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충격
영속성의 종말
8백 번째의 生命代
지금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의 불과 30년이란 짧은 기간에 평범하고
정신적으로도 건강한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와의 예기치 않았던 충돌에 직면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기술적으로도 가장 앞선 나라의 국민
가운데 많은 사람들도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변화를 위한 끊임없는 요청에 버티어 나가기가 점점 고통스럽게 생각될 것이다. 그들로서는 미래가 너무
빨리 도래하는 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변화에 관한, 그리고 변화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에 관한 책이다. 변화를 통해 성장하는 듯한 사람들,
변화의 파도를 즐겁게 타고 있는 사람들의 책임과 아울러, 변화를 거부하고 변화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또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변화에 대한 우리의 적응 능력에 관한 것이면서, 아울러 미래와 그것의 도래가 가져올 충격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지난 300년 동안의
서구 사회는 변화의 열풍속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러한 열풍은 현재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그 위력을 더해가고 있다. 변화는 점차 가속적인 속도와
예측할 수 없는 충격의 파동으로 고도로 산업화된 나라들을 휩쓸고 있다. 그것이 휩쓸고간 자리에는 온갖 종류의 신기한 사회적 파생물들, 이를테면
이상한 교회나 방임적인 대학을 위시해서 북극 지방의 과학 도시 내지 캘리포니아의 처교환 클럽 등이 출현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열풍은
이상한 인간성을 길러내어, 열 두 살의 어린이들은 이미 어린이 같지 않고 쉰 살 먹은 어른들이 열 두 살 먹은 아이들 같아진다. 그런가 하면
부자들이 가난한 시늉을 하고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환각제에 빠지기도 한다. 더러운 무명 사쓰를 걸친 무정부주의자가 포악한 순응주의자인가 하면,
멋진 칼라 샤쓰를 입은 순응주의자가 잔인한 무정부주의자인 경우도 있다. 결혼한 카톨릭 신부나 무신론적인 목사가 있는가 하면, 유태인 선불교
신자도 있다. 통속적인 음악이나 오페라가 있는가 하면 動力學術도 있다. 플레이 보이 클럽이나 동성애 영화관이 있는가 하면 각성제나 진정제가 있고
분노와 풍요가 있는가 하면 수많은 망각도 있다.
심리 분석학의 전문 용어가 아니면 실존주의의 모호한 상투어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이렇듯
이상스러운 정경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이상 야릇하고 새로운 사회가 우리 속에서 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고
그것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현상과 타협할 수 있겠는가?....
준비 없는
방문객
비슷한 말인 '문화의 충격'이란 용어는 이미 널리 쓰이고 있다. 문화의 충격이란 새로운 문화에의 浸禮가 준비없는 방문객에게 미친
효과이다. 이를테면 평화 봉사단 요원들이 보르네오나 브라질에서 겪는 괴로움이 그것이다. 아마 마르코 폴로도 중국에서 이러한 괴로움을 겪었을
것이다. 문화의 충격이란 이를테면 '예스'가 '노'로 통하고 '정가'가 에누리 되며 사무실 밖에서 기다리게 해도 모독으로 느끼지 않고 웃음이
노여움을 뜻하는 곳에, 어떤 여행자가 갑자기 나타났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런가 하면 이것은 어떤 개인이 사회 안에서 자기 기능을 다하는데
도움이 되어 온, 심리적으로 익숙한 신호들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나 새롭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바뀌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
그러나 문화의 충격은 보다 심한 고질인 미래의 충격과 비교해 보면 비교적 가벼운 것이다. 미래의 충격은 미래가 앞당겨 옴으로
인해서 나타난, 현기증을 일으키는 방향 감각의 상실이다. 바로 이것이 내일의 가장 심각한 질병이라고 하겠다. ....인간은 오늘날 바로 이러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변화가 우리 눈앞에 들이닥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이상스럽게도 이러한 변화에 대처할 준비를 갖추지 않고
있다.
가속적 추진력
좀 과장된 필법으로 묘사하고 있긴 하지만, 생물학자인 줄리언 헉슬리는 "역사 시대의 인간의 진화 속도를 선사
시대와 비교하면 적어도 10만배는 더 빨랐다"고 했다. 구석기 시대 초기였다면 성취하는데 5만년이나 걸렸을 만한 발명이나 진보가 그의 표현대로
"구석기 말기에 이르러서는 단지 1천년 안에 이루어졌고 확고한 문명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변화의 단위가 한 세기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변화의
속도는 지난 5천년 사이에 점점 가속화됨으로써, "지난 3백년 사이에 특히 두드러지고 있다"고 한다.
