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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최규하, 단 한마디도 털어놓지 않은 대통령의 업보

▶ 이명박 전 대통령 회고록에 대한 호불호가 크게 갈립니다. 그러나 그는 기록은 남겼습니다. 기록조차 남기지 않은 전직 대통령이 있습니다. 최규하, 전두환 전 대통령입니다. 그들에게 증언은 어느정도 의무이기도 했습니다. 기록의 의무를 저버린 대통령, 최규하 기념사업회가 2012년부터 원주시청의 예산 지원으로 운영 중입니다. 대통령 기록의 의미와 무게를, 최규하 전 대통령을 통해 다시 짚었습니다.
1941년 만주는 엘도라도였다. “식민지 조선·대만 출신자들에게 입신출세나 일확천금의 기회를 부여잡을 수 있는 ‘동양의 엘도라도’”였다.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 청년도 24살께 엘도라도에 갔다. 만주에 가기 전에 이미 엘리트였다.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를 나와 1941년께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순의 근대국가, 만주에서 성장
만주국은 또한 실험장이었다. “국민국가 만들기의 실험적 사례”였다. 공식적으로는 만주인·몽골인·한족·일본인·조선인 5민족의 ‘오족협화’를 이념으로 내세웠다. 다민족국가인 미국을 모델로 삼았다. 법률상 입헌군주국이었고 입법부인 참의원을 규정했다. 그러나 정당 결사의 자유가 없었고 선거는 한번도 치러지지 않았다. 반관·반민단체인 ‘오족협화회’가 대의체 역할을 했다. 화폐는 있었지만 외교·국방권은 사실상 없었다. 국적법이 없어, ‘만주국민’이라는 국적도 없었다. 일본 관동군과 일본 국책회사인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가 사실상 군사와 경제를 좌우했다. 그래서 학문적으로 일본제국주의가 만든 ‘괴뢰국가’라는 평이 대세다. 물론 아베 일본 총리의 외할아버지이자 만주국 고위관료를 지냈던 기시 노부스케는 ‘민족협화’, ‘왕도낙토’ 이상에 따라 건설된 국가라 주장한다.


그러나 생활과 삶의 영역에서는 다민족 공간이었다. ‘오족’은 물론 볼셰비키 공산주의혁명에 반대한 러시아인과 동유럽인도 뒤섞여 살았다. 이때 만주를 배경으로 ‘만주 웨스턴’이라 명명한 영화가 많이 나오는 건 우연이 아니다. 한편 철도, 우편, 항공, 경찰, 행정기구 등 근대국가의 기능은 작동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요컨대 만주국은 모순이었다. 선거 없는 근대국가였고 자유경쟁 없는 자본주의 국가였지만, 한편 정상적으로 철도가 다니고 우체부가 편지를 배달하고 관료가 매일 출근해 문서에 도장을 찍었으며, 행정부가 만철 관료와 함께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했던, 기계처럼 작동하는 근대국가였다. 경찰 및 행정관료를 충원하기 위해 국립대학인 ‘대동학원’, ‘건국대학’을 세웠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40년대 중반 만주군관학교를 다니며 지켜본 것도 아마 이런 ‘모순된 근대주의’였을 것이다.

24살의 조선 엘리트 청년은 만주국의 고급교육기관인 ‘대동학원’을 1943년께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쪽 역사서에는 1945년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기록이 맞는지 알 수 없다. 청년은 죽을 때까지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일어·영어에 능통하며 1940년대 중반에 행정관료로 ‘만주국의 근대주의’를 배운 이 청년은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는다. 만주국 황제 푸이는 1945년 8월18일 만주국 해체를 담은 조칙을 발표한다. 이 청년이 대체, 언제, 어떤 경로로, 무슨 꿈과 생각을 가지고 고향 조선으로 돌아왔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엘리트 청년은 다시 남한에서 관료가 됐다. 일제시대 통명(일상적으로 쓰는 이름)으로 알려진 ‘우메하라 게이이치’(梅原圭一) 대신 ‘최규하’라는 본명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최규하 전 대통령은 알고 보면 남한의 모든 역사적 격변기에 다 있었다. 1948년 농림부 양정과장이 됐다. 1951년 외무부 통상국장이 됐다. 이승만 정부 때의 한일회담 실무에도 참여했다. 1952~57년 주일대표부 총영사, 1959~60년 외무부 차관을 지냈다. 5·16 쿠데타 이후 1963년 말레이시아 대사가 됐다. 1967~71년 외무부 장관이 됐다. 박정희 정부의 베트남전 참전과 관련해 한미회담 실무를 맡았다. 1971~75년 청와대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이 됐다. 1975년 12월부터 국무총리 서리로 일했고 1976년 3월13일 국회 동의를 거쳐 총리가 됐다.
1979년 10월26일에서 1980년 8월16일까지의 진실을 아직도 한국인은 온전히 알지 못한다. 1965년 10월부터 시작한 베트남 파병의 진실도, 일부만 안다. 그때 권한을 행사했던 최종결재권자거나 중요한 실무자였던 최 전 대통령이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짧은 시기에 격변이 있었다.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숨졌다. 12월12일 전두환·노태우의 군사반란이 일어났다. 최 전 대통령은 1979년 12월21일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계엄 확대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립을 결정한 국무회의 등의 최종 사인이 다 그의 손에서 나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것이 아니었다. 1980년 5·17 계엄이 확대돼 김대중·김종필이 체포됐고 김영삼은 가택연금됐다. 8월16일 최 전 대통령이 하야한다.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한다.

