말고 대인다운 소걸음을 걸어주기 바란다.

백두옹은 여러 날 두문불출했다. 박근혜 후보에게 쓴소리를 하고 법주사 다녀온 뒤로 줄곧 그랬다. 박 후보는 웃음을 잃지 않고 여느 때와 다름없는 행보를 했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 무거웠을 거였다. 그 침잠은 매우 값진 것이다. 시대적 소명 앞에서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냉정하고 깊이 있게 대화하는 시간이라서 그렇다. 아버지는 어쩌면 꿈길로 찾아와 딸에게 일러주고 갔는지도 모른다. ‘딸아, 그 가혹한 세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내 딸아! 나를 밟고 이 힘겨운 고팽이를 넘어가라. 누구든 자식 된 자, 그 아버지를 극복하고 자신의 시대를 여는 것! 그것이 묵은 것을 밑거름으로 그 위에다 새싹을 틔우는 이 대지의 연대기란다. 부디 작은 나를 버리고 큰 나를 찾아다오. 그리하여 네 앞에 놓인 새로운 길을 헤쳐가라. 딸아, 눈물겨운 내 딸아, 결단의 순간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쓰지 마라. 늦으면 늦을수록 수습하기가 그만큼 더 어려워진단다. 지하에서 이 아비가 도우마. 네 어미와 함께 널 도우마’.

광장에서 동인 결성하면 형통하리니
백두옹의 예상대로 박근혜 후보가 사과했다. ‘5·16, 유신, 민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말에 책임을 져온 그로서는 역사관을 돌연히 바꾸는 강도 높은 수위였다. 그를 지지하던 보수층에서 반발할 정도였다. 산토끼 잡으려다 집토끼 놓친다는 말이 나왔다. 3김 가운데 하나인 JP가 보고 화낼 만했다. 하지만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 모두 환영했다.

추석 전후 지지율이 초관심사다. 백두옹은 동인 괘의 핵심을 정리했다. 키워드는 ‘동인우야(同人于野)면 형(亨)하다’였다. 밀실에서 사사로이 연대하지 않고 광장에서 천하의 떳떳한 도리로 동인을 결성하면 형통하다. 그것이 소인배가 아닌 군자나 대인의 도리다. 아래 세 효(
)의 중심인 음효(--)에서는 ‘동인우종(同人于宗)이니 인(吝)하다’고 했다. 같은 종씨나 당파에서 동인을 지으니 부끄럽다는 뜻이다. 실리만 챙기려다 명분을 잃으면 야합이 된다. 대인이 취할 바가 아니다. 물론 국민이 동의해 주지도 않는다.

세 나그네가 한 길을 가는 지금, 안철수·문재인 후보가 짝을 짓고 행복한 길동무가 될 수 있을까? 홀로 가게 될 박근혜 후보는 국민을 길동무로 삼을 수 있을까?
사람들은 야권 후보 단일화를 낙관한다. 양측이 따로따로 세를 확장하다가 대선을 코앞에 두고 극적으로 단일화할 거라고 본다. 단일화하지 못하면 이마에 주홍글자라도 새길 기세다. 그런데 현실은 당위보다 늘 우선한다. 단일화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는 얘기다. 정당정치 체제에서 무소속 안철수 후보는 정당이라는 척목이 없다. 전에도 말했듯 용은 척목이 없으면 하늘을 날 수 없다. 척목을 가지고 있는 민주통합당이 문재인 같이 올곧은 후보를 총리로 주저앉히고, 국가리더십이 검증되지도 않은 안철수 후보에게 대통령 자리를 양보하는 건 정도(正道)가 아닐 뿐더러 치욕이다. 반대로 안철수 후보가 지난 번 서울시장 선거 때처럼 스스럼없이 양보할 가능성도 희박하다. 욕심 없는 안 후보가 뒤늦게 대통령이 욕심나서가 아니다. 그 양보가 ‘문재인 대통령’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까지 삼파전으로 갈 가능성도 크다.

정치판은 변화무쌍하다. 남은 80여 일! 후보들이 정책을 다듬고 국가리더십을 검증 받는 시간으로는 짧지만 판세가 뒤집힐 여지는 얼마든지 많은 시간이다. 동인 괘 다섯 번째 효사에 ‘선호도이 후소(先號<54B7>而後笑)’라는 매우 짓궂은 장면이 연출된다. 먼저 울부짖다가 나중에 웃는다는 뜻이다. 먼저 웃고 나중에 통곡하는 선소 후호도(先笑後號<54B7>)도 있다. 떠돌이 신세를 뜻하는 여(旅:
) 괘에 나온다. 먼저 웃다 나중에 통곡하는 것보다는 먼저 울다 나중에 웃는 편이 낫다.

박근혜 후보의 미덕은 무게중심이다. 그 무게중심이 흔들린다. 말을 신중히 하고 행동도 무거운 안철수 후보를 쳐다보는 보수층이 늘었다.
정치인은 말로 세상을 움직인다. 세계적인 명연설의 대부분은 걸출한 정치인들이 절박한 정국을 돌파하고자 국민에게 호소한 내용들이다. 그러므로 뛰어난 정객은 모국어의 연금술사요, 음유시인이기도 한 것이다.

어두운 밤의 등불 같은 고전, 주역은 말한다. 장차 배신할 사람은 그 말이 부끄럽고, 중심이 의심스러운 사람은 그 말이 산만하며 지켜야 할 것을 잃은 사람은 그 말이 굽힌다고. 중심이 의심스럽고 지켜야 할 것을 못 지키는 지도자를 국민이 어떻게 믿겠는가.

사람 모여들어 한탄하고 호가호위하고… 의연함이 미덕

추석 이후 민심의 추이에 정치권은 민감하다. 대선 캠프는 지지율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후보들은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선거 전략을 수정한다. 때로는 소신도 바꾼다. 후보들의 정책이나 자질을 제대로 검증하기도 전에 여론조사부터 하는 선거풍속도. 연예인 인기투표와 뭐가 다른가.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⑫

물론 천기(天氣)와 지기(地氣) 못지않게 인기(人氣)는 중요하다. 천지인(天地人) 삼합(三合)의 기운이 따라야 가능하다는 게 대권이니까. 천기는 때요, 지기는 하다못해 논두렁 정기라도 받고 태어나야 한다는 명당 발복이며, 인기는 사람을 얻는 일이다. 그중 가장 얻기 어려운 게 인기다. 그렇지만 한 나라를 이끌어갈 국가리더십을 인기로 결정하는 건 정말 위험하다.

여론은 전문적일 수 없다. 군중심리가 작동하고 다분히 경향적이기 때문이다. 국가 리더십은 마땅히 시대정신을 끌어안아야 하는 것이지만 소신보다 여론의 눈치만 보면 정의는 지지율 밑에 깔린다. 그리고 그 결과는 5년 뒤 환멸로 되돌아온다.

세종대왕이 못다 편 꿈 누가 마저 끝낼까
백세를 훌쩍 넘긴 백두옹은 그야말로 산 조상이다. 자손들이 그를 찾아보는 게 성묘나 다름없다. 추석 때 백두옹은 여주 영릉에 성묘했다.
영릉은 세종대왕이 잠들어 계신 곳이다. 세종대왕이 곧 조선이다. 대왕이 없으면 조선도 없다 할 만큼 걸출한 위인이다. 세종의 리더십은 한마디로 지적 리더십이요, 창조적 리더십이다. 그 자신이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중세 동아시아의 글로벌 스탠더드였던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입수한 대왕은 세계 정신을 학습한다. 싱크탱크인 집현전을 통해 통합적 지식을 축적한다. 그를 바탕으로 과학문명을 꽃피운다. 천문관측기구들과 자동 물시계 자격루 발명, 한글 창제, 왕성한 출판문화로 중국 천하에서 조선 천하, 조선의 하늘을 열고자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때는 늘 사나웠다. 대왕이 못다 편 꿈은 600년 묵은 숙제가 되어 오늘 우리 앞에 놓였다. 누가 그 묵은 숙제를 이어서 마저 끝내겠는가. 적어도 대선 후보라면 그 정도의 포부가 있어야 한다.

대왕이시여! 영오(穎悟)하신 당신의 지혜를 후손들이 이어받게 하소서. 역에 이르되, ‘신이명지(神而明之)는 존호기인(存乎其人)이라’ 했습니다. 신묘하게 하여 밝히는 건 그 사람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대왕께옵서는 잘 아실 것이옵니다. 소 주역 중용에도 ‘기인존즉(其人存則) 기정거(其政擧)하고 기인망즉(其人亡則) 기정식(其政息)한다’ 했습니다. ‘그 사람’이 있으면 그 정치가 행해지고 ‘그 사람’이 없으면 그 정치가 종식된다는 것이지요. 박근혜·문재인·안철수, 이렇게 셋으로 압축된 후보 가운데 ‘그 사람’이 있기를 저는 바랍니다. 하지만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게 두렵습니다. 대왕께옵서는 굽어 살피소서.

영릉에서 돌아온 백두옹은 돋보기를 붙들고 책을 읽었다. 칼 폴라니, 햄릿을 읽다(당대). 여야 후보 모두 경제민주화를 슬로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에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의 고민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는 인간, 삶의 터전을 이루는 토지,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움직이는 화폐는 결코 상품화돼서는 안 된다고 봤다. 그것들이 시장 메커니즘에 편입될 때 세상을 파멸로 이끄는 ‘악마의 맷돌’이 돌아간다. 월가에서 비롯된 금융위기는 ‘악마의 맷돌’이 작동해서다. 폴라니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을 지니고 다니며 애독했다고 한다. 백두옹이 주역을 손에서 놓지 않고 지니고 다니는 것과 같았다.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햄릿형 사유가 나은 역작이다.

시장경제 앞에서 불안한 존재, 햄릿의 망설임은 오늘날 인류의 문제다. 돈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끼면서도 결코 놓쳐서는 안 될 본질적인 가치들을 좀처럼 추구하지 못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혹시 찾아올지도 모를 대박을 꿈꾸며. 그렇게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다.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쏟아져 나오는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존재한다. 인생은 인간들이 그렇게 놓치고 있는 기회다.

출판을 체계적으로 지원할 후보는 없나
“할아버님, 올해는 정부가 정한 독서의 해라네요. 이 가을 하루 한 시간만이라도 책을 붙들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요.”
외손자며느리가 여름옷들을 옷장에 갈무리해 넣으며 말한다.
“핑계란다. 나처럼 핸드폰 꺼놓고 책 펴들면 그만이야.”
“습관이 된 할아버님과 제가 같아요?”
그러면서도 객쩍은 표정이다.

“이 늙은이 세 끼 꼬박꼬박 챙겨주느라 짬이 안 나 그렇지 뭐.”
백두옹은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힘 부친데 부러 나가서 밥을 사 먹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어요, 할아버님! 연휴 때 파주에서 출판사 하는 동창을 만났거든요. 올해 들어서 부쩍 책이 안 팔린대요. 정든 직원들을 내보내야 할 판이래요. 속상해하는데 도움이 못돼 미안했어요. 대선 후보 가운데 출판을 국가의 문화 인프라로 정하고 체계적으로 지원할 사람 없을까요? 4대 강 사업 같은 토목공사 비용의 1할만 들여도 넘칠 텐데요.”
“그건 별로 표가 안 되잖니.”
백두옹은 아이처럼 웃었다.

“안철수 후보라면 파주 출판도시에서 북 콘서트를 열 만한데요. 전문가들과 출판문화 육성책을 깊이 있게 토론한다면 교양 있는 중산층과 지식층을 사로잡을 거예요.”
“왜, 네가 좋아하는 문재인 후보를 놔두고?”
“그 일은 안 후보가 적격일 거 같아서요. 출판동네 혜택도 셋 중 제일 많이 봤고요.”
“누구든 그런 후보가 있다면 내가 업어서 데려가고 싶구나. 올해 한류의 경제효과가 무려 12조원이라잖니. 세계를 뒤흔든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더 웃돌 거라고도 하고. 이제부터는 고급 문화를 팔아야 하는데 그 기반이 곧 출판이야. 그런데 당장 표심 잡기에 바쁜 후보들은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구나. 네 말대로 독서의 해, 이 가을에 파주 출판도시를 안 찾아가면 언제 찾아가. 우리 사회에 권리와 책무를 다하는 교양 있는 중산층이 얼마나 되는지 의심스럽긴 하다만. 어쨌든 우리라도 가볼 거나?”

백두옹은 통일전망대도 들러볼 겸 북(Book)소리 축제 현장을 찾고 싶었다.
“일요일에 가볼까요? ‘한글 나들이 569’ 행사가 있답니다.”
“정말 그래 줄 수 있겠니?”
때마침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 행사가 있다니 더 반가웠다.

민심 하나로 모을 ‘지도리’가 있어야
사람들이 모이는 정치의 계절이다. 선거철에 이합집산은 매우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같은 소리가 호응하고 같은 기운이 서로 구하는 건 자연의 이치다. 정치는 조금 다르다. 소리와 기운이 서로 달라도 함께 모여서 의견을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르니까 연정(聯政)도 하는 것이다. 연정하자면 법을 손질해야 하고 상대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안 그러면 야합이 되고 오래 갈 수 없다.
백두옹은 췌(萃:
) 괘를 뽑았다. 위는 못(
), 아래는 땅(
)이다. 땅 위에 있는 못으로 물이 모이는 형상이다. 대선 후보 셋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기쁘게 모인다. 저마다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사람이 모이면 혼란스럽고 크고 작은 이익다툼이 생기게 마련이다. 반드시 정신적 지주가 있어야 오합지졸이 되지 않는다. 민심을 하나로 모으는 지도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왕조시대에는 종묘(宗廟)에 제사하는 걸로 지도리를 삼았다. 지금은 대한민국의 국시(國是)가 그 역할을 한다. 국시는 국가 정책의 기본 방침이다. 한때 반공(反共)이 국시인 시절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그럼 세계 10대 교역국 대한민국의 국시가 무엇인가? 통일인가? 홍익인간인가? 헷갈린다. 아니, 분명치가 않아서 답답하다. 지향점도 없이 무턱대고 발전하고 통합하잔다. 대통령 선거를 치르기 전에 국시부터 정할 일이다.

췌괘 세 번째 효사에 ‘췌여차여(萃如嗟如)’ 하는 꼴이 벌어진다. 사람들이 모여들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자 한탄하는 모양새다. 여섯 번째 효사는 더 가관이다. ‘재자체이(齎咨涕<6D1F>)’, 곧 탄식하고 눈물·콧물을 흘린다. 소인배(--)가 높은 지위를 탐내어 맨 위에서 떡하니 버티고 앉았으니 천하의 웃음거리다. 그야말로 호가호위하는 형국이다.

새누리당에서 박근혜 후보 빼고 다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중심 개념까지 의심받아 가며 역사관을 뒤바꾼 박근혜 후보의 남은 과제는 ‘친박’이다. 여전히 구태를 벗지 못하는 ‘친박’만 교체되면 문젯거리가 깔끔히 사라지는 셈이다. 그야말로 호랑이와 표범이 털갈이하듯 제대로 혁신하는 것.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이런 상황을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강한 어조로 그걸 주문한 백두옹 자신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친박’ 인사들이 모두 나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박 후보만큼 혁신하면 된다.

민주당은 어떨까? ‘친노’의 퇴진과 혁신이 문제다. 이른바 ‘신진 사대부들’이 모인다는 무소속 안철수 후보 진영은 기성 정치권과의 차별화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게 가능하면 정치권은 분명 국민의 요구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바람직한 일이다.

이번 대선은 정책이 모두 비슷하다. 그래서 야권 단일화 이벤트 빼곤 따분하리만큼 밋밋하다. 이럴 때는 역시 시행할 사람들이 누구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 모인 사람들을 잘 어거하고 조정자 역할을 원만히 해낼 수 있는 후보가 대인이다.

췌괘 다섯 번째 효사는 말한다. 모임에 바른 지위를 얻어 허물이 없으나 그래도 믿지 않거든 대의명분을 굳건히 붙들라고. 인기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지도자의 변함없는 준칙, 그것을 확인하면 주저하던 사람들이 마침내 닫고 있던 속마음을 연다. 한없이 경망한 시대에 의연함이야말로 대인의 미덕이다.