이와같은 가속도의 경향은 인간의
에너지 소비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석탄 330억 톤을 태울 때 추출되는 에너지의 양을 Q라는 문자로 표시할 때, 기원 후 18세기 반
동안에 소모된 총에너지는 1세기 평균 1Q의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1850년에 이르러 그 비율은 1세기에 1Q로 증가했고 오늘날에는
1세기에 약 10Q에 이르고 있다. 줄잡아 이야기하더라도 이것은 곧 지난 2천년간 인간이 소모한 총 에너지의 절반을 최근 백년 동안에 소모했음을
뜻하고 있다.
이러한 가속화는 교통상의 하찮은 진보를 살펴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예를들어 기원전 6천년 경에는 인간이 장거리를 가는데
이용된 가장 빠른 교통 수단이 시간당 평균 8마일을 달리는 낙타였다. 최대 속도를 한시간에 20마일 정도로 올린 것은 기원전 1600년경 이륜
마차가 발명되고서였다. 이륜 마차의 발명은 참으로 획기적인 것으로서 이러한 속도 한계를 깨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거의 3천
5백면 후인 1784년에 영국에서 최초의 우편 마차가 가동되었는데 평균 속도는 고작 시간당 10마일에 불과했다. 1825년에 발명된 최초의 증기
기관차도 달릴 수 있는 최대 속도가 시간당 13마일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이 보다 발전된 증기 기고나차의 도움으로 시간당 100마일의
속도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188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인류는 이러한 속도에 도달하는데 수많은 세월을 보낸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속도
한계를 네 배로 올리는데는 불과 58년 밖에 걸리지 않아, 1938년에는 비행사가 시속 400마일 선을 돌파했다. 이것을 또 다시 배로
들리는데는 단지 20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1960년데에 이르러 로캣트 비행기는 시간당 4000마일의 속도에 도달했고 우주선을 탄 인간은
시간당 1만 8천 마일의 속도로 지구를 돌고 있을 정도였다. 우리가 통과한 거리나 도달한 높이 발굴한 광물, 아니면 동력화한 폭발력 등 그 어느
것을 검토해 보더라도 이와 비슷한 가속화 경향은 두드러지고 있다. ...
인간이 1만년 동안 자신과 우주에 대해 유용한 지식을 축적해온
진도를 그려보면 그것은 나선형으로 상승하고 있다. 문자가 발명되면서부터 그 진도는 급상승했지만, 그로부터 몇 세기를 지나는 동안에는 지루할만큼
느린 상태였다. 지식 습득면에서 다음으로 일대 도약이 이루어진 것은 쿠텐베르크 등에 의해 이동 인쇄술이 발명되고 나서였다. 가장 낙관적인 평에
따르면 1500년 이전에 유럽은 매년 1천 종의 비율로 책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약간의 가감은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은 10만종의 책을
소장하는 도서관을 설립하는데 만 1세기가 걸릴 것임을 뜻한다. 그로부터 4세기 반이 지난 후인 1950년에 이르러서는 그 비율이 급격히
가속화되어 유럽은 1년에 12만 종의 책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1세기가 걸리던 것이 이제는 단 10개월 밖에 안 걸리는 샘이다. 그리고 단
10년 뒤인 1060년에 이르러서는 그 비율이 또 한번 급격히 뛰어서 1세기 동안에 해낸 일을 7개월 반이면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유럽을 포함한 전세계의 서적 출판이 하루에 1천종이라는 놀라운 숫자에 도달하게 되었다. ...
우리가 미래의
충격이라고 이름붙인 것을 피해 살아 남으려면, 각 개인은 종전보다 월등한 적응력을 지니고 유능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은 스스로를 안주시킬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종교, 국가, 공동체, 가족, 직장 등 모든 낡은 뿌리들은 태풍과 같은 가속적
추진력의 영향으로 뒤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에 앞서 개개인은 가속화의 영향들이 어떻게 자기의 개인 생활을 침식하고
자기의 행태 속으로 파고들어 생존의 본질 자체를 어떻게 변경시키고 있는가 하는 점을 좀더 자세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은
일시성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미래의 충격
인간이 급격한 변화에 직면했을 때 어떠한 현상이 빚어질 것인가,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하면 미래에 적응할 수
있는가(아니면 어떠한 때에 적응할 수 없는가) 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크게는 사회적으로나 아니면 인간의 개인적인 문제 또는 변화의
진도를 조절하는 일을 재빨리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대적인 적응(適應) 파탄에 직면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미래의 충격은 먼 곳에
있는 잠재적인 위험이 아니라 벌써 많은 사람들이 점점 고통을 느끼고 있는 실재의 질병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똑같은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변화를 일으키는 데 전력을 기울임으로써 변화를 갈망하고 심지어 광분하기까지 하는 반면 다른 일부 사람들은 변화를 피하려고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제까지 인간은 현재를 밝히기 위해 과거를 연구해 왔다. 앨빈 토플러는 시간의 거울을 여기저기에 비춰 본 결과, 조리
있게 그려진 미래의 모습이 우리에게 오늘에 대한 값진 통찰력을 마련해 준다는 사실을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영속성의 종말
8백 번째의 생명대(生命代)
미래의 충격은 시간적 현상으로, 변화가 심한 가속도의 산물이다. 이것은 낡은 문화에
새로운 문화를 중첩시킴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으로, 한 사회 안에서 빚어지는 문화의 충격이다.
