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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홈런 친 프로야구 첫 원터미팅 "스트라이크존을 규정대로 엄격히 적용한다."(단장회의) "쾌적한 관전 문화를 위해 응원단의 앰프 사용을 자제하자."(운영분과) "선수 트레이드 때 병력(病歷)기록도 함께 교환하자."(트레이너분과) 지난 26일 경기도 용인에서 열렸던 제1회 프로야구 윈터미팅에서 합의된 내용 중 일부다. 첫 만남이었으나 각 구단 실무자의 활발한 토론으로 과거 하향식 의사결정 과정을 상향식으로 개선했고 각종 현안에 대해 합의를 얻어내는 성과도 이뤘다. 특히 단장회의에서 통과한 스트라이크존 확대 문제는 내년 시즌의 향방을 가늠할 중요한 내용이다. 단장들은 투수 보호를 위해 현재 타자 허리선이 기준인 스트라이크 상한선을 규정대로 겨드랑이 높이까지 엄격히 적용키로 합의, 내년 1월 초 8개 구단 감독회의를 통과하면 내년 시즌부터 ..
88 서울올림픽, 그 후 30년 눈부시게 푸른 가을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 햇살이 따사로웠다. 1988년 9월 17일. 88 서울올림픽 개막식 날이었다. 오늘은 그로부터 꼭 30년이다. ‘86’과 ‘88’은 전 국민의 이벤트였다. 그땐 그랬다. TV만 틀면, 라디오만 켜면 86과 88을 이야기했다. 86은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88은 88년 서울올림픽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었다. 처음부터 국민들이 원했던 건 아니었다. 당시 총칼로 권력을 잡은 군사 정권은 86과 88을 통해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 군부 쿠데타 세력은 메가 스포츠 이벤트를 통해 국민들의 시각을 정치가 아닌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다. 최근 국민체육진흥공단과 한국체육언론인회가 서울올림픽 30주년을 맞아 발간한 『쎄울! 꼬레아! 꺼지지 않는 불꽃』이란 책..
'70년대 강남 개발 秘話'를 말한다 1970년대 서울 강남개발 등 도시개발 실무를 담당했던 손정목(孫禎睦.75)서울시립대 명예초빙교수는 당시의 서울 도시계획을 '대담.기발.강압.부조리'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孫교수는 18일 서울 도시개발의 역사를 담은 '서울도시계획 이야기'(전5권.한울) 출판기념 간담회에서 "김현옥.양택식.구자춘씨 등 3명의 시장이 재임했던 12년8개월(1966년 4월~78년 12월) 동안 도로.상수도.지하철 등 서울의 하부구조 틀이 거의 다 완성됐다"면서 "그로 인한 난개발 등 문제점도 많지만 당시에는 무엇보다 양적인 충족이 시급했던 상황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렇게 급속히 개발됐던 하부구조나 아파트 등도 2030년께는 수명이 다할 것으로 예측되므로 지금부터 그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孫교수는 50년대 ..
삼풍백화점 붕괴후 김영삼 이가 연설한 내용 출처: 보배드림 https://youtu.be/zVxN744TqGs https://youtu.be/zVxN744TqGs 재수없네 진짜ㅋㅋㅋ 대본대로 지껄이고 나중에 하는 꼬라지 보소 바쁜분은 3분40초 부터 보배민주당 형들 이런거 올려서 죄송ㅋㅋ
김영삼 전 대통령의 말실수 출처: 인스티즈
[Why]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권총 박대통령 시해 독일제 월터 PPK 육군→보안사→군법회의→中情 국정원 "우리한테 없는 것으로 확인"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암살 당시 쓰였던 총, 그가 입고 있었던 피 묻은 옷, 술병과 술잔, 기타 소지품 등등이 잘 보존돼 있나요? … 과연 그런 유물들은 지금 보존돼 있을까? 어디에 있을까? 보존 상태는?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군인들이 그 유물들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40분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安家)에서 총성이 울렸다. 김재규(金載圭)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유신의 심장을 쏘기 위한 심정이라며 일으킨 역모의 신호탄이었다. 박 전 대통령을 절명시킨 그때 그 권총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 할 때 쓴 것과 같은 종류..
[최보식이 만난 사람] “박정희 ‘英雄’ 만든 김재규…’10·26′ 없었으면 朴의 말년 추했을 것” [’중정부장 김재규 死刑 37년'… 당시 변호인 안동일씨] ”대법판사 14명 중 6명 반대… 언론 통제 시절 보도 안돼 판결 나흘 만에 死刑 집행… ‘반대’ 판사들 모두 옷 벗어“ ”박정희와 민주주의 회복은 아주 숙명적인 관계다, 한쪽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 野獸 심정으로 維新 심장 쏴” 중앙정보부장(中央情報部長)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박정희를 시해했고, 이듬해 5월 24일 사형됐던 인물이다. 일부 언론에 ‘김재규 사형 37주기’가 짤막하게 보도됐다. 그날 안동일(77)씨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김재규 묘소에 참배했다고 한다. 그는 '김재규 변호인'이었다. 한때의 짧은 인연인데 그는 지금까지 김재규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있다. 안동일 변호사는“김재규는 160㎝ 남짓했고..
JP “김재규의 발작증, 박 대통령은 몰랐다”“차지철 그놈 죽여야” 김 부장 입에 달고 살아 1973년 12월 27일 서울 중앙청 국무총리 집무실로 김재규 중정차장이 찾아와 김종필 총리에게 신임 인사를하자 김 총리가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하고 있다. 김 차장은 이때부터 동갑인 JP에게 “총리 각하”라고 호칭하기 시작했다. 김재규는 박 대통령의 동기(육사 2기)·동향(경북 구미)이다. [사진 국가기록포털] 1974년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신 뒤 대통령의 정밀한 판단력이 흐려지는 징후는 여러 군데서 드러났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생활의 균형을 잡게 한 건 육 여사였다. 그분이 세상을 뜨자 대통령은 생각과 행동의 균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분할하여 통치한다는 박 대통령의 ‘디바이드 앤 룰’(divide & rule)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권력의 추는 2인자 행세를 하는 차지철 경호실장 쪽으로 쏠리고..