성인도 마땅한 지위 없인 그 말이 안 먹히는 법

주역의 비밀 하나를 공개한다. 괘가 그려진 태극기를 표상으로 하는 한국이 왜 역학의 땅인지를 실감하리라. 종교적인 편견은 사양한다. 우주 변화의 원리를 담고 있는 주역 철학은 본래 유교(儒敎)의 산물도, 도교(道敎)의 산물도 아니다. 일찍이 음(--)과 양(-)의 디지털 부호로 만들어진 역학을 훗날에 생겨난 유파에서 가져다 논리체계로 삼았던 것뿐이다. 기독교(基督敎)나 무슬림에서도 얼마든지 주역을 활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물리학자 닐스 보어나 정신분석학자 카를 융의 경우처럼 가져다 잘 쓰면 임자가 된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⑬

주역은 64괘로 돼 있다. 하늘을 뜻하는 건(乾) 괘로 시작해서 64번째인 미제(未濟) 괘로 끝난다. 38번째 괘가 규(睽) 괘다. 불 기운은 위로 올라가버리고 연못 물은 아래로 흘러버린다. 서로 뜻이 어긋나서 째려보는 형국이다. 상대가 혐오스러워 돼지가 진흙을 뒤집어쓰고 있는 꼴로 보이는가 하면, 귀신이 수레 가득 실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활시위를 당겨 쏴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다.

놀랍지 않은가? 38선을 사이에 두고 피 흘리며 싸우다 지금은 휴전선으로 대치하고 있는 남북한 실상 그대로다. 39번째 괘는 건(蹇) 괘다. 아래는 산, 위는 물로서 산 넘자 물을 만난 처지다.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느라 절름발이(蹇)가 된 형국이다. 반백년이 지난 남북 분단의 세월은 절름발이의 파행이나 다름없다. 40번째가 해(解) 괘다. 속박이 풀리는 해방이다. 38선으로 비롯된 민족의 반목은 39의 절름발이 단계를 거쳐 40의 해방을 맞는다.

백두옹이 전에 일렀듯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벗어난 해방은 미완의 해방이다. 남북이 통일되고 중국·일본·미국과 대등한 나라가 될 때 비로소 완전한 해방이다. 바야흐로 한민족의 시대가 온다. 진정한 해방의 날이 밝아오고 있다.

난세 버틸 ‘十勝地’ 한강 이북엔 없어
“어르신, 주역 38번째 괘가 오늘날 한반도의 남북 대치를 뜻하기도 하다는 건 견강부회 같네요. 예정 조화설도 아니고 그 옛날에 중국 대륙에서 성립한 주역 괘의 순서가 어찌 현대 한국사를 예상하고 정해졌겠습니까?”
오랜만에 찾아온 강권 교수가 노골적으로 코웃음을 쳤다.
“허허허, 용역법(用易法)을 모르니 그렇게 말할 수밖에.”
백두옹은 소리 내 웃었다.

“아닌 건 아닌 겁니다.”
강권 교수는 단호했다. 방송이나 신문에서 치밀한 논리로 토론을 이끌어온 그다웠다. 뒤얽힌 실타래를 한 칼로 내리치는 쾌도난마는 강권 교수의 특기였다.
“누가 오늘날 남북 대치 상황을 주역에서 미리 말해두었다고 했나? 개체는 전체를 반복하는 게야. 범주로 본 주역의 괘 순서와 현재 우리 상황이 놀랍게도 일치하는 것뿐이야. 소름이 안 돋는가? 우연이라거나 신비하다고만 하기에는 너무도 일치하니까 말일세.”
백두옹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64괘가 태극처럼 돌아갔다.

“놀랍기는 하네요.”
강권 교수는 마지못해 동조한다.
“자네 조부가 평안도 순천 고을에서 내려왔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일제 때지요.”
“그때 뭘 보고서 정든 고향을 떴겠나?”
“십승지(十勝地) 찾아서 소백산 밑 풍기로 왔답니다.”

“바로 그거라네. 십승지는 난세에 생명 보전하기 좋은 땅일세. 자네 그거 아는가? 십승지는 38선 이남에만 있지 이북에는 없다는 거.”
“네?”
백두옹의 그 말에 강권 교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옛날에는 38선 개념이 없었으므로 한수(漢水:한강)를 기준으로 했지. 일제 때 혹은 한국 전쟁 때 한수 이남으로 내려온 사람들 자손은 자네처럼 남한에서 잘 먹고 잘 살지만 이북에 남은 사람들은 생지옥을 면치 못하고 있네. 십승지네 감결이네 하는 게 모두 주역을 활용하는 용역법의 산물일세.”
“그건 정말 묘한데요!”

강권 교수는 탄복했다.
“그나저나 자넨 왜 그간 그렇게 뜸했는가?”
“실은 후보들 캠프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고민 좀 했답니다.”
그와 친분 있는 교수들 몇몇은 이미 캠프에 들어가 활동하고 있었다.

“고민할 거 뭐 있어. 자네처럼 정치 철학이 분명하다면 뜻 맞는 후보를 도와주게나.”
“전 폴리페서(polifessor)가 아니랍니다.”
“이 사람 참. 자공이 스승 공자에게 물었다네. ‘여기에 아름다운 옥이 있다면 그것을 상자에 넣어 감추어 두시겠습니까, 아니면 좋은 값을 쳐줄 상인을 찾아 파시겠습니까?’ 공자가 대답했지. ‘고지재(沽之哉) 고지재(沽之哉) 아대가자야(我待賈者也)라. 팔고말고. 팔고말고. 나는 좋은 값을 쳐줄 상인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공자가 폴리페서였을까? 지성의 책무를 다한 것뿐일세. 역에 이르되, 성인지 대보왈 위(聖人之大寶曰位)라 했다네. 성인도 마땅한 지위가 없으면 그 말이 세상에 먹혀들지가 않아.”

백두옹은 적극적인 참여를 주문했다. 정치가 변하길 바라면 욕만 할 게 아니라 참여해서 함께 바꾸라는 거였다. 그것이 시민들이 주도하는 바람직한 거버넌스(Governance:공공경영) 체제라며.
“안철수 후보를 돕고 싶습니다. 그는 대권에 뜻이 없었는데 국민들이 부추겨서 무소속 후보가 됐지요. 정당이 없어서 홀대받고 있는데 만일 그가 실패하면 실
망할 국민들이 너무 안타까워요.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정도령이 안 후보 같기만 하답니다.”
“난 그렇게 못 박지는 않았네만 자네 소신껏 판단하소. 우리 며느리는 문재인 후보 열성 팬이라네.”
“제가 안 후보 편에 서도 안 말리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왜 말려? 불확실하지만 한국 정치사에 없었던 전혀 새로운 현상이자 시도네. 안철수 후보는 이미 한국 정치 풍토를 바꿨어. 그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가 이렇게까지 변신하려 들지 않았을 거네. 민주통합당은 별반 혁신하는 기미가 안 보이지만 말일세.”

정치판에선 현장의 땀내 중시해야
백두옹은

 

맹자의 네 가지 정치인 유형을 들었다. 맹자는 역사를 일치일란(一治一亂)으로 봤다. 한때 잘 다스려지고 한때 혼란한 게 인간의 역
사다. 어느 때 벼슬자리에 나아가야 하는가는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르다.

청렴이 미덕인 백이(伯夷)는 은나라 말, 주나라 초기의 정치가로 세상이 다스려지면 나아가 벼슬하고 혼란스러워지면 물러나 은둔했다. 그는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멸하자 동생 숙제(叔齊)와 함께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 굶어 죽었다. 맹자는 그를 청성(淸聖)이라 했다.
책임감이 남달랐던 이윤(伊尹)은 은나라 때 명신이다. 그는 천하가 잘 다스려질 때도 나아가 벼슬했고 어지러워져도 나아가 벼슬했다. 맹자는 그를 임성(任聖)이라 했다.

조화를 중시했던 유하혜(柳下惠)는 춘추시대 노나라의 현자다. 그는 곤궁한 처지에 빠져도 근심하지 않았고, 도와 예를 모르는 시골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지극히 자연스럽고 너그러웠다. 맹자는 그를 화성(和聖)이라 일컬었다.
반면 공자(孔子)는 빨리 떠나야 할 때는 빨리 떠나고 더디 갈 때는 더디 가며, 머물러 있을 만한 때는 머무르고 벼슬할 만하면 벼슬했다. 그래서 맹자는 공자를 시성(時聖)이라 흠숭했다. 주역의 요체 ‘시중(時中)의 도’를 펼친 성인이었다는 것이다.

“청렴, 책임, 조화, 시중 이렇게 네 가지의 미덕 가운데 강 교수는 어느 걸 택하려오?”
백두옹이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시중이 좋겠습니다만 자격미달이지요.”

“강 교수처럼 자신의 한계를 알고서 정치판에 나아간다면 무리수를 안 두겠지. 교수들은 대개 현장을 잘 몰라. 그래서 사실의 언어가 아니라 신념의 언어를 즐긴단 말일세. 현장의 땀내를 중시해야 실패가 없어.”

대권 후보 밑으로 모여든 이들의 사연과 성향이 다채롭다. 정당 소속에서 무소속으로, 야권에서 여권으로, 여권에서 야권으로 헤쳐 모인다. 명분은 뚜렷하다. 정권교체를 위해, 정치혁신을 위해, 국민통합을 위해. 정치판에는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 어제의 적이 오늘은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은 적이 된다.
문재인·안철수 후보의 단일화 감정 싸움이 점입가경이다. 새누리당 이한구 원내대표와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 안대희 정치쇄신특위위원장과 한광옥 국민통합위원회 수석부위원장의 갈등도 만만찮다. 출신 배경과 걸어온 길이 다르니 왜 안 그렇겠는가. 서로 같은 점을 찾고 다른 점을 다듬어 나가자면 마찰음을 피할 수 없다. 대선 과정의 조율은 당선 후 정책 실현에 도움이 된다.

원수도 마음 바꾸면 한 가족 되거늘
조선 선조 때의 경세가 율곡 이이는 시대를 창업(創業)·수성(守成)·경장(更張)으로 나눴다. 그리고 당대를 경장기로 보았다. 그는 조세 제도와 정치, 문교, 국방 개혁을 주장했다. 특히 출신 지역이나 붕당을 가리지 말고 널리 인재를 등용하라 했다. 이른바 입현무방(立賢無方)이다. 역저 성학집요에는 주역 철학에 근거한 여러 개혁안이 담겨 있다.

율곡은 규 괘의 동이이(同而異)를 취한다. 군자는 같으면서도 다르게 한다. 반대로 다르면서도 같게 할 수 있다. 이이동(異而同)이다. 규 괘 초효는 절묘하다. 악인을 만나봐야(見惡人) 허물이 없다고 한다. 화합하자면서 악인이라고 거절한다면 장차 세상의 원망을 산다. 두 번째 효에서는 골목에서 군주를 만나도 허물이 없다고 한다. 군주와 현인이 골목에서 서로 만나는 것은 몸을 낮추는 것이지 결코 도리를 낮추는 게 아니다. 여섯 번째 효는 대반전이다. 돼지가 진흙을 뒤집어쓰고 귀신이 수레 가득 실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활시위를 당겨 쏴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적이 아니라 배필이었다. 하마터면 혼인할 짝을 죽일 뻔한 것이다.

지금 남과 북의 형국이 그렇다. 하물며 같은 나라 안에서 성향이나 소속, 세대가 다르다고 눈을 흘기며 적대시할 이유가 없다. 규(睽) 괘를 180도 뒤집으면 가인(家人) 괘다. 원수도 마음을 바뀌면 한 가족이 되고 가족도 돌아서면 남만도 못할 때가 있다.

구름은 빽빽하거늘 비는 쏟아질 줄 모르고

드높아야 할 하늘에 잔뜩 구름이 끼었다. 이 가을 대선 정국은 그야말로 밀운불우(密雲不雨) 형국이다. 구름은 빽빽한데 비는 쏟아질 줄 모른다. 장쾌하게 쏟아지는 비는 희망이다. 목마른 대지가 머금어야 할 생명의 양식이기도 하고 시대를 이끌어갈 대인이기도 하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⑭

결실의 계절인 이 가을, 풍요를 노래할 수만은 없는 나날이다. 세상 일이 배배 꼬여 있고 답답하다. 가을걷이 하는 들판의 저녁 연기는 달콤했었다. 하지만 그건 단지 전원에서 살았던 기억 속에서만 그랬고 지금 도시의 공기는 우울하다.

인간은 이야기를 먹고 사는 존재다. 이야기는 재미와 감동을 생명으로 한다. 신나는 화젯거리를 만들어야 할 대중 정치인이 잊지 말아야 할 금언이다. 사람들은 무료해서 드라마를 보고 게임하고 트위터한다. 그런데 한낱 트위터로 유명한 대중작가를 앞다퉈 만나다니! 웃지 못할 촌극이다.

새롭지 않은 인물로 새 정치 하겠다니
사민불권(使民不倦).
주역에서 지도자가 지녀야 할 미덕으로 꼽는 말이다. 모름지기 지도자라면 국민으로 하여금 권태롭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런데 박근혜·안철수·문재인 세 후보 진영에 빽빽하게 모인 사람들이 정치판 퇴물들이거나 수작이 빤한 이들이어서 국민이 하품한다. 지겨운 그 인물들이 ‘나라를 위한 결단’이라고 둘러댈 때는 눈꼴시다.
“쳇! 나라는 이제 그만 위하고 봉사활동이라도 제대로 해보라지.”

소주잔을 기울이던 사람들이 코웃음을 친다. 그들은 안다. 퇴물 정치인들은 절대 육체노동 할 족속들이 아니라는 걸.

 

주역은 변화의 철학서다. 변해야 통한다. 변해놓고도 안 통한다면 제대로 변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더 변해야 한다. 국민통합이건 정권교체·정치혁신이건 새로워야 국민이 따분해하지 않는다. 전혀 새롭지 않은 인물들을 불러다 놓고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면 국민은 걱정한다.

백두옹은 노탐(老貪)을 경계한다. 비우고 또 비우며 지혜롭게 늙어온 도인이지만 그에게는 아직까지도 버리지 못한 미련이 남아 있다. 바로 희망의 유혹이다. 백두옹은 그 숱한 절망 속에서도 끊임없이 희망을 낚아왔다. 페루의 바닷가를 무대로 한 어느 우울한 소설 속 주인공처럼. 그랬다. 그는 ‘삶의 심연 속에 숨어 있다가, 황혼의 시간에조차도 문득 찾아와서 모든 것에 빛을 던져줄 수 있는 행복의 가능성을 남몰래 믿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백두옹을 몽상가로 치부한다. 남북관계도, 국제정세와 세계경제도 모두 절망적이기만 한데 무슨 근거로 한반도가 세계 중심이 된다는 거냐고 비웃는다. 근거로 들고 있는 한국역학 정역(正易)이라는 것, 따지고 보면 코너에 내몰린 약자가 변통해낸 자위책이 아니겠느냐고 따진다. 강권 교수도 그중 하나다.

“진흙이 많아야 큰 조각상을 빚을 수 있네. 어려울 때 큰일을 해낼 수 있는 ‘그 사람’, ‘정도령’이 출현하는 거라고.”

“솔직히 박근혜·안철수·문재인 세 후보에게 희망을 걸 수 있나요? 열광하는 국민들은 좀처럼 못 보겠거든요. 정책과 비전이 흐릿하고 역량도 모두 그만그만해 보여서요.”
현실적인 강권 교수는 회의적이었다.

“국민들도 변해야 해. 자신들은 하나도 안 변하고 지도자만 변하라고 하면 돼? 구세주, 메시아가 저절로 나오남?”

백두옹은 서가에서 성경을 꺼내 펼쳤다. 그는 구약성서 민수기 12장 3절을 가리켰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상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강권 교수는 소리 내 읽었다.

“자네는 애급(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도해 가나안 땅으로 이주시킨 모세가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인 줄 알았겠지. 성경학자들에 따르면 모세는 소심한 인물이었다고 하네. 소명감이 있으면 사람은 변하는 거고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 따르면 기적을 일구는 거야. 홍해가 갈라진 것처럼 말일세. 야훼로부터 받은 십계는 당시 백성들의 간절한 열망이 아니었겠나. 전에도 일렀듯 시절운이 맞으면 정도령이 나오네. 여성이라고 혹은 내향적인 인물이라고 못할 게 없어.”

백두옹은 성경을 여러 주역 책들 사이에 다시 꽂았다.

“어르신은 참 종횡무진이시네요. 성경은 언제 또 그렇게 꼼꼼히 보셨어요?”

강권 교수는 혀를 내둘렀다.