예를 들면 인간이 출현한 이후의 지난 5만년을
대략 62년이란 생명대(生命代)로 각기 나누어 본다면 약 8백 번의 생명대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8백 번의 생명대 중에서 6백
50번의 생명대는 동굴에서 보냈다.
지난 70번의 생명대 동안에만 한 생명대로부터 다음 생명대로의 효과적인 커무니케이션, 곧 문자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했다. 그리고 지난 여섯 생명대 동안에만 대다수의 인간들이 인쇄된 글자를 볼 수 있었고, 또 지난 네 생명대 동안에만 정확히
시간을 잴 수 있었으며, 지난 두 생명대 동안에만 누구나 어디서든지 전기 모터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날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절대 다수의 물품들은 8백 번째의 생명대인 현재에 이르러 개발되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의 관계를 변화시킴으로써, 변화의
범위를 대폭 확대함으로써,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변화의 속도를 더함으로써 우리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과거와 단절되고 있다. 우리는 낡은
사고방식, 인식 방식, 적응 방식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키고 있다. 우리는 아주 새로운 사회를 위한 무대(舞臺)를 마련해 놓고 그리고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8백 번째 생명대의 요체(要諦)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적응 능력에 의문을 품는 이유이다. 이 새로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새로운 사회의 여러 명제(命題)에 적응할 수 있는가? 적응할 수 없다면 이러한 명제들을 변경시킬 수 있는가?
가속적
추진력
심지어 우리 젊은이들 중에서도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를테면 전혀 과거를 모르기 때문에 현재가 비정상임을 알지 못하는
학생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70년의 인생에는 아마 다섯 번에 걸친 배가 현상이 있을 것인데, 증가가 누적적이기 때문에 한
개인이 늙은이가 되면 그가 속한 사회의 생산량은 그가 태너났을 때에 비해 32배나 될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지식은....... 힘이다”라고 했다. 지금이 말은 현대적인 용어로 풀이해 볼 수 있는데 우리 사회 구조에서는 “지식은 변화”라고 표현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가속적인 지식 습득은 기술과학의 거대한 엔진에 연료를 공급함으로써 그것이 곧 가속적인 변화를 뜻하고 있다.
우리가 매래의
충격이라고 이름 붙인 것을 피해 살아 남으려면, 각 개인은 종전보다 월등한 적응력을 지니고 유능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스스로를
안주(安住)시킬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활의 변화 속도
나이 먹은 사람들은 더 이상의 어떤 변화의
가속에 대해서도 더욱 강하게 저항하고 있는 것 같다. 연령이 보수주의와 관계가 있다고 보는 데는 확고한 수학적 근거가 있다. 왜냐하면
늙은이로서는 시간이 보다 빨리 지나가는 것으로 의식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쉰 살의 아버지가 열 다섯 살의 자기 아들에게 자가용을 가지려면
2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 730일이란 기간은 아버지가 살아온 세월의 단 4%에 지나지 않지만 아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가 경험한
인생의 13% 이상이나 된다.
일시성(一時性)
사물 : 소모사회(消耗社會)
빈곤한 사회에서는 수요가 먹고 사는 기능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비교적 보편적이고
불변적이다. 그러나 풍요로운 사회로 이행됨에 따라 인간의 수요는 점차 생물학적인 생존과의 관계에만 집착되지 않고 고도로 개별화(個別化)되는
경향을 나타낸다.
장소 : 새로운 유목민들
요컨대 초산업화 사회로 이행하는 나라들에서 볼 수 있는 미래의 인간들에게는 이동이란 하나의
생활 방식이고 과거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며 보다 풍요한 미래로의 발돋움인 것이다.
인간 : 부품(部品) 인간
웨스팅하우스 사(社)의
경우 대졸 기술자의 ‘반생(半生)’이란 불과 10년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것은 바로 그가 배운 지식의 절반이 10년 안에 낡아지고 말 것임을
의미하고 있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남들과의 접촉이 많아진다는 것은 바로 관계를 맺을 뿐 아니라 단절할 수도 있고 어떤 단체에 가입할 뿐
아니라 탈퇴할 수도 있는, 그러한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적응력이 가장 많은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은 역시 사회 안에서 가장 많은 혜택을
받고 있는 사람에 속한다.
조직체(組織體) : 애드호크러시의 도래
기계화된 야수(野獸)에게 먹혀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회사원들은 술집을 찾고 학생들은 항의의 발작을 일으킨다.
