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대통령 기념관
박정희 동상이 묶였다. 지난 11월 14일은 박 전 대통령 탄생 100돌이었다. 그날 서울 상암동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정문에 세우려던 동상이다. 중앙 전시실로 올라가는 계단 앞 한가운데 바닥에 먹줄 표시가 아직 남아 있다. 항의 시위가 이어지자 서울시가 심의를 거치라고 요구했다. 전직 대통령 문제가 끝없이 논란이다.
하나로 모을 수 없는 평가. 전직 대통령 기념관을 한곳에 모으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한다. 경쟁적으로 기념관을 만들고 확장한다. 의욕이 앞서 문을 못 여는 곳도 있다. 경쟁자의 기념관은 방해한다. 표적이 된 전직 대통령의 지방 생가와 기념관들을 돌아봤다.
역대 대통령 기념관과 생가
소박한 박정희 생가
구미 생가는 소박하다. 박 전 대통령이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1937년까지 살았던 집이다. 과거 모습을 살린 사랑채는 나무 기둥도 없는 흙벽 초가다. 무너질 듯하던 벽이 복원되면서 반듯해졌다. 방 안에는 책상과 책꽂이·호롱불이 놓여 있다. 부엌과 외양간에 탈곡기와 지게가 보인다.
경북 구미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앞에 있는 새마을 상징 동상.
지난 21일 이른 아침 문도 열기 전에 도착해서인지 인적이 별로 없다. 어린 학생이 혼자 쓰레기를 줍고 다닌다. 주변은 깨끗하다. 좁은 전시 공간에 생애와 업적들을 오밀조밀 집어넣었다. 근검 소박하던 1960년대 기풍이 느껴진다. 추모실에는 박 전 대통령 내외의 영정 사진이 크게 세워져 있다. 박 전 대통령의 부녀 사진이 유난히 쓸쓸해 보인다.
생가와 주차장 사이로 150m 길을 올라가니 5m 높이의 박 전 대통령 동상이 서 있다. 손에 든 원고에는 국방대학원 졸업식 연설문이 적혀 있다. “…평생 소원이 있다면 우리들 세대에 우리의 조국을 근대화해서 선진 열강과 같이 잘사는 나라를 한번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구미 박정희로에서 건설 중인 새마을 테마 공원의 본 건물. 2017년 말까지 완공해 18년 초 개관 예정이다. 김진국 기자
새마을공원 운영 서로 안 맡으려
사무실에는 구미시 공무원 3명이 앉아 있다. 그들은 “생가 바로 옆에 ‘경상북도’가 새마을 테마공원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25만㎡(약 7만6000평)의 넓은 부지다. 지상 3층, 지하 1층인 건물 4개 동과 야외 테마촌이 들어선다.
공사장에서 만난 한 60대 남자는 “연말까지는 마무리될 것”이라면서 정치인에 대한 비난을 쏟아냈다. 경북도와 구미시의 갈등으로 임금 체불까지 있었다고 한다. 앞으로 운영도 불투명하다. 2009년 김관용 경북지사가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건의해 착공했다. 당초 국비 298억원에 도와 시가 각각 286억원씩 부담하기로 했다. 그런데 부지 매입비와 관련한 이견으로 도가 151억원, 구미시가 426억원을 냈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다 지은 다음이다. 한 해 운영비가 기관에 따라 36억~59억원이 든다고 추산하고 있다. 구미시는 경북지사가 시작한 일 아니냐고 하고, 경북도는 지원할 법적 근거가 없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없었어도 이랬을까.
서울 상암동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도 말이 많다. 9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과거사 화해를 위해 지원하기로 약속한 사업이다. 국고 200억원과 500억원을 모금해 지은 뒤 서울시에 기부채납하기로 했다. 그러나 모금이 지지부진하자 2005년 노무현 정부가 국고 170억원을 환수했다. 대법원까지 간 끝에 2009년 기념사업회가 이겨 2012년 겨우 개관할 수 있었다.