“나는 사람들이 즐겨 보는 책이면 어느 것이든 가리지 않는다네. 그 속에 인류의 오래 묵은 소망과 지혜가 담겼거든. 아무튼 메시아를 너무 거창하게 여기지 말라는 얘기네. 효자는 부모가 만들고 메시아는 당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거니까.”

“백세청춘이십니다.”

“청춘은 사양하네. 지나고 나서 돌이켜보니까 질풍노도의 젊은 날이 아름다운 거지, 청춘은 본래 암담한 거야. 열정은 큰데 가진 건 없고, 한 치 앞도 안 보이니 왜 아니겠어. 열심히 부딪치고 깨지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길이 열려.”

백두옹은 수(需:) 괘를 뽑았다. 위는 물, 아래는 하늘로 하늘에 구름이 빽빽한 형국이다. 비로 내릴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모든 기다림은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법이다.
“돌이켜 보면 한 평생이 기다림의 연속이었네. 사람을 기다리고 때를 기다리고. 귀인을 만나면 일이 잘 풀렸지만 악인을 만나면 일이 꼬였지. 때가 좋으면 만사형통이었지만 때가 사나우면 만사불통이었어.”

“그러다 지칠 땐요?”

강 교수는 지혜롭게 늙은 백두옹의 눈을 응시했다.

“노래했지.”

“예?”

“노래 불렀다고.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도 부르고 장밋빛 인생도 부르고. 남루한 시절, 겨레의 한을 달래준 가수 김정구는 우리 모두의 친구였네. 거리의 가수, 에디트 피아프도 그랬고. 계절 탓인가? 그녀의 애절한 샹송 가락이 귓전에 맴도는군.”

백두옹은 모처럼 감상적으로 읊조렸다. 강 교수는 에디트 피아프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떠올렸다. 부모에게 버려지고 창녀촌에서 비참하기 짝이 없는 유년기를 보낸 그녀는 하루아침에 유명해졌다.

‘너무 외롭고 너무 보고 싶어. 그러니까 배로 오지 말고 비행기 타고 와. 배는 너무 오래 걸려.’

미국 공연을 갔던 그녀는 유명 권투선수 마르셀에게 국제전화를 건다. 그녀가 만난 유일한 참사랑이었다. 그녀는 사랑을 목마르게 기다렸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던 마르셀은 추락사하고 만다. 자책하던 그녀가 마르셀을 위해 바친 노래가 ‘사랑의 찬가’다. 그녀는 당신이 원한다면 조국도 친구도 버리겠다고 울부짖는다.

“그러고 보니 힘겨울 때, 국민을 위로하는 노래를 불러줄 줄 아는 지도자가 진정한 지도자 같네요.”

“바로 그걸세. 사회 구석구석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내는 불협화음을 잘 조율(調律)하는 게 정치야. 강 교수, 그거 아는가? 조선 최고의 정치가 세종대왕과 정조대왕은 모두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네. 절대음감까지 타고나서 악공들이 제례악을 연주할 때, 오류를 정확히 지적해내셨어.”

백두옹은 서가 옆에 세워두었던 거문고를 무릎에 올려놓았다. 줄을 고른 그는 오른손에 술대를 쥐고 줄을 뜯기 시작했다. 깊은 우물 속에서 용이 우는 듯한 소리가 나왔다. 거문고 뜯는 신선의 풍모가 완연했다. 강 교수는 마지막 조선인 백두옹이 내는 조선의 소리에 빠져들었다. 가슴과 머리가 청아한 대숲바람에 씻기는 느낌이었다. 마음이 맑고 잔잔한 가을 호수처럼 평정해졌다.

국민 대신 속 시원히 울어줄 후보가 없네
세심(洗心). 주역의 또 다른 이름이다. 주역 철학의 본질은 결국 복잡한 마음을 씻고 새롭게 변화의 조짐을 꿰뚫어보는 일이다. 따라서 어려운 한자를 모르고 굳이 경전을 읽지 않아도 주역을 알 수 있다. 마음 안에 저마다의 하늘이 있고 신(神)이 있다. 결단의 순간에 잘 판단이 서지 않을 때, 그 하늘과 신에게 바른 도리를 물으면 그 속에 정답이 있다. 그래서 마음을 획전역(劃前易)이라고 한다. 괘로 그리기 전의 역학이라는 뜻이다. 리더들은 판단을 그런 식으로 내린다. 많은 데이터들은 참고 사항일 뿐, 결단은 그가 한다. 그래서 리더는 고독하다.

한 바탕의 연주가 끝났다. 강 교수는 앉은 자세로 절했다.

“과연 우리 풍류는 멋스럽고 운치 있습니다. 핫팬티 입고 정신없이 흔들어대는 걸그룹에 비할 바가 아니군요.”

“나는 걸그룹도 좋아하는 걸.”

백두옹이 특유의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 옛 시 한 소절을 읊었다.

“이조명춘(以鳥鳴春)하고 이뢰명하(以雷鳴夏)하고 이충명추(以蟲鳴秋)하고 이풍명동(以風鳴冬)이라. 새로써 봄을 울고, 우레로써 여름을 울고, 벌레로써 가을을 울며, 바람으로써 겨울을 울도다. 대개 만물은 평정심을 잃으면 울게 마련이지. 나는 방금 거문고로써 한바탕 울어본 것뿐일세.”

“왜 아취 있는 풍류를 하시면서 운다고 하십니까?”

강 교수가 무안해했다.

“연암 박지원 선생의 말씀을 답변으로 돌려줌세. 사람은 꼭 슬플 때만 우는 게 아니라오. 너무 기뻐도 울고 분해도 울고, 외로워도 울고 행복해도 울고, 사랑해도 우는 거라오. 지금 대권에 도전한 세 후보도 저마다 자기 포부를 펼치고자 전국을 돌며 울고 다닌다고 할 수 있지. 대선판이야말로 세 후보가 펑펑 울기에 더없이 좋은 호곡장(好哭場)이 아니런가! 그런데 국민 대신 속 시원하게 울어주는 후보가 안 보여!”

백두옹은 괘 막대를 집어 들었다. 수괘의 모든 효를 반대로 바꾸었다. 이른바 착괘(錯卦)라는 것이었다. 궁하면 뒤집거나 모조리 바꾸는 게 주역의 요체다. 그러자 진(晉:
) 괘가 되었다. 지상 위로 태양이 솟구쳐 나아가는 형국을 뜻했다.

“야권후보 단일화가 결판나기까지는 세 후보들의 행보가 지지부진할 테지. 답답하게 마냥 기다리기만 할 게 아니라 우리가 나가보세.”
백두옹은 강권 교수의 소매를 잡아 이끌었다.
“서두르자구. 비전(秘傳)의 터로 안내할 테니까.”

하원갑자 딱 중간, 2014년은 남북통일 큰 기회

계룡산은 영산이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⑮

생민들의 오랜 염원이 서린 지성소다. 머리는 봉황, 몸통과 다리는 용의 형상인 국보 백제금동향로의 모델이다. 신라 5악의 하나로 제왕들이 제사해 온 기도터이기도 하다. 남동쪽 기슭에 신도안이 있다. 신도안은 대한민국 육·해·공 3군 통합기지인 계룡대가 들어서기 전까지 어지러운 무속과 신흥 종교의 본산으로 자리 잡아왔었다.

남서쪽의 국사봉(國事峯). 해발 576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계룡, 곧 봉룡(鳳龍)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으로 조망이 으뜸이다. 계룡산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장소로 지기(地氣)가 세기로도 유명하다.

“내가 너무 늙어서 다시 못 오를 줄 알았느니. 한데 오늘 여기 다시 서니 수십 년 묵은 속세의 때를 말끔히 씻었도다. 미재라. 동방의 유정한 산하여. 넓은 벌판 사이로 산과 산이 연이어 굽이치고 내달리니 이름 그대로 연산(連山) 고을이 아닌가. 괘상으로는 중산(重山) 간(艮:

)이로다. 대저 이 나라가 오묘한 산국(山國)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이 산국에서 구시대의 낡은 것들이 종막을 고하고 새로운 문물과 문화가 움틀 게야.”
백두옹은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감개무량해했다.

“어르신, 오늘 또 놀랐습니다. 가파른 산길을 어찌 그리도 잘 오르시는지요? 젊은 제가 되레 힘이 팽겼답니다.”
강권 교수는 나무 지팡이를 내던지며 철퍼덕 주저앉았다.

“요새 사람들 허우대만 멀쑥하지 속이 죄다 곯았어. 우리 젊었을 적엔 하루에 이 100리 길도 너끈히 걸어 다녔네.”
백두옹은 주머니에서 오원단(五元丹) 몇 알을 꺼내 건넸다. 쥐눈이콩알만 한 환약이었다. 입안에서 오물거리니 향기와 원기가 온몸에 퍼졌다.
계룡산이 품은 동양남·서양녀 형상의 비밀
“어르신, 다짜고짜 왜 여기에 올라오신 건지요?”

“강 교수, 여기가 이른바 국사봉 아닌가. 대권은 국사니까 국사를 논하자면 한번쯤 올 만하지 뭐. 이곳은 ‘기억의 장소’일세. 장소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문화 공간이지.”

백두옹은 계룡산 상봉과 쌀개봉·연천봉을 그윽한 눈길로 우러러보기 시작했다. 강 교수도 그 눈길을 좇았다. 용틀임하듯 뻗어 올라간 끝자리, 봉황의 벼슬 같은 연
봉이 맑은 가을하늘 아래서 신령스러운 자태를 뽐냈다.

“뭐가 보이는가?”
“날씨 쾌청해서 스카이라인이 선명합니다.”
“그리고?”

“뭉게구름요.”
강 교수의 말에 백두옹은 조용히 웃었다.

“내가 오늘 몇 가지 천기(天氣)를 누설하려네. 잘 듣게.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는 한양에 도읍하기 전 몸소 이곳에 올랐다네. 저 아래 신도안에 궁궐을 짓고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에서 천도할 셈이었지.”

“그건 역사적 사실이지요. 이후로도 여러 차례 계룡산 천도설이 나왔고요. 심지어는 박정희 대통령 때도 그랬으니까요. 오늘날 계룡대와 세종시가 그 결실 아니겠어요?”
“그런데 왜 이곳을 꼽았던 건지 아는가? 이곳에는 하늘이 감추고 땅이 숨겨둔 천장지비(天藏地秘)의 표식이 많다네. 그중 하나가 저 스카이라인이 품고 있는 동양 남자, 서양 여자의 형상일세.”

백두옹은 손가락을 뻗어 상세히 설명했다. 송신탑이 박힌 상봉은 동양 남자의 턱이고 쌀개봉은 코다. 그 뒤 관음봉과 문필봉은 서양 여자의 얼굴이며 연천봉은 가슴이다. 보는 각도와 빛의 양에 따라 이마와 턱의 위치가 달라질 수 있다.
“와, 정말 그렇군요! 두 남녀의 얼굴 형상이 완연해요!”

강 교수는 탄성을 질렀다. 워낙 성격이 똑 떨어지는 사회과학자라서 이 정도지 종교적인 인간형이었다면 합장하고 예배했을 거였다.
“화순 운주사 와불(臥佛)은 인공물이네만 저 산상(山上)의 선남선녀는 천지의 조화일세. 전에 말했잖은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간방(艮方)인 한국의 소년과 태방(兌方)인 미국의 소녀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국. 이른바 간태합덕(艮兌合德)이라는 것이네.”
“절묘합니다. 하지만 자연물에 지나친 의미부여 아닌가요? 한국의 산은 사람뿐만 아니라 갖가지 동물 형상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잖아요. 풍수의 형국론이 그래서
나왔고요.”

냉철한 강 교수는 신비주의를 단호히 배격하는 입장이었다.

 

주역 <계사전>에 이르되 ‘우러러 천문을 보고 굽어서 지리를 살피고, 가까이는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사물에서 취해서 팔괘를 만들었다’고 했어. 자연을 단순화시키고 부호화한 것이 주역 괘상일세. 거기서 인간사의 준칙을 보는 건 철학자의 몫이네.”
주역 철학은 64괘라는 범주로 세상을 해석한다. 따라서 코드에 담긴 내용을 해석할 때, 상징과 비유의 요소를 지닌다. 은비학(隱秘學)의 속성도 거기서 온다.
“이성계는 왜 600여 년 전 이곳 국사봉까지 와서 저처럼 기막힌 땅의 비밀을 보고도 이 터를 쓰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때가 아니었음에.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운주사 와불이 일어서고 저 산꼭대기 선남선녀가 합궁하는 날이 오고 있다네. 그 옛날 소년·소녀가 성장하여 어느덧 성년이 되었지. 이제 동서 두 문명이 조화를 이뤄 옥동자 같은 신문명을 창도해야 할 때라네. 그걸 알고 행하면 얻는 것이고 모르고 지나치면 잃는 것이지. 나는 대선 후보들이 문명사적 관점에서 오늘 우리 시대를 보고 큰 그림을 그려주길 바라네.”
백두옹은 학의 자태로 도인체조를 했다. 그러더니 사방을 향해 기운을 뿜어내주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보고서 박수 치며 환호했다. 구경꾼들
이 내려가고 조용해지자, 백두옹이 한참 동안 묵념한 뒤 앉았다.

“대선은 국가의 축제일세. 축제에는 마땅히 희생제의가 필요하지.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데 어찌 마땅한 제물 없이 넘어가겠는가?”
강 교수가 듣기에 좀 생급스러운 말씀이었다.

“YS에서 MB까지 자그마치 20년간 충청권에서 이긴 자가 대권을 거머쥐었다네. 1992년 YS, 97년 DJ, 2002년 노무현, 2007년 MB가 모두 그랬네. 그 중심에 이 계룡
산이 있지.”

듣고 보니 새뜻한 관점이었다. 중심점에 사람이 아닌 산을 놓는다는 게 참신했다.
“왜 계룡산이지요?”
“2007년 늦여름이었다네. 이명박 후보가 정동영 후보를 압도적으로 기선 제압하던 때일세. 이곳 국사봉을 오르내리며 산기도하며 살던 내 후배가 찾아왔었네. 대뜸
노무현 대통령이 곧 죽게 생겼다는 게야. 현직 대통령의 서거라니? 내가 헛소리 마라고 야단쳤네.”
“그분 뭣 좀 보는 분이었군요.”

옆에 앉은 강 교수가 초를 쳤다.
“주역과 정역을 좀 읽은 사람이었네만 아는 소리는 여간해서 잘 안 했거든. 나는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시답잖은 언행을 경계하네. 그래서 일언지하에 호통친 거야. 그랬더니, 지금 죽으면 태산같이 무거운 역사적 죽음이 되고, 퇴임하고 죽으면 한 맺힌 죽음이 된다는 게야. MB 당선의 일등공신 역할을 해놓고도 비참하게 죽는다나? 희생제의를 피할 수 없다는 거지.”

“적중했군요.”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하고서야 그 후배의 말이 옳았다는 걸 알았지. ”
“그분 이따 만나볼 수 있을까요? 이 근처 사실 거 아녜요?”
“이 근처에 있는 건 맞는데 못 만나.”

“왜요?”
“그해 가을, 흙 보탬이 됐으니까.”

“이인(異人)이었군요.”
“이인은 무슨? 신명을 극심히 모아 궁구하면 그런 정도는 보여. 그날 그 후배와 의견 일치를 본 게 하나 있네.”

백두옹은 눈을 감고 호흡을 골랐다. 강 교수는 말없이 기다렸다. 이윽고 눈을 뜬 백두옹이 입을 열었다.
2002년엔 편 가르고 싸우느라 기회 놓쳐

“19대 대권을 쟁취한 이가 남북통일의 발판을 마련할 거라고. 실은 노무현이 집권한 2002년 임오년이 통일의 적기였다네. 그런데 편 가르고 옥신각신 다투느라 큰 그림을 못 그렸으니 모르고 지나갈밖에. 내후년인 2014년 갑오년이 더 큰 기회야. 1984년부터 시작된 하원갑자 60년의 딱 중간이거든. 국운 융창기의 한복판에 통
일 못하면 언제 하겠어? 나는 대선 후보들이 절대 잊지 말았으면 해. 남북통일이야말로 진정한 대통합이니까.”

“대권, 대통합, 남북통일! 왠지 겉도는 느낌입니다. 좁은 소견머리를 못 벗어난 각 후보들이 소권, 소통합을 위해 절절매는 행색들이잖아요. 대통합과 남북통일은 북한 김정은 맘먹기에 달렸어요.”