실상 우리는 관료 체제에 점차 도전해서 결국 그것을 대신하게 될 새로운 조직
체계의 도래(到來)를 지켜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조직으로서, 앨빈 토플러는 ‘에드호크러시(Ad-hocracy, 특수 목적의
조직체)’라 부르기로 한다.
관료 체제가 지닌 세 가지 기본 사실은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관료적 조직체계에서 개인이란
전통적으로 분업화(分業化)된 상황에서 극히 한정된 자리만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고, 둘째로 개인이란 맨 위에서 맨 아래까지 명령 계통이 서
있는, 이른바 수직적 위계 제도(位階制度)에 얽매여 있다는 것이며, 셋째로 개인의 조직적 관계들이란 베버가 강조한 대로 영속화(永續化)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조직체에 대한 개인의 관계는 그 조직체에 가입하거나 징집(徵集)되어 성원으로서의 의무를 느낄 때 시작되고,
개인이 조직을 탈퇴하거나 축출될 때, 아니면 그 조직 자체가 없어질 때 끝맺게 된다.
어떤 사람과 한 조직체와의 관계는 그 사람이 그
조직체로부터 이탈할 때도, 그 조직체가 해체될 때도, 아니며 재편성을 통해서 그 조직체가 변질될 때도 단절된다.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변화란 전적으로 새로운 분위기와 새로운 문제들을 안겨 주는 것이다. 조직 계획이 변동되는 것은 어느 한 구조(여기에는 의무와 해택이 함께
있는데)에 대한 개인의 관계가 단절되고 시간적으로 단축됨을 의미한다. 어떤 하나의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개인은 스스로 방향 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사회가 비교적 안정되고 변하지 않는 한, 그 사회가 인간에게 제기하는 문제들은 일상적(日常的)인 것이어서 예견할 수 있게
마련이다. 그러한 여건 하에서는 조직체계들이 비교적 항구적일 수가 있다. 그러나 변화가 가속될 때는 신기하고 처음 겪는 문제들이 점점 많이
제기되어 전통적 조직 형태가 새로운 조건들에 부적합하게 되고 만다. 말하자면 이러한 조직체들은 이미 대응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권력 관계에서의 혁명적 변동이 그 것이다. 큰 조직체들은 그 자체의 내부 구조를 변경시켜 일시적인 조직 단위를
만들어 내지 않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들의 전통적인 명령 계통을 유지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사소한 변화들이
누적되면 의사 전달 체계가 수직적인 형태에서 수평적인 형태로 바뀌는 커다란 변혁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변혁이 의도하는 바는 의사 전달을 보다
신속하게 하자는 데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수평적 과정은 지난날 신성시되었던 관료적 위계 질서에 일대 타격을 안겨 주는
것으로서, 곧 두뇌와 손발의 비유를 허물어 버릴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수직적 명령 계통이 점차 무시됨에 따라 ‘손발’도 역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조직체가 살아 나가려면 이러한 관료적인 관례(慣例)들을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관료적인 관례들이야말로
조직체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조직체들로 하여금 변화에 무감각하고 재빨리 반응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드렉슬 기술과학 연구소의 경제학
교수인 조지프 라파엘에 따르면, 이러한 결과로 해서 우리는 “지도자와 피지도자 사이의 경계선이 흐려지고 기술 동료들이 함께 일하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베니스에 따르면 이러한 체계 속에 있는 사람들은 “직급과 역할에 따라 수직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기술과
전문적 수련에 따라 신축성 있게 그리고 기능적으로 구분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베니스는 계속해서 하나의 임시 작업반으로부터 다른 임시
작업반으로 오가는 이동률이 높기 때문에 “작업 집단에 덜 집착하게 될 것이다. ...... 복잡한 과제들을 위해 협동해야 할 필요가 증대되어
인간의 교제술은 점점 중요시되지만, 어떤 집단 안에서의 응집력은 상대적으로 감소될 것이다. ...... 사람들은 직업상 빠르고 밀도 있는
관계들을 발전시키는 데 숙달돼야 하고 작업 관계는 그다지 오래 지속되는 것이 아님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보 : 활동적 이미지
새로운 지식의 증대는 우리로 하여금 점점 더 좁은 전문 분야로 몰고 가고 아울러 현실에 대한 내면적인
이미지들을 점점 빠리 수정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일시성 즉 인간 관계의 강제적인 단축은 단순히 외부 세계의
조건 탓만은 아니다. 그것은 역시 우리의 내적 요인들과 관계가 있다. 새로운 발견, 새로운 기술과학, 외부 세계의 새로운 사회적 장치 등은 보다
빠른 변동률로 우리의 생활을 뒤흔들어 관계의 지속 기간을 점점 짧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일상 생활의 변화 속도를 점점 빠르게
밀어붙이고 새로운 수준의 적응성을 요구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요소들은 사회를 점차 악화시킬 사회적 질환인 미래의 충격에 대한 무대를 마련하고
있다.