역사학자들이 최 전 대통령이 밝혀주길 바랐던 역사적 장면들이 있다. 첫째, 1979년 12월12일 저녁 6시30분에서 12월13일 새벽 5시께까지 ‘10시간30분’의 진실이다.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법률상 상관인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김재규의 암살에 관여했다는 명목으로 불법 체포했다. 전두환이 저녁 6시30분께 체포를 허가해달라는 재가서를 노란 봉투에 담아 삼청동 총리 공관을 찾았다. 당시 최 전 대통령은 대통령권한대행이었으므로 아직 총리공관에 머물고 있었다. 서울 시내 여러 곳에서 신군부가 합법적 군지휘부를 점거하면서 총격전이 일부 벌어졌고, 결국 노재현 국방부장관이 신군부에 쫓기다 그 노란 봉투를 제 손으로 다시 들고 총리공관으로 왔고 최 전 대통령이 새벽 5시께 결재한 사실은 대강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의 구체적 대화 내용은 전혀 알려진 바 없다. 전 전 대통령도 1995년 검찰 수사에서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최 전 대통령 측근들은 그래도 버텼다고 자평한다.
둘째, 1980년 8월16일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이유다. 전 전 대통령은 검찰 수사에서 “7월에 최 전 대통령을 만났다”고 주장했다. 전 전 대통령이 압박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뚜렷이 밝혀진 바 없다. 셋째, 박정희 정부와 미국 사이 베트남 전쟁 협상의 실체다. 최 전 대통령은 1988년 5공 청문회 때 출석 및 서면 증언을 모두 거부했다. 1995년 전두환·노태우 내란죄 수사 당시 검찰의 서면조사에도 답하지 않았다. 구인장을 받고 법정에 나가서도 말하지 않았다. 회고록도 남기지 않았다. 2006년 숨졌다.
12·12 등 역사의 격변기마다
사인한 건 전두환 아닌 최규하
말하지 않고 기록하지 않은 그는
침묵으로 현대사 빗장 건 대통령
2012년 기념사업회 출범했다
정치적 과오 냉정한 평가없이
원주에서 ‘지역 인물’ 부각되고
‘강원 출신 대통령 기리자’ 조례
지방정부 지원에도 활동 지지부진
유족·관계자도 그처럼 침묵할 뿐
사업 실행 안돼 지원금 일부 돌려받을 예정
최 전 대통령은 12·12 쿠데타의 피해자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피해자인지 조력자인지 분명치 않다. 최 전 대통령이 공식 통치시스템의 물밑에서 신군부가 움직이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던 정황이 또 확인된다. <한겨레>가 최근 확인한 미국 국무부 기밀해제 문서에서 이런 정황이 엿보인다. 1980년 5월9일 당시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이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는 당시 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과 글라이스틴의 독대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자신의 의견인지 밝히지 않은 채 최광수는 전두환이 계엄법 아래서 국민투표를 할지 고민중이며, 올여름에 펼쳐질 새로운 정치적 국면에 앞서 모종의 ‘정치적 수술’을 실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독대 며칠 뒤 5·17 계엄 확대가 실시되고 광주민중항쟁이 벌어진다. 이 모든 흐름을 대통령비서실장이 알고 있으며 미국 대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최광수 당시 비서실장은 체제유지파였다. 뼛속까지 보수였다. 글라이스틴이 보낸 같은 문서를 보면, 최 전 비서실장은 “김대중과 김영삼이 ‘약속한 정치적 개혁을 하지 않는 데는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정부를 비판한다며 그들을 맹비난”했고 “노동계 상황에 불안해했고 사북탄광 노동자쟁의를 다룬 방식을 자랑스러워했으며, 인천·서울·부산 등 4개 주요 산업지역에서 벌어진 노동쟁의를 진압한 것을 뿌듯해했다.” 이런 인물이 보좌한 인물, 당시 모든 국정행위를 결재한 사람이 최 전 대통령이었다.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은 훗날 회고록에서 최 전 대통령과 노 전 국방장관을 12·12 내란의 가장 중요한 두 책임자로 지목했다.
이처럼 평가가 엇갈리지만 강원도에서 조용히 ‘지역 인물’인 점에 초점을 맞춘 기념사업회가 운영되고 있다. ‘최규하 대통령 기념사업회’가 2012년 12월 창립총회를 거쳐 설립돼 최근까지 운영 중이다. 최광수 전 비서실장이 이사장이다. 강원도의회는 2009년 ‘강원도 출신 전직 대통령의 위업을 선양하기 위한 기념사업을 지원’하는 내용을 담은 ‘강원도 전직 대통령 기념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를 만들었다. 재단 누리집을 보면, 최 이사장은 “(최 전 대통령이) 실리외교를 추구”했고 “뛰어난 외교관과 행정가로서의 업적을 소개”하는 것을 설립 취지로 밝히고 있다. 기념사업회는 원주시청과 강원도로부터 설립총회 때부터 2014년까지 ‘창립총회’ ‘사업비 및 운영비’ 등 명목으로 모두 1억4000만원(도비 5000만원, 시비 9000만원)의 지원금을 받았다. 지방재정법이 개정돼 지자체의 교부금 지급 기준이 엄격해진 탓에 올해는 2000만원만 지원받을 예정이다. 올해 기념사업회 운영 여부가 불투명하다. <강원일보>는 지난달 초 “다른 대통령들의 기념사업회와 달리 기본재산이나 기부금 등도 거의 없는 실정이어서 최규하 대통령 기념사업회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기록을 남기지 않은 한계’가 지역에서도 지적된 적이 있다. 원주시의회 회의록을 보면, 기념사업이 논의되던 2010년 12월 원주시의회에서 신재섭 의원이 사업 취지에 대해 “대통령께서 원주에 한 분밖에 안 계시는데 이분한테 꼭 듣고 싶었던 내용이 있는데 결국 돌아가시면서 그 부분을 말씀 안 하시고 가셔서요. 전임 대통령들 업적으로 보면 기간이 짧아서 얼마 안 될 텐데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을 때 이분을 선양해야 되는지 이런 것을 가려볼 텐데, 그 부분이 안타까운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시의회에서 기념사업 추진을 지지하는 분위기지만, ‘지역 인물’이라는 점이 주로 부각되고 있다.