강 교수가 속 시원히 내질렀다.
“허허허허, 그거 말 된다.”
백두옹이 목젖을 드러내며 웃었다.

“축제에는 제물이 필요하다고 하셨죠? 처녀의 몸으로 일찍이 적진에 뛰어든 박근혜 후보! 그는 김정일과 단둘이 밀실서 회담한 경험이 있어요. 다른 후보들과 차별화된 아주 소중한 경험이죠. 박정희와 김일성의 사후에 대를 이어 지도자가 된 2세들이 만나 무슨 얘기를 했겠어요? 짐작건대 통일 얘기 나누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한쪽이 죽어버렸어요.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독점할 권리가 있죠. 제가 박근혜라면 한 말 안 한 말, 한 약속 안 한 약속 섞어가며 기선 제압해버리겠어요. ‘문재인, 안철수 두 동생들아, 너희가 국정을 제대로 아니? 민족 통일의 해법을 아니? 누나 말 명심해 들어. 오해는 말고. 내게 비법이 있단다.’ 그렇게 어르면서 당차게 치고 나가겠어요. 그깟 장학회니 학교 법인이니 하는 따위들은 대선 축제의 제물로 기꺼이 던져 줘버리고요. NLL 문제도 박근혜가 물고 늘어질 소재가 아니에요. 여하튼 지금 지켜지고 있으니까 대범하게 묻어버리고 휴전선 걷어낼 생각을 해야죠. 중국과 일본이 민족주의를 내걸고 있는 마당에 북한을 끌어안고 우리 민족이 함께 살길을 제시해야지요. 유라시아 철도 놓고 시베리아 가스관 끌어오고요. ”

“얼씨구! 그럼 문재인·안철수 후보의 제물은?”

날이 저무는 것도 모르고 백두옹은 흥에 겨워 추임새를 넣었다.

단지 이기려 야합하듯 편 짜면 국운이 사나울 터

“문재인이 대선에 바칠 제물은 아주 특별해야 합니다. 국민적 감동을 이끌어내야만 겨우 당선할까 말까니까요. 그의 당선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회한의 승화! 따라서 속죄와 감사, 화목의 기능을 하는 희생제의를 찾아내야 합니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 <16>

강권 교수는 먼 하늘바라기를 했다. 백두옹은 계룡산이 품은 남녀 얼굴형상을 눈길로 더듬었다.

“…이해찬·박지원의 헌 정치를 용퇴시키는 것! 김한길이 먼저 결단을 보여줬지만 노회한 모사(謀士)인 저들의 받아치기 수작을 보세요. 내분은 안 된다고 버티네요. 소가 웃을 일입니다. 문 후보에게 상당한 정치력이 있어야 용퇴시킬 수 있죠. 문제는 그들을 제물로 삼더라도 유권자의 싸늘한 마음 녹이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민주당은 예전과 달라진 게 거의 없으니까요. 따라서 자력으로는 절대 승리하지 못해요. 유일한 희망이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인데….”

“역시 동인(同人:)을 짓는 일이로군. 저 계룡산 산상의 남녀처럼 부부합궁하면 더 좋고. 그건 산 위에 연못이 있는 택산(澤山) 함(咸:)인데 키워드는 허수인(虛受人)이야. 마음을 비워야 사람을 오롯이 받아들여. 함(咸)은 무심지감(無心之感)이라. 감(感)에서 마음 심(心)자를 떼어냈으니 몸이 시키는 대로 짝짓는 거라. 문재인이 마음 비우고 스스로 제물이 되라는 얘기야. 출마할 때 먹었던 마음, 곧 초발심은 그럴 생각이었잖아. 지난 총선 때처럼 기득권 못 버리면 정권교체 못하는 거지. 아전인수식 계산법은 안 통해!”

백두옹이 칼로 무 자르듯 외쳤다. 복잡할 땐 단순한 게 정답이다. 그것이 주역철학의 요체다. 얽히면 자른다는 ‘오컴의 면도날’은 주역과 상통한다.
“어르신, 문 후보는 국민경선으로 당당하게 뽑힌 제1야당 후보입니다. 그 전과는 입장과 처지가 달라요.”

문 안의 안철수, 문 밖의 박근혜
“정분이 나면 입장과 처지 안 따져. 동동왕래(憧憧往來)면 붕종이사(朋從爾思)라. 정분난 사이처럼 뻔질나게 오가면 벗이 내 생각에 따르는 거거든. 강 교수, 박·문·안. 이렇게 나란히 써놓고 봐. 나는 자꾸 문 후보가 통과하는 문(門) 같고 문의 안과 밖에 안철수 후보와 박근혜 후보가 있는 것 같은 상(象)이 떠올라. 문 안의 안철수, 문 밖의 박근혜! 그게 문재인의 운명 아닐까?”
백두옹의 농조에 강 교수는 푸훗, 소리 내 웃었다.

“하긴 안철수가 이미 자신을 제물로 내놓았으니까요. 그는 당선해도 고난, 낙선해도 고난의 세월이 기다립니다. 국민이 하라는 대로 하겠다니 속 편한 리더십 같지만 그게 어디 맘 편하겠어요? 내심 걱정이 태산일 겁니다.”
“10일 발표한다는 공약이 궁금하군. 제물은 크고 새로울 때, 그 가치가 있는 게야. 기존 정당 후보와 크기도 고만고만하고 신선도도 거기서 거기라면 제물 가치가 없어. 안 후보는 정책을 만들면서 강지원 후보를 조용히 찾아가 만나보면 좋겠어. 참신성은 누가 뭐래도 강지원 후보가 으뜸이니까. 강 후보를 포용하면 더 좋고.”

국사봉에 저녁 이내가 내려오고 있었다. 국사(國事)를 논하는 건 국지사(國之師)라야 가능하다. 그래서 국사봉(國師峯)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서둘러 하산했다. 국사봉 아래 향적산방(香積山房)으로 돌아온 그들은 거북이 형상의 샘에서 솟는 석간수로 목을 축였다. 달고 시원한 감로수였다. 거북바위 안에 두세 사람이 가부좌하고 명상할 만한 공간이 있었다. 백두옹과 강 교수는 10여 분쯤 좌정했다. 바위 안의 물소리에서 영성이 피어났다. 거북바위는 오른편 힘이 뻗치는 용바위와 함께 천장지비(天藏地秘)의 표식이다. 빼어난 공부터가 분명하다.

저녁을 먹고 나서 산방에 누웠다. 백두옹은 도꾼들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 나라는 산의 나라다. 산국이다. 산국에는 골골에 숱한 수행자들이 산다. 누가 시키지도 않고 돈이 나오지도 않는데 저절로 들어와 수행한다. 나라가 어려울 때도 그랬고 태평한 시절에도 그랬다.

이곳에는 전설 같은 도인들의 일화가 전한다. 1861년 즈음, 조선왕조 오백년의 명운이 쇠해갈 무렵이다. 조선 후기의 도인 연담(蓮潭) 이운규(李雲圭)가 서울에서 낙향하여 인근의 띠울 마을에 은거하고 있었다. 그는 김항(金恒:1826~1898)이라는 시골 선비를 제자로 삼고 ‘천심월(天心月)의 그림자가 어디로 가는가, 그 행방을 찾아보라’는 숙제를 준다. 김항의 나이 서른여섯 살 때다.

김항은 밤낮으로 궁구하고 주역과 영가무도(詠歌舞蹈) 수련을 한다. 독서를 하다가 음·아·어·이·우의 오음주(五音呪)를 노래하고 흥에 겨우면 뛰고 춤추었는데 그가 도약하던 강변에는 풀 한 포기 나지 않을 정도였다. 드디어 19년 만에 비밀을 푼다. 그의 저서

 

정역에 상세하다.

이후로 눈을 뜨나 감으나 앞이 환해졌다. 잠을 안 자도 피곤하지가 않았고 정신이 또렷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앞에 이상한 그림이 나타났다. 주역 8괘였는데
복희괘나 문왕괘가 아니었다. 뜻 모를 괘도는 점점 커졌고 나중에는 온 천지가 그 괘도로 뒤덮였다. 너무 수련에 열중해서 헛것이 보이는 거라고 여긴 그는 보약을 먹었다. 하지만 차도가 없었다. 그렇게 3년을 지내고 주역 <설괘전>을 펼쳐보다가 문득 새로운 8괘도의 근거를 찾아낸다. 새 8괘도를 그리니 그것이 복희, 문왕에 이은 제3의 역학 정역 8괘도다.

괘 그림이 완성되자, 홀연히 공자(孔子)의 영상이 나타났다. 대업을 이룬 것을 칭찬한 공부자는 김항에게 ‘일부(一夫)’라는 호를 준다.
평생 공부에 매달리느라 삶은 곤궁했으나 일부의 마음은 열락으로 넘쳤다. 그래서 늘 웃었다. 100년 뒤, 신천지가 열리는 걸 미리 보았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선생은 국사봉 기슭을 가리키며 ‘여기 구멍이 뻥 뚫리고 금화도(金火道:기차)가 지나간다’며 모양과 속도까지 예언했다. 과연 그 앞으로 터널이 뚫리고 호남선이 놓였다.

선생은 그렇게 일부(一夫)가 만부(萬夫) 되는 때를 기다렸다. 말년에 무식자에 가까운 제자 덕당(德堂) 김홍현에게 도를 전했다. 암송과 수인(手印)으로. 혹세무민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는 왼손가락을 오므렸다, 폈다 하며 8괘를 모두 표현할 수 있었다.
덕당은 이곳 거북바위와 용바위 사이에 있는 세 칸짜리 초가에서 스승 일부의 도를 지켜냈다. 사방에서 공부하기 위해 모여든 문인들을 뒷바라지했다.

눈이 많이 쌓인 날 새벽이었다. 공부꾼 한 사람이 소변을 보러 나갔는데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문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덕당의 영가 소리에 맞춰 추는 춤이었다. 영가는 우주의 소리로 산천초목과의 조화와 일치를 꾀한다. 덕당의 오음주에 호랑이도 감응했던 것이다.
“호랑이 춤춘다!”

공부꾼은 얼떨결에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춤을 추던 호랑이는 바람소리를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덕당과 학인들이 나왔을 때는 이미 호랑이가 자취를 감춘 뒤였다.

영가는 인간의 입으로 내는 자연의 소리다. 생명의 소리이고 우주의 파동이다. 그 소리에 자신의 뇌파는 물론 주변 뭇 생명들이 무아의 경지에 다다른다. 불교의 옴마니반메훔 같은 주문이나 기독교의 신명 나는 찬송가, 무슬림의 시적인 경전 코란에도 그런 요소들이 배태돼 있다.

세 후보 대승적으로 연대해야 제대로 돼
정역은 혁명의 역학이다. 마주하는 괘가 완벽한 짝을 져서 어그러짐이 없거니와, 안에서 밖으로 보던 괘의 방향성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밖에서 안으로 읽어내야 비로소 읽힌다. 드높던 하늘이 땅보다 아래로 내려온다. 평등과 조화, 복지의 상징이다. 체(體)가 바뀌면 용(用)도 바뀐다. 패러다임의 대전환이다. 이른바 후천개벽사상이 바로 여기서 연원한다. 복희 8괘도가 역의 생성, 문왕 8괘도가 역의 성장을 의미한다면 정역 8괘도는 완성을 의미한다.

정역은 대동세계를 맞이하는 인류의 나침반이다. 그 나침반이 이 땅에서 나왔다. 근대화 시기, 서구문명을 따라잡기에 바빴던 우리가 주체적으로 새로운 문명을 주도할 철학적 근거를 갖게 된 것이다.

지금, 한국역학 정역은 꽤 알려져 있다. 역학에 밝았던 탄허 스님도 정역을 읽었다. 하지만 전통 수련법 영가무도는 명맥이 끊긴 듯하다.
“그런데 어떻게 정역이 오늘날 세상에 알려진 건가요?”

강 교수는 그게 궁금했다.

“충남대 총장을 지낸 철학자 학산(鶴山) 이정호의 공이지. 학산은 경성제대 법문학부 출신 수재인데 배화여교 교사 시절이던 31세 때, 덕당의 제자 김경운을 만나네. 김경운은 당대 최고의 관상가로 이름이 높았었지. 학산은 이곳에 들어와 집을 짓고 맹렬히 정역을 연구했네. 이 향적산방도 그가 지은 집이야. 안장경, 이용희, 유승국, 육종철, 권영원 같은 학인들이 따라와 공부를 익혔네. 유승국 교수는 정신문화원장을 지냈지.”
“그런데 왜 대통령 선거에 정역 논리지요?”

강 교수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김지하 시인이 말하더군. 김일부의 정역 속 사상체계를 빌려 서민 대중의 삶과 전문적인 정치를 융합시키는 큰 정치인이 나와야 한다고. 내가 말하는 정도령, 정도를 걷는 대통령도 정역적인 사유를 하는 정치인이라네. 남녀, 동서, 남북, 상하, 보수진보가 적대시할 게 아니라 상대를 필요로 하는 관계로 가야 해. 그게 정역 8괘의 핵심이야. 심하게 말하면 문재인·안철수만이 아니라 박근혜·안철수, 박근혜·문재인도 대승적으로 연대할 수 있어야 한국이 제대로 된 나라가 돼. 셋이 합심할 수 있으면 국운이 좋은 거고, 단지 이기기 위해 야합하듯 편을 짜면 아직 국운이 사나운 거란 말일세. 곧 남북통일도 할 건데 고만고만한 우리 대선 후보끼리 못 합칠 게 뭐야? 누가 당선되든 책임총리는 나머지 두 후보에게 맡길 일이야!”

무릇 종자로 쓸 과실은 먹지 않는 법이니

이상견빙지(履霜堅氷至). 서리를 밟게 되면 머잖아 단단한 얼음을 보게 된다. 주역 곤(坤:, 땅)괘 첫 번째 효사다. 내륙 지방에 벌써 서리가 내렸다. 곧 얼음이 얼 것이다. 대자연이 그러하듯 인간사도 기미를 보면 그 추이를 알 수 있다. 그게 주역의 원리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 <17>

지난여름, 백두옹은 초장부터 여성적 리더십의 도래를 천명했다. 건(乾:, 하늘)의 시대에서 곤의 시대로 천지도수가 바뀌었음에다. 한국역학 정역에서 예견한 대로다. 바야흐로 권위의 시대가 가고 포용과 치유의 시대가 왔다. 하늘이 위에서 군림하고 땅이 낮게 깔려 있는 천지(天地) 비(否:) 상태는 불통(不通)을 의미한다. 군사정권, 철권통치 아래 숨죽이고 살던 생민들의 처지와 같다. 궁색하면 변하게 된다. 180도 뒤집는 것만큼 큰 변화도 없다. 땅이 위로 올라가고 하늘이 밑으로 내려온다. 대통령 위에 국민이 있다는 뜻이다. 지천(地天) 태(泰:) 상태다. 태평세의 상징이다.

지금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팍팍하다지만 그래도 불과 반세기 전, 세끼 밥마저 제대로 못 먹던 시절과 비교하랴. 정치민주화는 이미 이뤘고 이젠 경제민주화 하자고 입을 모은다. 이후엔 사회민주화일 텐데 그 또한 사회적 합의만 되면 못할 것도 없다. 모두 곤(坤)의 시대 증후군들이다. 곤의 미덕은 어머니처럼 만물을 품고 기르는 것이다.

땅이 올라가고 하늘이 내려와야 태평세
“할아버님, 박근혜는 음중양(陰中陽), 안철수는 양중음(陽中陰)이라고 하셨죠? 남자 같은 여자, 여자 같은 남자.”
TV 뉴스를 시청하던 외손자며느리가 묻는다.
“그랬지.”
백두옹은 당도 높은 배를 씹고 오물거리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안철수 말예요. 민주당 문재인의 손을 들어주게 생겼네요. 박근혜 측에선 야합이라고 맹비난하고요. 제가 좋아하는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것 같아요. 문 후보는 한때, 남자 대통령론을 주장했을 만큼 남자 중의 남자인데 할아버님의 여성 리더십 예견, 틀릴 것 같군요. 할아버님 말씀대로라면 박근혜, 아니면 안철수라야 맞잖아요.”

강남스타일 주부인 외손자며느리는 거침이 없다. 하고 싶은 말은 다하는 성격답다. 백두옹은 그게 더 편하고 좋다.
“얘야, 더 두고 보자꾸나. 네가 좋아하는 문재인은 탐욕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겠더라. 민주당과 캠프에서 요란이지 문 후보는 순수한 소년 같기만 해. 강 교수가 지지하는 안철수, 너무 쉽게 보지 마라. 권력을 그렇게 호락호락 넘겨줄 간단한 인물이 아니니까. 아마 둘 사이에 드러내지 못할 깊은 교감과 믿음이 있을 게다.”