새로움
과학의 궤도(軌道)
혁명은 곧 새로움을 뜻한다. 혁명은 수많은 개인의 생활 속으로 새로움의 물결을 흘려보내고,
개인들로 하여금 익숙지 못한 제도와 처음 겪는 상황에 직면하게 만든다. 이렇듯 거대한 변화들은 우리 개인 생활에 깊숙이 스며들어 전통적 가족
구조와 성(性)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놓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들은 늙은이와 젊은이들 사이의 전통적인 관계도 파괴할 것이고, 돈과 성공에 관한
우리의 가치관도 뒤집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들은 일과 놀이와 교육도 감지할 수 없을 만큼 변화시킬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변화들은 극적이고 훌륭하며 놀라운 과학적 진보의 맥락 속에서 이러한 모든 현상을 일으킬 것이다.
화학과 화학공학이 놀라우리만큼 발전한
오늘날에도 농부들이 재배하는 것과 비견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식료품도 공업적으로는 생산해 내지 못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분야나 그 밖의 많은 분야에서도 자연은 그들이 가장 탁월한 화학 기술자나 연구원, 심지어 인간보다도 훨씬 우월하다
하겠습니다.
경험을 만드는 사람들
초산업화 혁명은 경제 활동의 수단과 아울러 목적에도 도전하고 있다. 초산업화 혁명은 ‘어떻게’
생산하느냐의 문제뿐 아니라 ‘왜’ 생산하느냐의 문제도 변화시키려 함으로써 경제 활동의 목적 자체도 변질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가족의 파괴
가정은 소멸하지도 새로운 황금시대로 접어들지도 않을 수 있다. 가정은 산산이 부서졌다가 아주 새로운 방법으로 재결속될
수도 있는데, 실상 이렇게 될 공산이 큰 것 같다.
다양성
선택권 과잉의 기원
얄궂게도 미래의 인간은 선택의 결여가 아니라
선택의 지나친 과잉(過剩)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을 수도 있다. 말하자면 미래의 인간은 바로 초산업화 사회의 독특한 문제인 선택권 과잉의 희생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미래의 기계가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고, 인간의 개성을 박탈하며, 문화적 다양성을 제거하리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고집 불통이랄 수밖에 없다. 초기의 대량 생산이 다소의 획일성을 초래했다고 해서, 초산업화 시대의 기계들까지 획일성을
조성하리라고는 볼 수 없다. 미래의 전반적인 추진력은 규격화, 곧 획일적인 상품들로부터 동질화된 예술, 대량 생산적 교육 및 대중문화로부터
이탈해 가고 있음이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기술과학 발전은 변증법적 전환점에 도달하고 있다. 그리고 기술과학은 인간의 개성을 제약하기보다는
인간의 선택과 자유의 폭을 크게 넓힐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얻을 수 있는 물질적, 문화적인 품목들은 많아졌는데, 인간이 이 넓어진
선택에 대처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별개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선택이 복잡해지고 어려워지며 비싸져서 개인을
해방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제약할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선택이 선택권 과인이 되고 자유가 부자유로롭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생활 양식의 다양성
설사 사소한 것이라도 결정은 내리기 어려운 법이다. 결정은 우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오는 압력에 대처하기 위해 확고한 생활 양식에 의존해 있던 때보다 훨씬 사소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더 많은 정보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우리는
불안과 압력과 고독을 느껴 움직이게 되고, 새로운 하부 집단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거나 빨려 들어가는 것을 모른체함으로써 새로운 생활 양식을
택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초산업화 시대로 나아감에 따라 우리는 앞 세대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빠른 속도로 생활 양식을
채택했다가 버리는 사람들을 수없이 보게 된다. 왜냐하면 생활 양식 그 자체가 쓰고 버리는 품목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말이 갑자기 널리 퍼지고 있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동향의 반영이다. 왜냐하면 사회가 단편화되거나 분화됨에 따라 보다 많은 생활 양식
유형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회가 제시하는 생활 양식 모델이 사회에서 많이 받아들여지면 받아들여질수록, 그 사회는 각 개인이 자신의
독특한 일을 할 수 있는 실질적인 여건이 더욱 갖추어지는 것이다.
미래의 인간은 역사상 어느 집단보다 자기 실현을 위한 계기를 더 많이
향유할 것이다.
우리는 과연 수많은 잠재적 자아들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연속적인 자아들 가운데 어느 것이 우리의 모습으로 비칠
것인가? 우리는 가장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단계에서 선택의 과잉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것일까? 다양성과 선택 그리고 자유를 찾아 무모하게
돌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양성의 두려운 의미를 검토하는 일에는 아직 착수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다양성이 일시성(一時星)이나
새로움과 결합할 때, 사회는 역사적인 적응의 위기로 내닫고 만다. 이럴 때 우리의 환경은 너무나 단명하고 너무나 생소하며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적응 파탄의 위험에 직면한다. 이러한 파탄이 다름 아닌 미래의 충격인 것이다.