사업은 잘 진행되지 않는 것 같다. 원주시청 설명을 종합하면, 기념사업회는 추도식, 나라사랑 글짓기 대회, 최 전 대통령에 대한 강좌 등을 하겠다며 지원금을 받았지만 나라사랑 글짓기 대회 등 일부 사업이 실행되지 않았다. 원주시청은 지원금 일부를 올해 되돌려받을 예정이다. 누리집에도 연혁, 실적 등이 하나도 없다. 기념사업회에 딱히 전시된 유품도 없다. 원주시 역사박물관 1층에 최 전 대통령이 타던 관용차 ‘푸조 604 1979년식’만 전시돼 있다.
역사학자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최 전 대통령이 아무것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실망이다”라며 “일본식 교육을 받은 사람이 그렇게 했다(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건 제대로 교육을 못 받았다는 것이다. 일본 전통은 그렇지 않다”고 11일 전자우편을 통해 평했다. <한겨레>가 ‘대통령 등 국정책임자가 역사적 증언이나 기록을 남길 의무가 있는지’ 묻자 “당연히 남겨야 한다. 그것이 이명박 전 대통령 회고록 수준이더라도. 그것 자체가 또 다른 역사의 기록이 된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우리 외교문서를 보면 최 전 대통령이 나오지 않는 대목이 없다. 외교 쪽에서 현대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분 중 하나”라고 덧붙였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안병욱 가톨릭대 명예교수는 11일 통화에서 “증언과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은 큰 문제”라며 “최 전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 의무를 다했다면 12·12 내란과 5·17 계엄 확대 등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답했다. 만주국 황제에서 공산화된 중국으로 돌아간 푸이는 <황제에서 시민으로>(이윤양 옮김·문학과비평사)를 남겼다.
정승화 체포 재가 문서는 ‘미싱 상태’
최 전 대통령처럼 유족과 기념사업회도 상당히 과묵하다. <한겨레>가 지난달 28일 원주시 상공회의소에서 열린 기념사업회 이사회 자리를 찾아 최 전 대통령의 장남인 최윤홍 전 한국지역난방공사 비상임이사를 만나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지금까지의 언론 보도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등의 이유로 고사했다. 기념사업회 쪽에 최 전 대통령이 남긴 기록이 존재하는지 물었으나 없다고 답했다.
참여정부 때 국가정보원 1차장을 지냈고 이명박 정부 대통령직 인수위원을 지낸 서대원 전 헝가리 대사가 최 전 대통령의 사위다. 1973년 외무고시 합격 뒤 외무관료로 오래 일했다. 1979년 12월15일자 미 국무부 기밀해제 문서를 보면, 1979년 12·12 내란 당시 주미대사와 최 전 대통령 사이의 ‘채널’로 ‘대통령의 사위’가 언급된다. ‘사위’가 최 전 대통령에게 두번 전화했다고 기록돼 있다. 서 전 대사와 통화한 뒤 전자우편으로 당시 최 전 대통령과의 대화 내용 등에 대해 물었으나 이후 전화·문자·전자우편 등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는 이명박 정부 한식세계화추진단 위원을 지냈다. <한국 대통령 통치구술사료집1: 최규하 대통령>에서 신두순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의 설명을 보면, ‘정승화 체포 재가문서’는 여전히 “미싱”(사라지고 없다)인 상태다. “지금도 그 서류가 미싱이에요. 없습니다. 우리가 그 서류를 갖고 있나요? 사인을 받은 곳에서 가져가는 것이지.” 있어야 할 기록이 없는 게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