“그래 봤자 결국은 당과 조직이 없는 안철수가 문재인 후보에게 밀릴 거라고들 하네요.”
외손자며느리는 세간에 떠도는 말을 그대로 옮겼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이야.”
백두옹은 그렇게 읊조리고 눈을 감았다.
“네?”
“종자로 쓸 과실은 먹지 않는 법이라고!”
눈치 빠른 외손자며느리지만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너 까치밥이라고 아니?”

“그럼요. 이맘때 산촌에서 감나무의 맨 꼭대기 감 몇 개를 남겨두는 거잖아요. 날짐승과도 먹을거리를 나누는 미풍양속이지요.”
“그렇지. 그런데 단순히 날짐승과 먹을거리 나누느라 꼭대기 감 몇 개를 남겨두는 게 아니란다. 주역에 박(剝:)괘가 있어. 괘 모양처럼 양효(-)가 후두두 다 떨어져나가고 맨 꼭대기 하나만 남아있는 형국이지. 그게 석과불식이야. 까치밥 형상과 같지 않니? 주역에 밝았던 다산 정약용 선생이 편찬한 속담집

 

이담속찬(耳談續纂)에 ‘농부는 굶어 죽더라도 종자는 머리에 베고 죽는다(農夫餓死 枕厥種子)’ 했단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차마 묘판에 뿌릴 종자는 못 먹는 거지. 그거 먹으면 모조리 굶어 죽거든. 까치밥은 묘목으로 자라게 될 씨앗이야. 날짐승이 쪼아 먹고 그 씨는 땅에 떨어져 이듬해 봄날, 새싹을 틔우지. 박이 뒤집혀서 복(復:) 상태가 되는 것이야. 맨 꼭대기에 있던 씨 하나가 맨 밑으로 가서 땅속에 심어졌으므로 희망이 움트는 거라.”
“문재인 중심의 야권 단일화와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외손자며느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쌜쭉한 표정이다.
“문재인은 참 선한 영혼이다. 전혀 정치적인 인물형이 아니지. 그런데 인물난을 겪던 민주당의 구원투수로 정치판에 불려나왔어. 그는 국민의 소리를 제대로 들을 줄 아는 대인이야. 민주당 어느 정치인보다 군자의 덕성을 지녔단 말이지. 그는 늘 웃으며 유세하는 거 같더구나. 그래서 얼굴빛도 세 후보 가운데서 제일 빛나. 스트레스가 별로 없다는 뜻이지. 왜겠니?”
“처음에는 어림도 없던 정권교체 가능성이 보이니까요.”

“허허허허-.”
백두옹은 목젖을 드러내며 큰소리로 웃었다.
“정권교체는 필연이에요!”
“상대가 천하의 박근혜인데도? 절대 쉽지가 않아. 더구나 야권에서 하겠다는 개혁, 박 후보도 다 하겠다는데? 국민의 신뢰도는 새누리당이 민주당보다 더 높다는 걸 잊지 말아야지. 정치개혁 대상은 민주당이 더 먼저라는 얘기야. 문재인 후보는 그걸 알아. 뿐더러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역사의 제단에 바친 목숨의 참의미도 알고. 그래서 마음을 비운 것 같아. 얼굴빛에 그게 보여.”

“그러니까 뭐예요? 민주당 중심의 단일화로는 박근혜 못 이긴다, 이거 아녜요. 때문에 그걸 잘 아는 문재인 후보가 조용히 내부 정리를 한 다음, 안철수에게 드라마틱하게 양보할 거다? 그러니까 석과불식의 ‘석과’는 안철수네요?”
외손자며느리의 두뇌회전은 빨랐다.
“그것만이 노무현 정신의 승화요, 국민적 열망의 화답이니까. 안철수 최종 후보라야 동인(同人:)괘가 성립해. 이후에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에 입각해서 가치 중심으로 신당 창당하면 돼.”

“강 교수가 들으면 할아버님 몽상가라고 하시겠네요. 문재인이 야권 최종후보가 된다면요?”
“그럼 송(訟:)괘가 돼. 국민적 송사(訟事)가 붙게 된다는 뜻이야. 안철수 현상을 만든 국민적 열망이 회한으로 남게 되겠지. 그것은 역사적 비극이야. 안철수 현상은 문재인이 절대로 대신할 수 없는 일이거든. 운 좋게 문재인이 박근혜라는 태산을 넘어 대권을 잡더라도 가시밭길이 계속될 거야. 남북통일은커녕 남남갈등이 전방위적으로 증폭될 테니까. 한 번 호되게 데어본 우리 국민은 그런 선택, 절대 더 안 하지. 박근혜에게 표가 결집될 거야. 그래서 급진(急進)이 아닌 점진(漸進)적 개혁의 길을 선택할 거야.”
백두옹이 모처럼 괘를 제시하며 예단했다. 상황을 설명할 때는 자주 괘를 뽑았지만 미래를 예견할 때는 좀처럼 괘를 뽑지 않는 그였다. 함부로 점을 치다가 어긋나면 수치를 당하기 쉽기 때문이다(不恒其德 或承之羞 子曰 不占而已矣-『논어』「자로」). 공자는 항(恒:)괘 세 번째 효사를 그대로 인용했다. 『논어』를 안 읽고 주역을 배우면 점쟁이가 된다.

혁신 없는 同人 결성은 쭉정이 붙드는 셈
“정치판은 아사리판인데 당장 눈앞의 이익 놔두고 왜 멀리 보겠어요? 문재인의 속내와 별개로 민주당에서 절대 양보 안 할 거예요. 새누리당 입장에서도 안철수보다 문재인과 상대하기를 원할 거고요.”

“그럼 민주당은 지난 총선 때처럼 쓴잔을 마시는 거지 뭐. 원죄가 있는 민주당은 진작 호랑이 털갈이하듯 혁신해야 했어. 털갈이 없이 정권만 잡을 욕심으로 안철수를 빨아들이면 새누리당 말대로 야합이 돼. 떳떳한 동인 결성이 아니라는 얘기야. 야합, 혹은 정략결혼이랄까. 귀매(歸妹:)괘에 해당하지. 그대로 진행하면 흉해. 떳떳지 못한 정략결혼을 해서라도 얻는 게 있다면 해야겠지. 파능리(跛能履), 묘능시(能視)! 절름발이 걸음걸이, 애꾸눈이 보기지만 그렇게라도 감행하지 않으면 수가 없겠지. 그러다 어그러지면 여자는 승광무실(承筐无實: 과일 없는 빈 광주리만 이게 됨), 남자는 규양무혈(羊无血: 피 없는 양을 찌름) 짝 나고 말아. 과일 없는 빈 광주리는 씨 없는 고자(鼓子)이고, 피 없는 양은 임신할 수 없는 석녀(石女)라는 얘기야. 알맹이 없는 쭉정이만 붙든 셈이지. 주역의 표현 참 신랄하지 않니?”
백두옹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박근혜 후보가 발을 동동 구르게 됐네요. 생식기만 여자라고 놀림 받던데.”

“같은 여자이면서 너도 동감한다는 게냐? 참 못돼먹은 사람들이다. 어떻게 문명한 대한민국에서 유력한 대선 후보에게 그런 막말을 할 수가 있니? 박 후보는 저들에게 그렇게 취급받을 만큼 허접한 인격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누구보다도 품격 높은 인물이라는 말이다. 나는 박근혜 같은 여성 정치인이 여야를 통틀어 열 명, 백 명쯤 쏟아져 나왔으면 좋겠다. 박 후보가 대선에서 떨어져 정계를 은퇴할까 봐 걱정이야. 미안한 얘기다만 야권에는 아직 박 후보만 한 리더십과 덕성, 아우라를 지닌 여성 정치인이 없어. 진보정의당 심상정 후보 정도가 눈에 띄긴 하지만 세를 모으는 힘은 턱없이 부족해. 흠잡기는 쉬워도 그만한 인물 내놓기는 어렵지. 못 미치면 인정하고 발바닥 땀나게 쫓아다니며 배워야지 왜 헐뜯고 폄하해? 국민들은 그런 천박한 리버럴리스트 선동가들에 질렸다는 걸 알아야 해. 교양시민의 빈곤은 우리 사회의 취약점이야. 명색이 교수요,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이 너무 저급한 수준이라고.”
백두옹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박근혜 후보가 좀 딱하게 됐네요.”
“이제 와서 동정이냐? 미국과 중국의 국가리더십이 정해졌어. 재선에 성공한 오바마 대통령,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가야 할 18대 대통령 자리, 그리 쉽게 못 얻어. 이럴 땔수록 박 후보는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에 충실해야 해.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입각해서 특유의 무게중심을 잡아줘야 해. 국민은 절대 바보가 아냐. 표는 선거 마치고 뚜껑 열어봐야 알아.”

‘安風’ 크게 쓸 줄 모르고 엇박자만 두들겨댔으니…

백두옹이 몸살을 앓았다. 백 세를 넘기고도 건장한 노익장에게는 남다른 양생법이 있었다. 적게 먹고 손을 자주 씻으며 무리하지 않는 거다. 그런데 대선을 앞두고 애가 타면서 몸의 균형이 깨졌다. 다사상비(多思傷脾)라고 생각이 너무 골똘하면 비장을 다치는 법. 그래서 소화가 안 되니 머리가 무거웠다. 환절기 감기기운마저 겹쳤다. 그러다 야권 후보 단일화해 달라며 투신자살한 사건이 터졌다. 애꿎은 호남인이었다. 뉴스를 접한 백두옹은 몸져눕고 말았다. 와병 중에 더 큰 사태가 벌어졌다. 단일화 여론조사 방식을 두고 그악스레 샅바 싸움하던 두 후보 가운데 안철수가 사퇴한 것이다. 통 큰 맏형님은 없었고 착하고 여린 심성의 아우만 있었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18>

“어르신, 어서 쾌차하셔야죠. 카랑카랑한 어조로 후보들에게 쓴소리를 하실 때가 어르신답습니다.”
강권 교수가 문병 와서 백두옹의 야윈 다리를 주무른다. 실버타운에서 지내던 90객 딸도 찾아와서 걱정한다.
“몸이 아픈 게 아니라네. 난 마음이 아파. 남북으로 갈린 이 산하, 이 겨레가 안타까워서.”
백두옹의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같이 늙어 꼬부라진 따님이 눈물을 닦아주었다.

“중생이 아파하니 보살도 아프다더니, 우리 아버지 유마거사 같은 말씀하시네. 그만 훌훌 털고 일어나셔서 나 좀 업어줘 봐요.”
학처럼 늙은 따님이 아이마냥 어리광을 부린다.
“너 하나 못 업어줄 거 같으냐?”
침상에 누웠던 백두옹은 끙-, 소리를 내며 상반신을 세운다. 하지만 떨쳐 일어나기에는 기력이 부친다. 그는 물 한 모금을 입에 넣고 천천히 굴려서 넘긴다. 핏기 없는 안색이 애처롭다.

안철수 등장으로 한국정치 한 단계 진화
“강 교수! 저번에 경주 이견대에 갔을 때 말했었지? 이번 대선을 ‘경상도 남북전쟁과 호남의 슬픈 용병들’로 규정한다고.”
“예, 어르신.”
“그 말을 듣고서 이 늙은이가 버럭 화를 냈었지. 지역감정 들먹인다고. 한데 그 말이 남긴 통증이 이제야 찾아왔지 뭔가.”
백두옹은 야윈 가슴을 쓸어내렸다.

“증오의 시대를 매듭짓고 어르신 말씀대로 대통합, 민족통일 시대를 열어야 할 텐데….”
강 교수가 말꼬리를 가무렸다.

“자네가 돕던 안철수 후보가 사퇴해서?”
“여론조사로는 무소속이 절대 못 당해요. 민주당은 그 방면에 도통했거든요. 그걸 잘 아는 안철수가 던져버린 거죠. 화가 치미네요.”
“기억나나? 나는 일찍이 안철수에겐 척목이 없어서 하늘을 날 수 없다고 했네. 척목은 정당체제야. 안철수가 시민의 열망이 결집된 제3세력으로 발 빠르게 체제를 갖추지 못한 게 실책이었어. 처음부터 새누리당은 배제하고 민주당을 파트너로 삼은 것도 어리석었고. 누차 말했지만 정당지지율은 민주당보다 새누리당이 더 높아. 새누리당이 척결 대상이라면 민주당도 마찬가지야. 민주당 문재인 후보와 동인(同人:)괘 짓고,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는 규(<777D>:
)괘로 맞서야만 ‘안풍(安風)’의 가치가 실현되는 건 아니었다는 말씀이야.”

백두옹은 시나브로 기운을 차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 동인을 결성할 수는 없었죠 뭐.”
강 교수가 잘라 말했다.

“‘나는 ‘안풍’을 석과불식으로 표현한 바 있네. 미래의 희망을 담은 씨앗으로 말야. 전혀 정치인 같지 않은 안철수의 등장으로 2012년 한국 정치계는 분명히 한 단계 진화했네. 그것만으로도 공헌한 거지만 민주당 프레임에 녹아버린 건 참 아쉽네.”
“새누리당도 ‘안풍’이 민심이었다는 걸 잊어선 안 돼요. 끊임없이 쇄신해야 한다는 겁니다.”

“여부가 있나? 민주당이야말로 ‘안풍’을 사유화하지 말아야 해. 계속 정신 못 차리고 뻔뻔하게 굴면 국민이 응징해. 내가 안철수라면 처음부터 이렇게 출마선언했을 거야. ‘나는 내가 아니다. 국민의 열망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12월 19일 밤까지 후보로 남겠다. 그러니 나를 도와주려거든 와서 아무런 조건 없이 돕고, 나를 보쌈 해갈 요량이면 썩 물럿거라!’ 그럼 골치 아픈 단일화 협상도 없었을 거고, 이겨도 져도 영웅으로 남았겠지. 원칙을 보여준 대인으로 말야.”

따님과 외손자며느리가 박수를 쳤다.
“안철수가 끝까지 철수 안 하면 어쩌나 했는데 잘 됐어요. 할아버님, 제가 지지하는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 될 거예요. 참여정부의 실패 경험을 거울 삼아 큰 정치를 하겠죠.”

백두옹의 외손자며느리는 벌써부터 게임이 끝난 것처럼 흥분해 있었다. 정권교체 열망이 워낙 강해서 문 후보가 박근혜 쓰러뜨리는 건 어렵지 않단다.
“아가, 속단 마라. 대권은 진작 정해졌어. 그걸 누가 어떻게 빼앗아오느냐가 관건이었어. 강 교수와 할 얘기가 있으니 그만들 나가주련?”
백두옹은 따님과 외손자며느리를 물리쳤다. 가히 더불어 말할 만한데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고(失人), 가히 더불어 말할 만하지 못한데 말하면 말을 잃는(失言) 법이다. 지혜로운 이는 사람도 잃지 않고 말도 잃지 않는다.

“어르신, 생전 처음 올리는 말씀인데요. 답답하니까 지금쯤 점을 한번 쳐보심이 어떨까요?”
강 교수가 조심스레 간청했다.

“점칠 때도 됐지. 하지만 오늘은 아닐세. 내 몸과 마음이 아픈데 점이 제대로 되겠는가? 나중에 쳐보세. 그보다 며칠 전, 문재인·안철수 TV토론 보며 느낀 점이네. 둘 다 국민을 고무시키기에는 한참 못 미치더군. 정치라는 게 말잔치인데 날카로운 사실의 언어, 국민을 사로잡는 희망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했네.”
“상대가 상처 입을까 봐 배려하다 보니…. 특히 안철수는 마음이 여려서요.”

“새누리당 박 후보와는 역시 결이 다르다는 걸 심어줄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였어. 둘은 그걸 놓쳤다고. 동인을 결성한다면서 뜻은 다른 데 있었기 때문이야.”
“거기까진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겠죠.”