적응력의 한계
미래의 충격 : 육체적 차원
아주 오랜 옛날 바다가 축소되자 많은 수생 동물들이 어쩔 수 없이 넓어진 해변에
버려지고 말았다. 익숙한 환경에서 쫓겨난 수생 동물들은 제가기 조금이라도 더 살아 보려고 헐떡거리면서 몸부림치다가 죽어 갔다. 양서(兩棲)
생활에 보다 잘 적응할 수 있는 운 좋은 소수만이 변화의 충격을 극복하고 살아 남았다.
미래의 충격이란 인간 유기체의 육체적 적응 체계와
그 의사결정 과정의 과도한 부담에서 야기되는 육체적 및 심리적 고통이라고 규정해 볼 수 있다. 좀더 간단히 말하면 미래의 충격이란 과도한 자극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라 하겠다.
아서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을 잇고 있다. “신체의 저항력과 변화에 대한 사회의 요구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연속적이고 동태적(動態的)인 균형 속에 있다. ..... 여러 가지 해로운 내적, 외적 요소들이 언제나 존재해서 항상
질병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어떤 바이러스 균은 신체 안에 잠복해 있다가 신체의 저항력이 약해질 때만 병을 일으키고 있다. 신경
조직과 내분비 조직을 통해 전달되는 많은 변화 요구에 대해 완벽하게 대처할 수는 없지만, 신체의 저항 체계가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새로운 - 지각될 수 있는 새로움 - 은 신체 내부, 특히 신경 조직 안에서 폭발적인 활동을 촉발시킨다. 정향 반응은 우리의
외부에서 빚어지는 사건의 비율에 따라 우리 내부에서 섬광 전구처럼 터지고 있다. 인간과 환경은 함께 흔들리면서 상호 작용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결국 원점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인간은 변화를 수용하는 능력에 한계가 있는 생물체다. 이렇게 능력에 부치는 일이 강요되었을
때 미래의 충격이라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미래의 충격 : 심리적 차원
우리는 대단히 많은 선택을 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서서히 발전하던 사회에서
필요했던 것보다 휠씬 빠른 속도로 정보를 처리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적어도 우리 가운데 일부는 인식적 자극의 과잉
상태에 빠져 있다. 이러한 현상이 기술 사회에서의 정신 건강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 인가는 앞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윌리 제임스의
말에 따르면, “담배에 불을 붙이고 물 한잔을 마시는 등의 사소한 일을 할 때마다 심사숙고하는 사람보다 더 가련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을 폭넓게 계획할 수 없다면, 우리는 사소한 일에 너무나 많은 양의 정보 처리 능력을 낭비하게 되기 때문이다.
미래의 충격의
희생자임을 알지도 못하는 이들 거부자는 자기 손으로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는 것과 같다. 이들의 대응 형태는, 결국 이들이 적응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처리할 수 있는 문제로부터 하나씩 차례로 다루기보다는 하나의 커다란 생활상의 위기라는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을 크게 하는
것이다.
미래의 충격에 대한 세 번째의 공통된 반응은, 전에는 효율적이었지만 이제는 무관하게 부적절한 것이 되어 버린 습관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행위이다.
사회의 합리성은 그 안에 살고 있는 개인들의 합리성을 전제로 하고 있고 개인의 합리성은 신체 조건과 함께 환경의
연속성과 질서 그리고 규칙 등에 의존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변화의 속도나 복잡성과 인간의 결정 능력 사이에 어느 정도의 상관 관계가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변화의 속도, 새로운 요소의 비중, 선택의 범위 등을 무턱대고 증가시킨다는 것은 이성이 작용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 갖추어진
환경을 마구 뒤흔들어 놓는 결과가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미래의 충격을 안겨 주는 셈이다.
생존을 위한 전략
내일에의 대처
궁극적으로 변화를 조절하려면 우리는 그 미래를 예견해야만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개인적인
미래가 어느 정도 예견될 수 있다는 견해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통속적인 편견과 상치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미래는 알수 없는 것이라고 깊이
믿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 가로 놓여 있는 일부 변화, 특히 어느 정도 크고 구조적인 변화에 대한 가능성을 예측해 볼 수 있는 것이
사실이고, 개인적인 안정대를 설계하는 데 이러한 지식을 활용할 방법까지 있는 것이다.