그다음엔 도서관이 문제였다. 서울시는 공공도서관으로 운영하려 하고, 기념사업회는 박 전 대통령 관련 책만 전시하겠다고 했다. 도서관 없이 전시관만 열었다. 내년 상반기까지 시설 보완 공사로 휴관이다.
2년 넘게 문 닫힌 김영삼 기념관
11월 22일은 김영삼 전 대통령 2주기다. 현충원에서 열린 추도식에는 문재인 대통령도 참석했다. 거제 ‘김영삼 대통령 기록전시관’ 앞에서도 추도 행사가 열렸다. 기록전시관은 생가와 붙어 있다. 부지 955㎡(약 290평)에 연면적 557㎡(약 170평) 2층 건물로 바다가 훤히 보인다. 거제시가 사업비 34억원을 전액 지원해 2010년 개관했다.
거제 장목면 대계마을에 있는 김영삼 전 대통령 생가. 김 전 대통령의 흉상과 대통령 내외의 실물 크기 사진이 있어, 기념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바로 옆에 기록기념관이 있다. 김진국 기자
전시실에는 책상머리에 써놓은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란 글자가 인상적이다. 서울대 성적표 사본, 시위 군중 모형, 뉴욕타임스 회견과 단식, 금융실명제, 군 개혁과 역사 바로 세우기…. ‘대도무문(大道無門)’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현수막이 대계(大鷄)마을과 잘 어울린다.
서울 동작구 상도터널 위에 있는 김영삼 기념도서관. 공사는 거의 끝났지만 2년째 문을 닫아놓고 있다. 김진국 기자
상도동 그의 사저와 가까운 상도터널 위에 김영삼 대통령 기념도서관이 있다. 지하 4층, 지상 8층 건물이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두 달 전인 2015년 9월 준공 허가와 사용 승인까지 떨어졌다. 그런데 취득세를 못 내 아직도 등기를 못한 채 문을 닫아놨다. 서울대와 인근 중앙대 등에 운영을 맡기는 것도 타진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고 한다.
김대중기념관에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옥중 모습 인형. 김진국 기자
연세대의 김대중 도서관
‘연세대 김대중 도서관’은 상대적으로 성공적이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퇴임 직전인 2003년 1월 동교동에 있던 100억원대의 아태재단 건물과 1만6000여 종의 장서와 각종 사료를 연세대에 기증하며 도서관 설립을 제안했다. 정부와 연세대가 60억원씩 부담해 지하 1층, 지상 5층의 도서관을 지어 그해 11월 개관했다.
김 전 대통령의 유품 전시실이 있고, 한반도 평화와 통일 연구 기능도 수행하고 있다. 김대중과 한반도 평화, 옥중 생활, 망명 생활, 야당사, 민주화운동, 재야운동 등 김 전 대통령과 관련한 연구·강좌들이 열린다. 연세대 북한연구원이 주도한 통일학 대학원 과정도 운영했다.
목포 삼학도에 세워진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 앞쪽에 보이는 전시동과 켄벤션동으로 만들어져 있다.
김 전 대통령의 기념물은 광주·전남 여러 곳에 있다. 하의도에는 생가가 복원돼 있다. 추모관과 동상이 있다. 남악신도시 전남도청 앞에는 김대중 광장이 조성돼 있다. 지팡이를 짚은 4.3m 크기의 김 전 대통령 동상이 김대중 광장을 바라보고 있다.
목포 삼학도에는 2013년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이 개관했다. 전시동과 컨벤션동이 있다. 광주에도 김대중컨벤션센터가 2005년 문을 열었다. 대개 적자지만 지방정부들이 부담을 떠안고 자원봉사도 있어 상대적으로 운영이 수월한 편이다.