“그러니까 애송이들이지.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가 나왔을 때, 안 후보는 국민적 신뢰를 한 몸에 받을 기회를 놓쳐버리더군. ‘재발방지 약속을 받아야 가능하다’고 안 후보가 말하자, 문 후보는 ‘안 후보 말은 이명박 정부와 다를 바 없다’고 따졌지. 그때 안 후보는 바보처럼 꼬리를 내렸어. ‘안보 문제는 여야가 다를 수 없다. 소중한 우리 국민이 죽었는데 재발 방지 약속 확실히 받아내지 않고 다시 사지로 내몰 수 있느냐? 나는 절대 그렇게 못한다’고 분명히 못 박았으면 KO승 거
뒀을 거야. 야권 후보의 외교 안보관에 미심쩍어하는 판이니까.”

“아, 그게 용 코였군요!”
“안 후보는 이른바 ‘안풍’을 크게 쓸 줄 몰랐네. 대마디 대장단은 놓치고 희미하게 엇박자만 두들겨댔단 말일세.”

천명을 알면 안달할 이유가 없느니
“그래서, 대권은 어디로 갑니까?”
강 교수가 단도직입적으로 파고들었다.
“주역으로 풀기로 했으니 공개적으로 서죽(筮竹)을 갈라봐야겠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라고 했잖은가. 답답해도 조금만 더 참게.”
백두옹이 마른세수를 하고 목 부위를 주무르고 양쪽 귀를 비볐다. 양생 도인술 가운데 하나였다.

“어르신이라면 점을 안 치셔도 기미로 알 수 있잖습니까?”
“기미보다야 여론조사가 낫겠지. 저기 책상 위 서류봉투 좀 가져오게.”
강 교수는 백두옹에게 봉투를 건넸다.

“펼쳐봐.”
박근혜-지수(地水) 사(師:)괘 6효 동(動).
문재인-천풍(天風) 구괘 2효 동(動).
안철수-중수(重水) 감(坎:)괘 무동(無動).

“전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이게 뭔 뜻인가요?”
“안철수가 사퇴하기 10시간 전쯤에 법통 있는 어느 원로교수가 하도 답답해서 뽑아봤다며 내게 보내온 걸세. 박근혜-개국승가(開國承家)에 소인배는 절대 등용치 말 것. 문재인-의리를 지키면 태평.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면 불리. 안철수-물 건너자 또 험한 물. 믿음직한 벗들이 있으면 마음은 편하다.”
백두옹이 간략히 점사를 풀었다.

“놀랍네요! 문재인이 마음을 독하게 먹어 제압한 것, 안철수가 물에 빠져버린 상황 모두요.”
“주역의 문법은 귀신 같아.”
“박근혜의 개국승가라면?”

“대권에 성큼 다가간 걸로 해석할 수 있겠지. 놀라운 건 말야. 소인배는 등용하지 말라고 이른 것이네. 여기다 정자(程子)는 절묘한 해석을 붙였어. 싸워 이기느라 불러다 쓴 소인배는 포상금을 줘 내보내야지 등용하면 안 된다고. 자네 그거 아나? 의사가 실수하면 한 사람이 죽고, 풍수가가 실수하면 한 집안이 망하고, 정치가가 실수하면 한 나라 국민이 비극을 겪는다는 말! 인사(人事)가 만사(萬事)야.”
“정권교체가 이렇게 힘든가요?”
강 교수는 한숨을 쉬었다.

“천명을 받아야 가능하다는 게 대권 아닌가? 낙담 말게. 아직은 몰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후보에게 하늘이 감응하니까. 하늘은 국민이오, 유권자라네. 이번 대선은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아서 누구라도 삐끗하면 지고 마네. 복지와 경제민주화, 권력분권은 이미 후보들이 합창했어. 미심쩍으면 국민은 가차 없이 지지자를 바꿔버릴 것이네. 문 후보나 박 후보나 지금부터가 중요해.”

백두옹은 언제 아팠냐는 듯 댓잎처럼 빳빳했다. 하지만 강권 교수는 코가 쑥 빠져서 고개를 젖히고 천장만 바라봤다.
“이 사람아, 아직 나와 자네가 직접 괘를 뽑아본 건 아니잖아? 조만간 우리 둘이서 목욕재계하고 엄숙히 서죽을 갈라보세. 그게 더 정확하겠지. 대선 투표일을 한 주쯤 앞두고 말일세. 먼저 이기는 자보다 나중에 이기는 자가 비룡재천이야.”

백두옹이 내민 손을 강 교수가 맞잡는 것으로 약속이 이뤄졌다.
“문재인이 유리한 괘가 나올 수도 있겠죠?”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 역사 앞에서 정도를 가면 하늘이 돕고말고.”
초조해하는 강권 교수와 달리 백두옹은 담담하기만 했다. 저마다 천명을 알면 안달할 이유가 없다. 자기 앞의 길을 묵묵히 가면 그뿐이다.

술수보다 세심 갖춰야 시절운 따르니…

‘안풍’을 누가 어떻게 승화시키느냐.
얼마 남지 않은 대선의 최대 이슈다. 『삼국사기』 ‘화왕계(花王戒)’의 주인공이기도 한 백두옹은 ‘안풍’을 씨앗으로 규정한 바 있다. 그리고 석과불식(碩果不食)을 주문했었다. 종자를 먹어치우면 파종도, 수확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임의 시대를 불러온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19>


석과불식은 풍비박산의 박(剝:)괘 맨 위에 하나 남은 양효(陽爻)를 뜻한다. 궁극에 도달하면 변하는 게 세상이치. 180도 뒤집어지면 복(復:
)괘로 대전환되며 맨 위의 양효는 땅속에 씨앗으로 묻혀 자란다. 박탈 직전에 일양(一陽)이 돌아와 회복의 시대로 바뀌는 것이다. 절기로는 동지(冬至)가 된다.
올해는 12월 21일(음력 11월 9일)이 동지다. 대선 이틀 후로 음력으로 따져 초순에 오니 애동지가 된다. 애동지에는 팥죽을 쑤지 않고 떡을 해먹는 풍습이 있다.

박에서 복으로 바뀌는 사이에 곤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씨앗을 심기 전 땅을 고르는 절차라고 할 수 있겠다. 백두옹은 일찍이 천명했었다. 다음 대통령은 분명 대지의 어머니, 땅의 미덕을 지닌 지도자 몫이라고. 강건한 남성적 리더십보다는 온유한 여성적 리더십이 필요한 시대라고. 그러면서 박근혜 후보는 음중양(陰中陽)으로 봤다. 겉모습은 여성이지만 내면에 누구보다도 강건한 남성성을 지니고 있다며. 반대로 안철수 전 후보는 양중음(陽中陰)으로 봤다. 겉모습은 남성이지만 내면에 유순한 여성성을 품고 있기에.

그런 구도는 문재인 후보가 민주당에서 경선레이스를 펼치던 때 잡았다. 백두옹의 예언처럼 척목(尺木)이 없어서 하늘을 날 수 없게 된 안철수가 사퇴했다. 그리고 그의 자리에 문재인 후보가 치고 들어왔다. 단일화의 감동은 없었지만 문 후보의 추격은 만만찮다. 불과 1년 전에는 대권과 전혀 상관없는 인물로서 잠룡 축에도 들지 못했었다. 그런 그가 하늘을 나는 용(龍)의 지위, 바로 아래까지 도약해서 박 후보와 다투고 있다. 한 단계만 더 오르면 바야흐로 비룡재천이다.

전쟁터에서도 자주 점 친 이순신 장군
“박근혜 후보가 여의주를 쟁취한다는 얘기잖아요. 곤덕(坤德)은 여성인 박 후보가 남성인 문 후보보다 더 많을 테니까요.”
강권 교수는 낙담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곤덕이 뭔가?”
백두옹이 묻는다.

“어머니처럼 품어주고 길러주는 거지요.”
강 교수가 정확히 정리한다.
“그렇지. 그런데 민주당 측에서는 박 후보가 여성적 리더십과 별로 상관없다고 주장하잖아? 생물학적인 성(性)보다 살아온 삶의 역정이 더 중요하다며.”
백두옹이 중계방송하듯 말했다.

“그래도 여성 후보인 건 분명하죠.”
“가치 지향점과 공약의 내용도 중요하다네. 얼마나 크게 끌어안고 감싸며 소망스러운 미래로 나아가느냐가 관건이라는 얘기야.”
“그러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주역은 가부간에 명쾌한 단정이 특징이잖아요. 판단은 선명할수록 실행하기에 좋으니까요. 여성후보 박근혜인가요? 남성후보 문재인인가요? 너무 답답합니다.”

선거일 코앞에서 같이 점을 쳐보자고 달랬건만 강 교수가 조급해했다. 오차범위 안에서 겨루고 있는 두 후보였다.
“문재인 후보에게는 양중음인 안철수를 어떻게 안고 키워 가느냐가 중요해. 접붙이기라고 할까? 부동층을 흡수하는 정책도 중요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예언해 화제가 된 책

 

실증주역(청계) 개정판이 참고가 될 거야. 지난여름 어떤 공약을 내거는 후보가 대권을 잡을까, 괘를 뽑아봤더니 화(火地) 진(晉:)괘 무동효(無動爻)가 나왔다지. 진괘는 전진을 뜻해. 과감한 개혁이나 전쟁 수준의 진격이거든. 움직인 효가 없으면 괘사를 보는 건데, 괘사에 ‘백성을 안락하게 하는 임금은 말(馬)에게도 은혜를 베푼다’고 했지. 후한 복지공약,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 공약 등을 강력하게 내건 후보가 당선된다네(631쪽). 타당성이 있어.”

여간해서 점치기를 꺼리는 백두옹이 다른 이가 친 점을 인용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보고 나서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게 군자다. 최대한 인지(人智·human wisdom)로 헤아리고 그래도 정말 모를 때 신지(神智·divine wisdom)를 빌려야 탈이 없다. 인지란 이성적인 헤아림이고, 신지는 알 수 없는 것을 신에게 물어 길흉을 판단하는 것이다. 합리적 경험주의자였던 공자는 좀처럼 점을 치지 않았는데 쳤다 하면 7할을 적중했다고 한다.

점은 전쟁터에서 곧잘 치게 된다. 경제현장, 선거판에서도 점이 흥행한다. 돈과 권력이 좌우되는 곳이야말로 전쟁터다. 쩐의 전쟁, 표의 전쟁!
사람 목숨이 달린 진짜 전쟁터에서 점을 친 예는 숱하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전장에서 자주 점을 쳤다. 출전하면서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병사들을 독려한 장군은 죽음 곁에서 주역 점을 쳤다. 때로는 아내의 병세를 묻기도 했고 다른 장수의 성패 여부도 물었다. 1597년 5월 12일자 『난중일기』에는 수군통제사 원균을 점친 기록이 상세하다. 어려움을 뜻하는 준(屯:)괘가 재수 없는 조우를 뜻하는 구괘로 변했다. 이순신은 크게 흉하다고 판단했다. 두 달 뒤 원균은 악조건 속에서 출전해 전멸당했다.

구한말 의병장 유인석 장군도 일본군과 싸우는 전장에서 점을 쳤다. 세 개의 엽전을 던져서 괘를 뽑곤 했다. 긴급한 상황에서 신속하게 길흉을 물을 수 있는 것이 척전법(擲錢法)이다.

“어르신께서는 누가 대권을 거머쥘지 안 궁금하세요?”
“전혀. 누가 되더라도 걱정이 태산이야. 이번 검찰 추태에서 절감했듯 강도 높은 개혁을 해야 하는데 말이 대권이지 반쪽짜리 권력으로 잘해낼 수 있을까? 봇물 터진 복지공약들도 구체적인 재원 마련책이 없어 실천하기 어려울 거 같고.”
“집권 초기, 힘 있을 때 밀어붙여야지요 뭐. 개혁도 복지도 더 미룰 수 없는 상황입니다. 특히 복지는 대폭 늘릴 수밖에 없어요. 안 그러면 시민 권력이 참지 않을 걸요.”

“자넨 태평이로군.”
“국운이 좋다면서요? 제 걱정은 ‘안풍’입니다. 그처럼 거세게 불었던 ‘안풍’이 정치권에서 벌써 사라져버린 거 같습니다. 새 정치는 온데간데없고 낡은 프레임에 갇혀서 상호비방이나 하고 말입니다. 그건 ‘안풍’에 배반하는 거고 곤덕도 아니지요.”

“그건 그래. 정치가 아직 덜 성숙했나 보지. 자랄 때는 형제간에도 싸우는 거라고. 크려고 싸운다고 하잖아? 그러다 성장하면 안 싸워.”
백두옹은 눈을 감았다. 그는 계룡산 국사봉에 올랐던 일을 떠올렸다. 역사는 제물을 필요로 한다. 역사의 제단에 부모를 바친 박 후보, 친구를 바친 문 후보는 누구보다도 아픔이 있는 이들이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성숙해지는 법이다. 이른바 거듭나기를 하는 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그 어떤 상대라도 이해하게 된다. 죽음의 터널에서 벗어나 세상을 보면 모두가 가엾게 보인다.

“그나저나 ‘안풍’이 잦아지니까 새누리당이나 민주당 모두 구태가 재연되는 느낌입니다. 물러났던 이해찬 전 대표도 슬그머니 유세장에 재등장했고요.”
“유구무언!”
백두옹은 말을 아꼈다.

박근혜, 안풍·북풍·텝풍을 조심해야
바야흐로 공감과 치유의 시대다. 압축 성장은 세계가 놀란 신화를 만들었지만 우리 안에 크고 작은 상처도 남겼다. 우리는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주변을 돌보지 못했다. 이제 그 상처를 외면하지 말고 치유해줘야 할 때다. 돌보지 못했던 성장의 그늘도 안아줘야 한다. 여야 어느 후보가 정권을 잡더라도 명심해야 할 일이다.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치판 한쪽에서 『주역』 철학이 하나의 척도가 된 건 의미가 크다. 선거판에서 승자와 패자의 명암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국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각 정당에 모사와 책사가 활개 치는 이유다. 모사와 책사는 도리를 중시하지 않는다. 이기면 그뿐이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술수를 쓰고 기꺼이 국민 밉상이 된다. 『손자병법』 『삼국지』 『후흑경』 『황제음부경』 『군주론』 모사들이 떠받드는 고전들이다.

시절은 변한다. 우주에서 변하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아마 독서법도 바뀌게 될 것이다. 상대를 거꾸러뜨리는 병법서보다 자신을 돌아보고 영혼을 살찌우게 하는 책이 더 사랑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 누가 대권을 거머쥐었느냐 만큼이나 어떻게 얻었느냐가 중요한 때가 되었다. 과정이 결과만큼이나 중요해졌으므로 술수는 도리어 독이 될 수가 있다. 승자독식의 시대, 책략세계에서 상생의 시대, 대동세계로 시절운이 변하고 있으니 당연하다. 『주역은 중정(中正)의 도리, 시중(時中)의 철학서다. 바른 도리, 때에 적합한 도리는 잔머리를 굴리는 사람보다 마음이 거울처럼 깨끗한 사람이 찾기 쉽다. 세심(洗心)이야말로 주역철학의 핵심이다.

“어쨌든 박 후보는 삼풍(三風)을 조심해야 합니다.”
강 교수가 백두옹의 방을 나서며 말했다.

“삼풍이라니?”
“‘안풍’‘북풍’‘텝풍’ 이렇게 삼풍 말입니다.”
“북한이 대선에 맞춰 장거리 미사일을 남쪽으로 쏠 거라는 거? 북풍은 여권에 꼭 불리한 건 아냐. ‘안풍’은 외교·안보가 보수라 했어. ‘북풍’을 상쇄할 바람이지. 그런데 ‘텝풍’은 뭐누?”

“TV토론! 박 후보가 준비 제대로 못하면 결정타를 맞을 겁니다. 피할 수 없는 텔레비전 바람, ‘텝풍’이 더 무서울 걸요.”
강 교수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돌아갔다.
바람은 얼굴이 없다. 어디든 가고 무엇에든 붙어서 요술을 부린다. 용을 따르는 구름도 바람은 능히 흩어놓을 수가 있다. 보름 남짓한 동안 서로 뒤섞여 몰아
칠 ‘삼풍’ 바람이 이번 대선의 변수다. 끝까지 알 수 없는 선거 판세가 제19대 대선이다.