자신의 미래를 얼핏 살펴 볼 수도 있고, ‘시간과
감정의 예측’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주기적으로 마련하여 앞에 가로 놓인 전체적인 변화의 수준도 산출해 낼 수 있다. 시간과 감정의 예측이란
생활의 여러 가지 주요 측면에 투입되는 시간과 정서적 에너지의 비율을 산출해 내려는 시도이다. 그것은 또 시간과 정서적 에너지가 수년간에 걸쳐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알아보려는 시도이다.
현재의 생활 변화 가운데 상담으로 도움을 줄 수 없는 것들이 많을 뿐아니라, 앞으로 새로운
요소가 더 많아지면 사람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개인적 위기에 휩쓸리게 될 것이다.
미래 시제의 교육
미래의 충격을 피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초산업화 시대에 알맞은 교육 제도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새로운 교육제도를 만들어 내려면 우리는 과거보다
미래에서의 우리의 목적과 방법을 탐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내일의 기술과학은 소심하게 명령에 따르는 사람들이나, 먹고 살려면 웃사람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에는 비판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고, 새로운 환경을 잘 해쳐
나갈 수 있으며, 급변하는 현실에서 새로운 관계를 재빨리 찾아낼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다. 내일의 기술과학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스노우의 훌륭한 표현대로 “골수에까지 미래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개인이 자기의 직장이나 거주지, 사회관계 등을 끊임없이 변경시키는
사회는 학습의 효과를 높일 수 있는 큰 이점을 안고 있다. 따라서 미래의 학교는 단순한 지식만이 아니라 이것을 조작하는 방법까지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학생들은 낡은 생각을 어떻게 버리고, 언제 어떻게 그것을 바꿀 것인가도 배워야 한다. 요컨대 학생들은 배우는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적응이란 연속적 선택을 뜻하고 있다. 개인은 수많은 선택지 가운데 자기의 가치관과 가장 잘 조화되는 하나를 선정한다.
선택해야 할 일이 많아짐에 따라, 지신의 가치관(그것이 무엇이든)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점차 무력해진다. 그러나 가치관의 문제가
보다 중요해지고 있는데도, 현재의 우리 학교들은 그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려 하지 않고 있다. 수백만에 달하는 젊은이들이 유도되지 않은
미사일처럼 이리저리 날뛰면서, 미래로 향한 험한 길을 걷고 있다는 것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더욱 나쁜 사실은 학생들 스스로의 가치관과
선생이나 동료들의 가치관을 분석하도록 권장하는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교육 제도를 거쳐 나가면서 자신의 가치 체계 속에서 모순을
발견하거나 스스로의 생활 목표에 대해 심사 숙고하거나 심지어 이러한 문제들을 어른들이나 동료들과 허심 탄회하게 논의하도록 충고를 받는 일이 한
번도 없다.
어떠한 특정 진행 정보보다도 더 중요한 것으 예측하는 습성이다. 앞을 내다볼 수 있도록 조건 지어진 이 능력은 적응을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실상 성공적인 대응의 비결 가운데 하나는 그 사람의 미래 의식이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다른 실습도 가능하다. 개개인의
미래적 역할 이미지를 길러 내려면, 학생들에게 ‘미래 자서전’을 쓰도록 해서 그들로 하여금 미래의 5년이나 10년, 또는 20년 동안의 자신을
그려 볼게 할 수도 있다.
교육은 미래의 시제로 옮겨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기술과학의 조절
우리는 또한 새로운 과학기술을
바보스럽고 이기적인 목적에 곧잘 활용하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는 눈앞의 경제적 이득을 얻어내려고 기술과학을 서둘러
이용했던 탓에, 우리의 환경을 물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위험한 상태에 몰아놓고 말았다.
영국의 저명한 사회과학자인 제프리 비커즈 경은 이 문제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다. “변화는 가속적으로 증대되지만, 그것에 대한 반응에는 상응할 만한 가속화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통제가 상실되는 바로 그 문턱에 와 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과거의 비합리주의로 되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변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일도 아니며, 절망이나 허무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강력하고 새로운 전략이다. 앞으로 밝혀질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필자는 이러한 전력을 ‘사회적 미래주의’라고 규정해 본다. 우리가 이러한 전략을 익히게 되면 변화를 관리하는 새로운 수준의 능력을 획득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이때까지 활용해 온 어떤 계획보다도 더욱 인간적이고 더욱 장기적이며 더욱 민주적인 형태의 계획을 마련할 수 있다. 우리는 기술주의를 초월할 수 있다.
과거나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기성 사회라는 것은 새로운 생각을 실행해 보려는 몽상가는 물론 그것을 확산하려는 사람에 대해서도 커다란 중압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상론자들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 설사 그들을 존경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실험 정신을 받아들이고 비용을 부담해 격려함으로써 그러한 실험 정신의 이점을 살려 나가야 할 것이다.