노무현의 사람 사는 마을
김해 봉하마을로 들어가는 길가에는 노란 바람개비가 촘촘하게 세워져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운명과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노란 리본의 전설이 맞물려 묘한 감상을 자아낸다. 봉하마을은 산과 논까지 모두 한 덩어리 큰 공원이다. 길가에는 몇 곳에서 추모 국화송이를 팔고 있다. 평일인데도 주차장에 관광버스·승용차들이 20여 대 세워져 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다. 전국 사투리가 들린다.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생가 바로 옆에 있는 휴게소. 퇴임 후 방문객들이 '대통령님, 나오세요' 하고 외치면 노 전 대통령이 나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 당시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김진국 기자
생가 바로 옆 넝쿨나무 그늘에는 ‘대통령님 나오세요’란 글과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방문객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들이 전시돼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라고 유언했다. 하지만 그 너럭바위에 이르는 1만5000개의 바닥돌(박석)에 새겨진 추모의 글이 큰 메아리가 되어 울린다.
부엉이 바위와 그 아래 거울못도 하나다. 누렇게 변한 마을 앞 생태문화공원(논)과 방앗간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노 전 대통령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가건물인 추모의 집 한쪽은 전시실, 한쪽은 추모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마당에는 그의 생애가 사진으로 전시돼 있다.
2019년 5월 현재 추모의 집이 있는 자리에 6940㎡(약 2000평)의 노무현대통령기념관이 개관한다. 도로에 붙은 대지 전면은 광장이 되고, 건물 지붕을 완만한 계단 광장으로 만들어 추모와 쉬는 공간이 되도록 이로재에서 설계했다. 내년 5월부터는 대통령 집이 개방된다. 2020년까지 창덕궁 옆 한국불교미술박물관(1191㎡, 약 360평) 자리에는 ‘노무현센터’를 세울 예정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 1만6000개의 박석에 1만8000여명의 추모글이 쓰여 있다. 뒤편에 보이는 것이 부엉이바위다. 김진국 기자
현재가 없는 과거는 죽은 역사
구미를 떠나 봉하를 거치면서 보수의 위기를 실감했다. 문재인 정부여서 그런 것도 아니다. 한쪽은 ‘과거’, 다른 쪽은 ‘현재’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H 카는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현실이 반영되지 않은 과거는 죽은 역사다. 정치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가난한 나라를 먹고살게 만들었다.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큰 업적이다. 그러나 그 후계자들은 그것만 바닥까지 파먹고 있다. 필자만 해도 60년대 어려운 시절을 살아봤다. 그러나 젊은 세대에게 배고픈 시절은 옛날 이야기다. 다른 고민이 많다. 세종대왕이 훌륭해도 그것을 현실 세계의 정치 이념으로 삼기는 어렵다.
‘사람 사는 세상’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래서 노무현은 살아 있다. “여러분의 생각과 실천이 바로 내일의 역사”라고 외친다. 원칙과 상식을 강조한다. 가르치는 게 아니라 참여를 유도한다. 주입하는 게 아니라 생각하게 한다. 노무현재단 후원자가 5만 명을 넘었다. 자발적인 봉사자는 방문객을 대하는 태도부터 다르다. 생가와 묘역, 잔디동산 곳곳에 긴 의자들이 놓여 있다. 사색과 대화의 공간이다. 부엉이바위에서 내려오는 방문객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홍보 영상은 대한뉴스와 스토리형 광고처럼 다르다. 기록물의 시차도 있다. 차이는 그 이상이다. 박제가 된 대통령과 살아 있는 대통령이다. 기념물부터 다르다. 한쪽엔 도서관 서가의 한구석에 먼지 쌓였을 것 같은 책 몇 권이, 다른 쪽엔 현재 베스트셀러들이 잔뜩 꽂혀 있다.
박정희를 가장 망친 건 박근혜다. 추종자들도 박정희의 꿀단지만 파먹는다. 떠먹이는 게 아니라 스스로 찾아서 먹으려고 할 새로운 보수 가치를 만들지 못하면 정권 교체는 더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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