현룡 대 황룡의 결투… 곤덕 지닌 쪽이 이기리니

용들의 전쟁이 치열하다. 들판에는 유혈이 낭자하다. 검붉은 피와 노란 피가 흘러넘친다. 현룡(玄龍)과 황룡(黃龍)의 혈투다. 곤(坤:
)괘 상육(上六)에서 말한 용전우야(龍戰于野) 기혈현황(其血玄黃) 그대로다. 그 형세가 자못 아슬아슬하여 쉽사리 우열을 가늠하기 어렵다. 과연 누가 승리하게 될까. 백두옹은 곤덕(坤德)을 지닌 후보가 이번 대선에서 승리할 거라고 예상했었다. 황룡의 승리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20>


현룡은 하늘, 강건함, 아버지의 성정을 지녔다. 황룡은 땅, 유순함, 어머니의 성정을 지녔다. 표상으로 보자면 현룡은 검은 깃발, 황룡은 노란 깃발이 되며 정당으로 치면 현룡이 여당, 황룡은 야당이다. 여당인 새누리당의 로고는 붉은색이고 야당인 민주당의 로고는 노란색이다.

정당과 로고 색깔로만 보면 야당인 민주당이 승리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후보의 성별이다. 박근혜 후보가 남성이고 문재인 후보가 여성이었다면 황룡의 완승이다. 그런데 성별이 정반대다. 따라서 황룡의 승리가 어느 후보를 말하는 건지 분명치 않다.

결전 막바지인 9회 말, 문 후보를 애태우던 안철수 전 후보가 구원 등판했다. 특유의 타이밍을 잡아서. 그리하여 안풍(安風), 북풍(北風), 텝풍(TV토론), 이른바 삼풍 가운데 안풍이 되살아났다. 약발이 전과 같지 않다지만 분명 대선판의 변곡점이다. 안철수가 얼마나 적극적이냐에 따라 충분히 역전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문·안의 동인(同人:

) 결성은 유효했다. 비록 천하에 떳떳한 모양새는 갖추지 못했을지라도 앞서가던 박근혜 후보를 잡아 흔들기에 충분하다. 홀로 남겨진 박 후보는 국민과 함께 짝을 짓겠다며 대통합 광폭 행보를 이어왔다. 놀라운 성과도 있었다. 그렇게 다 잡았던 승기다. 그런데 막판 뒤집기 한판으로 당할까 봐 긴장한다. 패색이 짙었던 문 후보 측은 기사회생한 양상이다. 관전자는 스릴이 넘친다.

대선 막바지 3풍, 안풍·북풍·텝풍
‘결국 보수, 진보 총력전으로 치닫는군. 정권교체를 바라는 유권자가 많기 때문에 야당이 승리해야 옳겠지. 그런데 그게 불확실해. 박근혜 후보의 집권도 MB 정권으로부터의 정권교체라고 보는 유권자가 꽤 되거든. 정책도 여야가 온통 알록달록 뒤죽박죽이야. 어느 편이 이길까? 이거 원 성질 급한 놈은 숨 넘어가겠어.’

강권 교수는 혼잣말로 두런댔다. 그러다가 백두옹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랬더니 언필칭 공자님 말씀이 줄줄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동동왕래(憧憧往來)면 붕종이사(朋從爾思)라 하니 천하하사하려(天下何思何慮)리요. 천하동귀이수도(天下同歸而殊塗)하며 일치이백려(一致而百慮)니 천하하사하려(天下何思何慮)리요. 동동거리며 뻔질나게 오가지만 오직 벗들만이 그대 생각을 따르리라. 천하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염려하겠는가. 천하의 만 가지 다른 길은 하나로 통하며, 온갖 생각이 하나로 귀결되니, 천하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염려하겠는가. 강 교수,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사람들만 동동거리는 거야. 담담하게 지켜봐. 어느 쪽이 돼도 대동소이(大同小異)네. 여야가 오직 자기들만이 잘할 수 있다며 표를 구걸하지만 일이 되고 안 되고는 국민이 따라주느냐 안 따라주느냐에 달렸어. 어느 쪽이 집권해도 공약의 실현은 꼭 될 만큼밖에는 안 된단 말씀이야.”

강 교수는 보다 객관적인 의견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정당 소속이 아닌 정책연구자들에게 자문을 하기로 했다. 자기 진영이 이긴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는 제외했다.

함재봉 원장(아산 정책연구원)과 이철희 소장(두문 정치전략연구소)이 오늘의 대한민국에 필요한 국가리더십을 정리했다.

“통합의 리더십입니다. 식민지, 해방 전후, 6·25, 산업화, 민주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고통을 겪고 피해를 본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대한민국호’에 승선시켜야 합니다. 전 세계가 부러워하고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자랑스러운 나라죠. 그런데 정작 우리 안에는 그걸 부정하고 전복시키려고까지 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실패한 국가로 지탄 받고 있는 북한을 옹호하는 세력도 있습니다. 대한민국호가 앞으로도 성공적인 항해를 지속하려면 이 모든 사람들을 함께 태워야만 합니다. 북한까지도. 보수정권이 집권하게 되면 진보가 주장하는 복지정책을 과감하게 수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국의 보수는 공부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재산 지키기만 하고 공부하지 않는다면 젊은 세대, 의식 있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경제 발전의 결과만 내놓고 지지해 달라는 시대는 지났어요. ” 함 원장은 석학답게 공부하는 보수를 역설했다.

“진보는 삶의 개선을 지향해야 합니다. 막연한 목표를 정해 놓고 거기에 매달릴 게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개량을 추구해야 합니다. 차이와 다름도 존중해야 합니다. 보수 진영을 적으로 규정하는 관점부터 바꿔야지요. 정치학자 샤츠 슈나이더가 말한 대로 민주주의는 누구도 옳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문제를 풀어가는 시스템이니까요. 민주적 절차에 소홀하거나,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진보가 아닙니다. 우리나라 진보가 풀어야 할 숙제는 권력의 문제입니다. 권력을 바르게 쓸 의지도 있어야 하지만, 어떻게 다룰지도 알아야죠. 신념윤리가 아니라 책임윤리가 필요합니다. 권력을 잘 활용해 사회적 다수에게 유용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유능한 진보의 시대를 열어야겠죠. 남북관계는 평화정책의 기조를 유지하되, 국민 여론을 감안해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지원은 피해야 할 겁니다.” 이철희 소장은 참여정부의 실패를 거울삼으라고 주문했다.

두 전문가의 조언을 탐욕스러운 정치권이 새겨들을까? 어떻게 해서든지 정권을 잡고, 잡으면 자기들만의 잔치판을 벌여온 정치인들이었다.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누가 생각하랴. 강권 교수는 씁쓸했다.

자기를 버릴 수 없는 인물형, 안철수
같은 시간 청담동 백두옹의 집.
“할아버님, 안풍이 되살아나서 다행이에요. 문재인 후보의 얼굴이 확 폈어요. 새누리당은 우거지상이겠지만요.”

외손자며느리가 호박죽을 내오며 싱글벙글 웃는다. 눈 오는 날, 호박죽 한 사발이면 천하가 부럽지 않은 게 늙은이다. 백 살이 넘은 백두옹에게 무슨 욕심이 있고 사심이 있겠는가. 오로지 자손 걱정, 나라 걱정이다.

“안풍이 되살아나서 새누리당이 바짝 긴장해야 국민이 행복해져. 더 개혁하고 더 잘하려고 힘쓸 테니까.”
외손자가 스크린골프 하러 나가면서 툭 던진다.

“은강이는 뉴욕에서 투표했다던?”
“네, 할아버님. 누구 찍었냐니까 엉뚱하게도 강지원 후보 찍었대요. 강 후보 부부가 모두 법치국가의 지성인답게 반칙 안 하는 원칙주의자들이라서 좋다나요? 사표(死票)가 돼도 괜찮대요.”

외손자며느리가 혀를 내두른다. 백두옹은 뉴욕에서 유학 중인 외증손녀가 기특하고 대견스럽다.

“할아버님, 안철수의 정치생명이 어찌 될지도 흥밋거리예요. 자기집착이 강한 에고이스트가 등 떠밀려서 내키지 않은 지원유세를 다녀야 하고, 그 결과에 따른 자신의 미래도 저울질해야 하니 참….”
안됐다는 표정이다.

“안철수가 왜 에고이스트니?”
“안철수를 이해하는 키워드는 안철수예요.”
“뭔 소리야, 도대체?”

“안철수 연구소, 안철수 재단, 안철수의 생각, 안철수의 약속! 이렇듯 자아 띄우기 행보로 일관된 사람이죠. 처음부터 자기를 버릴 수 없었던 인물형이라는 겁니다.”

과연 똑 소리가 나는 진짜 강남 스타일 아줌마였다. 이렇게 똑똑한 주부, 사업가, 학생들을 가진 나라가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토론의 의미가 뭔지도 모르고 나부대는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를 TV 토론에 나오게 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처럼 극단적인 사람도 대통령에 출마해 동등하게 공중파를 타는 나라는 저력이 있다. 지금은 터무니없더라도 나중 남북통일 때, 도움이 될 수 있다.

백두옹은 방으로 돌아와 괘를 뽑았다. 안철수는 곤(困:)괘 2효 동(動). 신중하게 움직여도 곤란한 처지다. 기대하는 것보다 운신의 폭이 좁다. 효사의 내용은 절묘하다. 남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받느라 피곤하다. 남의 것을 제 것처럼 취한 꼴이니 좋을 리 없다. 지금 대한민국의 처지도 점쳤다. 절(節:)괘가 나왔다. 대나무 마디와 같은 괘인데 절개나 절제를 뜻한다.

 

주역의 60번째 괘로 완성을 의미한다. 이렇게 한 시대가 매듭지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만 박정희 대 노무현 프레임에서 벗어날 일이다.

그 다음에 오는 61번 중부(中孚:)괘는 배의 모양이고, 62번 소과(小過:)괘는 새가 날개 편 모양, 63번 기제(旣濟:)괘, 64번 미제(未濟:)괘는 모두 건너간다는 뜻을 지녔다. 그렇다. 배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이상세계로 건너간다. 푸른 섬 제주도 같은 평화의 나라로.

백중세 선거판이 과열되고 있다. 아무개가 당선되면 이민 가겠다, 자살하겠다는 말도 나온다. 광기의 언어 착란이다. 그런 얼치기 생쇼가 먹힐 거라고 본다면 한참 잘못 짚었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박근혜·문재인 후보! 둘 다 메시아는 아니다. 드높은 국민적 기대에는 많이 못 미친다. 하지만 메시아로 비쳤던 안철수보다야 낫다. 정치적인 역량이 더 낫다는 얘기다. 태평양시대 주역으로 부상한 대한민국의 지도자를 어느 누가 감히 함부로 헐뜯겠는가. 우리 국민들부터 존중해야 세계가 존중한다.

무릇 이기고도 지고, 지고도 이기는 수가 있다네

일러스트 박용석

대선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현룡과 황룡의 혈전은 치열하다. 굳히기와 뒤집기, 어느 쪽이 나중에 웃게 될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여론조사 결과는 오차범위 안에서 박근혜 후보가 약간 앞서거나 양측이 서로 붙은 것으로 나왔다. 앞선 쪽이나 바짝 따라붙은 쪽 모두 속이 탄다. 이렇게 되면 유혈이 낭자한 정도가 아니라 숫제 피 말리는 형국이다. 변곡점은 운명의 교차로이기도 하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 <21>

막판 문재인 후보의 맹추격전은 가히 눈부셨다. 커다란 눈을 반짝이는 그에게 날렵한 적토마의 이미지는 없었다. 비수를 날리는 전사의 풍모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그가 기세등등하던 안철수 바람을 야금야금 흡수해버리더니 마침내 박 후보와 대등해졌다. 구름은 여당의 몫이고 바람은 야당의 몫이다. 처음부터 구름을 몰고 다니며 용의 풍모를 자랑했던 박근혜 후보는 돌풍을 타고 날아오른 문재인 호랑이와 그야말로 용호상박(龍虎相搏)한다. 이로써 운종룡풍종호의 형국이 제대로 연출된 것이다. 이제 최종 승자를 가리는 일만 남았다.

산업화·민주화 세력 화해가 시대 소명
2012년 12월 13일.
백두옹은 동작동 현충원을 찾았다. 지난 7월 중순, 인왕산 산책로에서 청와대 터를 조망한 지 어언 다섯 달이 지났다. 먹구름 속에서 천둥이 울던 여름은 가고 사방천지가 은세계로 변했다. 한파가 닥쳤는데도 국가원수 묘역 햇살은 따사로웠다.

이승만·프란체스카 여사 묘소와 김대중 대통령을 참배했다. 맨 위쪽, 박정희·육영수 묘소는 훨씬 크고 화려했다. 묘 앞에서 동쪽을 조망하면 한강이 궁싯거리며 흘러 들어온다. 한겨울에도 참배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의 묘소는 김해 봉하 마을에 있어서 가보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 내외는 흉탄에 쓰러졌다. 현대사의 비극이자 가문의 횡액이다. 박 대통령의 역사적 평가는 진영에 따라 극명하게 대립한다. 산업화의 견인차 대 반민주 독재자로 엇갈린다. 그의 딸인 박근혜 후보가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에 출마해 역주하고 있다.

일찌감치 선두 주자로 발돋움한 박 후보의 대권가도는 탄탄해 보였다. 욱일승천의 기세를 몰아 손쉽게 대권을 쟁취할 것으로 보였다. 야권 필승카드라는 안철수의 사퇴 역시 박 후보에겐 천운이다. 문재인이 안철수 이기면 박근혜가 문재인 이긴다는 게 중론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박 후보의 낙승이라야 맞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역사는 잔인하게 쓰인다. 특정인의 의도대로 호락호락 만들어지지 않는다. 박 후보는 별다른 장애물 없이 대업을 이룰 줄 알았다. 실추된 아버지의 명예를 복권하고자 했던 그는 역사관을 수정하라는 국민의 준엄한 채찍질을 받고 당혹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아버지의 역사를 부인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TV 토론에서 이정희라는 아주 까칠한 복병도 만났다. 박정희의 친일 행적, 박 후보가 신군부로부터 전달받은 6억원 문제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금기는 깨졌고 박 후보의 특권은 깨져 일반화되었다. 혹독한 담금질이었다.

백두옹은 국가사회유공자 묘역으로 내려왔다. 때마침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1주기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철강왕 박태준은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 바친 기업인이자 정치가였다. 포항제철 없는 한국의 산업화란 있을 수 없고 박태준 없는 포항제철도 있을 수 없다.

“조상의 피의 대가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투신해야 합니다.”
1969년 12월, 대일청구권 자금의 포철 전용 협약서에 서명한 뒤 영일만 현장에서 그가 한 명언이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해, 영남과 호남의 화합은 우리의 시대적 소명입니다.”

1997년 11월, 김대중 대통령 후보와 연대하면서 그가 한 말이다.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선견지명이다. 정치에 발을 담가 곤혹도 치렀지만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해, 영남과 호남의 화합을 몸소 실천한 것은 분명 공훈이다.
미망인 장옥자 여사는 지난 1년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묘살이를 했다. 이 겨울 세상을 훈훈하게 만든 미담이다. 포스코 부인회를 이끌며 봉사해온 삶도 귀감이다.

 

삼국사기 열전에나 나올 법한 휴먼스토리가 아닌가. 21세기 세계 어느 나라에서 이런 감동을 만날꼬. 백두옹이 말해온 곤덕의 사례요, 한국 여인의 바탕 심성이다.

백두옹은 무명용사의 묘역도 둘러보았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조국에 바친 이들이야말로 국가영웅이다. 한 뼘의 땅이라도 빼앗기지 않고,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건지려고 꽃잎처럼 떨어져간 장병들의 희생은 눈물겹다. 아직도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북한은 엊그제 미사일 발사실험을 해서 국제사회의 비난을 샀다. 새로운 리더십이 가려지는 판에 대한민국의 안보가 위협받고 있다.

쿠데타·중우정치가 민주주의 적
“박근혜·문재인 후보 모두 바른 인품이지. 나는 그들 배경 세력의 가치관을 보고 투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네.”
저녁 때, 집으로 찾아온 강권 교수에게 백두옹이 일렀다.
“동감입니다.”

성격 급한 강 교수는 누가 대권을 잡는지 어서 점을 쳐보고 싶을 거였다.
“그럼 약속한 대로 서죽을 갈라볼까? 인지(人智)로 헤아릴 수 없으면 신지(神智)를 빌리는 게 차선책이니까 말야. 하지만 알아두시게. 미래 예측에 100% 적중률이란 있을 수 없다네.”