민주적 정치 형태가 서양에서 출현한 것은 몇몇 천재들이 그것을 밀고 나간 까닭도 아니고 인간이 ‘자유를 갈망하는 본능’을 드러낸 까닭도
아니다. 사회적인 분화와 보다 빠른 제도로 나아가려는 역사적 압력이 사회적으로 민감한 피드백을 요망했기 때문에 민주적 정치형태가 출현했던
것이다.
변화를 다스리려면 중요한 장기 사회 목표를 분명히 할 필요도 있지만, 아울러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도 민주화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기술 사회에서 앞으로 이루어야 할 정치 혁명, 즉 민중 민주주의의 새로운 확인을 뜻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고도 기술 국가는 자기반성을 해보아야 할 적절한 시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자기반성은 단순히 경제적 측면만이 아니라 사회적 측면의 ‘발전 목표’도 넓히고 규정하는 공개적인 자기 검토여야 한다. 서기 2000년을 목적에 두고 새로운 인간 발전 단계의 문턱에 서 있는 우리는 미래를 향해 맹목적으로 줄달음치고 있다. 과연 우리는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 있는가? 우리가 이러한 의문에 실질적인 해답을 구하려 한다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
과연 38년 전 앨빈토플러가 예상했던 미래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많은 부분은 그 궤도 안에 들어온다고 보여 진다. 그러나 그 모습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과거와 현제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궤도의 오차 범위 안에 들어오는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것이라고 보여 진다. 물론 이러한 예측은 대단한 시도이며 오랫동안 저자의 엄청난 노력의 결과물이다. 미국의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소중한 자료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대량생산으로 대변되는 1950년-60년대의 사회가 더 이상 그렇게 흘러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영속성의 종말이다. 이러한 영속성의 종말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여러 가지 징후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일시성에서 이야기 한다. 이러한 것은 새로움으로 다가온다. 과학은 이것을 현실로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개념도 점점 바뀌고 있다. 핵가족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는 문화의 변화를 가져온다. 바로
다양성에서 그동안 획일화된 문화가 점점 다양화 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히피문화 그것을 저자는 하위문화라고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하위문화가
범람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생활양식이 다양화 되는 것은 당연한 행보다.
적응력의 한계에서는 미래의 충격으로 육체적 차원과 심리적
차원으로 나눠 이야기 하고 있다. 변화속도의 빠르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문화의 변화처럼 전혀 다른
상황을 접했을 때와 같은 증상도 나타나는데 그것을 심리적 차원에서 이야기했다. 어쨌든 미래는 이전과 많은 부분에서 달라지는데 그 변화의 속도가
그동안 느껴왔던 것과 많은 차이가 날것이라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전략에서 저자는 미래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 한다. 크게
교육, 기술과학, 사회적 미래주의의 전략으로 이야기했다. 교육은 그동안 획일화된 교육을 어떻게 변화되는 미래에 맞춰 나갈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묻어난다. 역사가 말해주듯 교육의 문제는 어느 사회에서나 가장 중요한 이슈였다. 저자도 이부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러나 뾰족한
대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쉬운 너무나 아쉬운
아무래도 1970년대 미국의 상황에서 고령화에 대한 충격은 큰 이슈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고령화에 대한 충격은 현 시점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앨빈 토플러의 책에서는 고령화에 대한 부분을 찾아보기
힘들다. 미래의 충격뿐만 아니라 그의 다른 저서에서도 고령화에 대한 이야기는 심도 있게 다루고 있지 않다. 그는 기술과학의 발달이 가져오게 될
현상에 관심이 많은 듯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과학은 결국 정책적인 문제여서 그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할 관료의 문제로 귀결된다. 기술이
어떠한 형태로 나아가게 될 것인가에 따라 사회의 변화 따라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을 운영하는 집단에서는 매우 필요한
정보가 되겠지만 개인의 미래에는 단비가 되어주지 못하는 것 같다. 관심은 가질 수 있지만 앨빈 토플러가 그것에 영향력을 미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변화를 통제해 진화의 방향을 이끌어 가려는 사람에게 필요한 의식을 조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면, 이 책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리라.
현 시점에서 바라본다면 좀더 중요하게 다루어야 했을 부분은 과학기술의 발달이 가져올 사회적인 측면보다는 세계화, 고령화 그리고
교육에 대해 좀더 심도 있게 다루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조금 가져본다. 물론 이것은 부질없는 생각이다. 많은 부분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충격을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명쾌한 답을 해주지 못했다. 상황이 이러니 잘
준비해야 한다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좀더 구체적인 대안이 아쉽다.
누구에게나 미래의 모습은 궁금한 것이리라. 그것이 어떻게 나에게 다가 올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앨빈 토플러가 이야기한 그 변화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우리는 또 다른 미래의 충격을 걱정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물로 내가 속해있는 모든 집단을 넘어 대한민국 그리고 전 세계가 제 각각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만들어갈 사회의 미래에 대해 좀더 고민해보는 유익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