백두옹은 서죽과 산통을 꺼내왔다.
“압니다. 자기실현적 예언과 실현방해적 예언! 예언의 영향으로 인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현상이 예언대로 된 현상은 자기실현적 예언이라죠. 예언됐으나 인간의 의지와 행동으로 그걸 무력화하는 걸 실현방해적 예언이라 하고요. 자기실현적 예언이냐, 아니면 실현방해적 예언이냐? 박근혜냐, 문재인이냐? 50%의 확률 게임이 왜 이다지 오리무중인지요. 저는 한국 정치가 그동안 보여준 극단적인 정치 양극화와 편 가르기, 진영 논리가 안타까웠습니다. 이 증오의 시대를 끝낼 수 있는 적임자는 안철수라고 보고 그에게 희망을 걸었죠. 그런데 안철수는 끝까지 리더십이 없었고 교양적 시민세력 중심의 제3당은 출현하지 못했습니다. 저를 포함해 지식인과 시민사회의 역량이 부족해서죠. 솔직히 저는 정권교체를 바랍니다. 문 후보로 정권교체가 되어도 증오의 시대가 끝나기를 바라고요.”

“박 후보가 돼도 증오의 시대는 끝내야 해.”
백두옹은 단호했다.
“그런데 그게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
“어르신께서는 박·문 후보가 모두 선하다고 말씀하지만 정치학자인 제 생각은 사뭇 다릅니다. 민주주의를 무력화하는 것은 쿠데타와 중우정치(衆愚政治·mobocracy)랍니다. 정치철학자가 가장 경계하는 독소들이지요. 이번 대선은 냉정히 말해 쿠데타 정권의 후예와 중우정치 선봉장 간의 대결입니다. 양쪽 다 민주주의의 개념과 실현방법론을 잘 모릅니다. 게다가 상대를 인정할 줄도 모르는데 어떻게 증오의 시대를 끝내겠습니까?”
날카로운 정치학자이자 당대의 논객다웠다.

“문 후보가 왜 중우정치의 선봉장이라는 건가?”
“대중을 선동해 참 민주주의를 무력화하는 세력을 대표하니까요. 그들은 편 가르고 분열을 조장해 잡은 권력을 함부로 씁니다. 정치할 줄 모른다는 겁니다. 그걸 간파한 부동층 10%는 좀처럼 투표하지 않을 겁니다. 표심을 잡기 위해 여야가 진흙탕 싸움을 벌이지만 눈살만 찌푸리게 할 뿐 효과가 없을 거란 말씀이죠. 저는 정치학자로서 부동층의 기권을 중시합니다. 독재자 딸이라서, 깽판 친 노무현 계승자라서 차마 찍을 수 없는 양심들이니까요. 그들은 제3당을 원합니다. 자유민주주의 가치와 법치주의를 중시하는 정당을요.”

“부동층에 그런 깊은 심지가 있다는 걸 미처 몰랐군. 멈추고 행동하지 않는 간(艮:)괘 맨 위의 효사와 같아. 독실하게 멈춰 있으니 길하다(敦艮. 吉). 강 교수의 말에 따르면 이번 대선에 표를 행사하면 자신도 모르게 진영논리에 빠지는 꼴인데? 그렇더라도 나는 한 표 당당하게 찍겠네. 찍어주고서 잘못하면 쓴소리하지 뭐. 이제 그만 괘를 뽑아보세. 신명(神命)이 어떤 답을 내리실지 모르겠군.”

백두옹은 옷매무새를 고치고 자세를 바루었다. 산통에 쉰 개의 서죽을 꽂아놓고 눈을 감았다. 점의 목적을 읊조릴 찰나였다.
“어르신!”
강 교수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백두옹이 눈을 떴다.
“괘 뽑지 말죠.”

“왜? 너무 궁금해하더니….”
“어르신께서는 국민을 크게 끌어안고 보살피는 후보가 당선할 거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됐어요. 누가 돼도 저는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지 않을 겁니다. 따라서 미리 알아야 할 필요가 없어져버렸답니다. 괘를 뽑았다가 자칫 부동층에 영향을 미쳐 떨어진 쪽의 원망을 살까 두렵습니다.”
그토록 독촉하던 강 교수가 마음을 바꿔 말리고 나왔다.

“자네가 그사이 주역 철학의 본질을 꿰뚫었군 그래. 훌륭하네.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곧 주역의 온오(蘊奧)야. 주역에 밝았던 노자(老子)가 말했다네. 남을 이기는 자는 힘이 있지만 자신을 이기는 자가 강하다고. 법구경은, 전장에서 백만 명의 적군을 이겼다 해도 자기 자신을 이긴 사람이 진실로 최상의 승리자라고 했고. 여보게, 이기고도 지고 지고도 이기는 수가 있다네. 결과적으로 국민이 이기게 해야 진정한 리더라네. 우선 당장 자기 몫부터 챙기고 보는 약삭빠른 정치인들과 그 일당의 승리는 역사의 패배자가 될 거네. 지더라도 당당하게 져야 떳떳해.”

백두옹은 오른손을 들어 V자를 표했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가느니

마침내 곤(坤:)의 시대가 열렸다.
유천지명(維天之命) 오목불이(於穆不已)!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22> ·끝

천명은 심원하여 그치지 않도다.

 

주역 단사(彖辭)를 쓴 주공(周公)의 노래다. 시경에 전한다.

신(神)이 오는 것은 인간의 지식으로는 알 수가 없다. 하물며 하늘이 하는 일은 아무리 좋다고 인간이 훔칠 수도, 싫다고 거절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른바 천명론(天命論)이다. 천명론은 우주 만물을 지배하는 하늘의 명에 따라 땅 위의 성현(聖賢)이 나라를 통치한다는 유교의 정치사상이다. 국민투표로 대통령을 뽑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천명은 하늘이 아니라 민심에서 나온다. 예나 지금이나 민심에서 나오기는 일반이다. 민심이 곧 천심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당선인!

대한민국 첫 여성 대통령이다. 신라 제51대 진성여왕 이래 자그마치 1116년 만에 여성 국가 리더십이 탄생했다. 역사에 아로새겨질 대업이다. 한국사 근래 천년은 불교, 유교, 기독교와 함께해 왔다. 남성중심적 사유체제는 내내 관통했다. 그랬던 것이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이른바 건(乾:)의 시대가 가고 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물론 이후로는 건곤이 번갈아 가며 조율(調律)하게 될 것이다. 음양이 조화로워야 태평하다.

대한민국은 지금, 어느 때보다 어머니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의 대립을 끝내고 맞춤한 복지정책으로 성장의 그늘을 보듬어야 한다. 동시에 선진국에 진입해야 한다. 어려운 문제다. 욕심 같아서는 서둘러 남북통일도 하고 세계 문명사를 선도하고 싶지만 일에는 순서가 있다.

그 시대 지식인의 총역량이 국운
지난 18일, 댓바람에 강권 교수가 들이닥쳐 다짜고짜 괘를 뽑아보자고 했다. 그 전에는 뽑을 필요가 없다더니만 그새 마음을 바꾼 것이다. 정보가 빠른 강 교수는 문재인이 골든 크로스를 지나 추월했다는 여론조사를 들었던 것. 진보 진영에 속한 그로서는 다시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괘를 뽑았다. 8시 정각이었다.

먼저 박 후보를 물었다. 곤(坤:)괘가 나왔다. 2·6효가 변동했다. 2효는 매우 길하다. 곧고 반듯하고 온전하다. 아는 게 적어도 불리할 게 없다. 문제는 6효다. 일반적으로 이 효가 나오면 흉하다. 그런데 큰 싸움판에서 여성이면 길하다. 절묘하다.

문 후보를 물었다. 손(損:)괘가 나왔다. 6효가 변동했다. 득신무가(得臣无家). 지지자를 많이 얻는 데 집이 없다. 청와대 입성 불가.

“역시 또 박근혜 대통령 당선이로군요.”
강 교수는 코를 빠뜨리고 돌아갔다.

19일, 드디어 투표일이 밝았다. 투표율은 높았다. 여론조사 기관이나 언론, 민주당에서는 70%만 넘으면 민주당 문 후보의 승리라고 입을 모았다. 근거 있는 통계수치였다. 75%가 넘었다. 백두옹의 전화에 불이 났다. 당신이 틀렸다고 조롱하는 이도 있었다. 물론 문 후보를 지지하는 이들이었다. 강 교수도 전화를 걸어 왔다. 오후 5시 무렵이었다.

“주역도 별 수 없네요. 여러 데이터로 볼 때, 민주당 문재인 당선입니다!”
강 교수는 확신에 찬 어조로 내질렀다.
“개표해 봐야 알지 않을까?”

백두옹은 가슴이 먹먹했다. 지난 다섯 달 동안 늙은이가 동양 고전 철학서 주역을 가지고 망령되이 헛소리를 지껄였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너무도 분명했고 거듭된 신명이었으니까. 경주 이견대에 갔던 일, 종로 황학정에서 활시위를 당겼던 일, 계룡산 국사봉에 올랐던 일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오매불망 나라 걱정이었다. 한 순간도 삿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틀릴 수가 있는가? 백두옹은 고개를 저었다.

TV를 켰다. 새누리당 여성 대변인의 표정은 어두웠다. 반면에 민주당 여성 대변인은 표정을 관리하느라 애쓰고 있었다. 양당의 당사 풍경도 비슷했다. 짐짓 기다렸다. 입이 말랐다. 6시 정각 방송 3사 출구조사가 발표되었다. 박근혜 후보 1.2% 우세! 희비가 엇갈렸다. 외손자 내외가 다가와 박수를 쳤다. 하지만 아직 결과를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곧 있다 전화가 울려댔다.

“어르신! 송구합니다. 어르신이 맞혔습니다. 과연 주역철학입니다.”
강 교수였다.

“자네들 진보진영 사람들! 왜 이리 가벼운가? 나꼼수고 트위터리안이고 선동했다가 아니면 말고야. 가벼워도 너무 가벼워.”
백두옹은 처음으로 진보진영 사람들을 싸잡아 나무랐다. 그렇다고 백두옹이 보수진영에 속하는 건 아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중도였다. 거듭 말했듯 주역철학은 득중(得中)의 길이자 시중(時中)의 길이다.

이제 역사의 한 장이 넘어갔다. 대나무 마디처럼 한 시대가 매듭지어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문재인 후보는 깨끗이 승복했다. 해단식에서 그는 말했다. ‘친노의 한계일 수도 있고, 또는 민주당의 한계일 수도 있고, 우리 진영의 논리에 갇혀 중간층의 지지를 더 받아내고 확장해 나가는 데 부족함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한마디로 주역의 핵심인 득중을 못했다. 처음 예상대로 안철수를 밀었더라면 필승이었다. 친노 중심 민주당은 4·11총선에 이어 대업마저 그르쳤다. 버릴 수 없는 오만과 탐욕이 패인이었다. 그들은 입으로만 외쳐댔지 스스로를 혁신할 줄 몰랐다. 호랑이 털갈이는 어림도 없었다. 자기들 몫부터 악착같이 챙기고 거기에 맞춘 억지 논리,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어르신! 이제 작별해야 할 때가 왔군요. 그간 마음고생 많으셨습니다.”
12월 21일 낮에 강권 교수가 또 찾아왔다. 한과 상자를 들고서였다.
“천하의 독설가 우리 강 교수도 애썼네그려.”
백두옹은 야윈 손으로 강 교수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처음부터 주인공은 박근혜 대통령이었고 해피엔딩이로군요.”
“그래서 나는 괘 뽑는 걸 삼갔던 거라네.”

“제가 많이 배웠습니다. 오늘부턴 좀 더 신중하고 무게중심 있는 삶을 살도록 하겠습니다. 트위터도 하지 않을 작정이고요.”
“안 한다고 했다가 곧 다시 하는 사람 많잖아? 중독됐으면 그냥 해도 되네. 나 여주 영릉에 좀 데려다 주겠나? 문득 세종대왕이 그립구먼.”

백두옹은 그렇게 영릉을 찾았다. 천민 출신 과학자 장영실이 만든 천체관측기구 모형 앞에 섰다. 명나라 천하에서 조선의 하늘을 열고자 했던 대왕의 소망이 담긴 기물이었다. 김담·박연·이순지·이천 같은 걸출한 과학자들이 동시대에 쏟아져 나와 발명의 시대를 열었다. 김종서·맹사성·정인지·하연·허조·황희 같은 대신과 강희안·박팽년·성삼문·신숙주·이개·이선로·최항·변계량·김문 같은 집현전 학자들이 드림팀이 되어 세종을 도왔다.

대왕 내외의 합장릉에 참배했다. 세종대는 분명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였다. 하지만 시절이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가뭄은 극심했고 곧잘 흉년이 들었다. 측우기를 발명하고 농사법을 계량했다. 왜구와 여진족의 침입도 잦았다. 이종무는 남진하여 대마도를 정벌했고, 김종서는 북진하여 여진족을 몰아냈다. 가장 뛰어난 업적은 뭐니뭐니 해도 한글 창제다. 문자가 권력이던 시절에 한없는 백성 사랑의 마음이 낳은 업적이다.

천리마(千里馬)는 늘 있지만 그 말을 잘 모는 백락(伯樂)이 늘 있는 건 아니다. 인물이 많아도 그 인물들을 잘 활용할 큰 지도자가 자주 나올 리 없다. 하지만 세종 같은 지도자가 다시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필요가 창조를 낳는 거니까. 그 시대 지식인의 총역량이 국운이다. 뛰어난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불러다 쓰는 국가 리더십이 국운을 좌우한다.

사람을 잘 써야 바르게 다스려지는 법
박근혜 당선인!
두 달 뒤면 대한민국 최초 여성 대통령에 취임한다. 지금 당선인 주변에 어떤 공신들이 포진해 있는가. 전에 뽑았던 괘에서 개국승가(開國承家)에 소인물용(小人勿用)하라 했다. 공을 세웠다고 소인배를 등용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경고였다. 주역의 신명이 두 눈 똑바로 뜨고 이르는 것 같아서 아주 섬뜩했다.

백두옹은 한국 역사 속 드림팀을 구성해 보았다. 대통령 자문역으로 광개토대왕·문무대왕·세종대왕·정조대왕. 책임 총리에 동인·서인 가리지 않고 탕평 인사를 펼치려 했던 이이. 교육부 장관에 설총·최치원·이황. 지식경제부 장관에 정약용. 법무부 장관에 조광조. 국방부 장관에 을지문덕·강감찬·조헌·이순신. 보건복지부 장관에 김만덕. 외교통상부 장관에 서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왕인·평강공주·원효·의천·김정희. 여성가족부 장관에 신사임당·허난설헌….

꿈같은 인재풀이다. 입현무방(立賢無方)으로 친소나 귀천에 구애되지 않고 불러 쓸 수 있다면 세계사가 바뀐다. 유감스러운 건 모두가 역사 속 위인들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불러다 쓸 수가 없다. 하지만 정신이야 왜 못 본받겠는가. 모름지기 당대의 인물 가운데 지역과 세대, 이념, 성별을 가리지 말고 고루 찾아 쓸 일이다. 그래야 정도를 걷는 대통령, 정도령(正道領)이 된다.

백두옹은 집으로 돌아와 광개토대왕비문 탁본을 펼쳤다. 웅혼하고 힘찬 글자들이 압권이었다. 광개토대왕은 5세기 고구려 융창기를 이끈 영웅이다. 하석(何石) 박원규 서예가에게 비문에서 집자해 치국재어용인(治國在於用人)을 쓰게 했다. 대통령이 사람을 잘 써야 국가가 바르게 다스려진다.

끝으로 박근혜 대통령 임기 동안의 국운을 뽑았다. 역시 곤(坤:)괘가 나왔다. 신기하게도 거듭된 곤 괘다. 2·3·5효가 변동했다. 통기변(通其變)을 했다. 3효가 나왔다. 임기 5년 전반기는 아주 좋다. 함장가정(含章可貞)이니 아름다운 뜻을 가슴에 품고 곧게 간직한다. 후반기는 어려움이 많다. 우물을 청소했는데 흙탕물이 가라앉지 않아 먹을 수가 없다. 하지만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두레박질을 하면 국민과 함께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다. 대통령이 현명하게 처신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변화의 철학서 역(易)은 말한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 시대가 변했다. 대한민국의 국가 리더십도 확 변했다. 이제 크게 통할 차례다. 바라옵건대 문화강국 대한민국이 오래오래 융창하길!

궁(窮)·변(變)·통(通)·구(久)

대선에 앞서 누가 당선될지, 국운은 어떨지 괘를 뽑았더니 모두 다 곤(坤)괘다. 여성 시대란 것이다. 신라 진성여왕 이후 1116년 만에 여성 국가 리더십이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